입던 계절을 정리할 때였다.
아리키 모나 x 카야마 이츠키 : 월목 / 2022.04.07 업로드
문득 이상한 날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니 봄인 듯한, 마치 동면이라도 한 양 속눈썹 사이마다 나른한 향기가 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러한 아침.
아리키 모나는 먼지 쌓인 상자를 꺼냈다. 붉은빛의, 뚜껑이 덜걱거리기에 새끼줄을 꼬아 만든 끈을 둘러 묶어 놓은 것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실려 양팔에 안긴 무게는 그 크기를 따르지 못하니 감히 살랑이는 바람에 살포시 얹힌 벚꽃잎을 비유해도 괜찮을 만했다.
"아리키 씨, 뭐 해요?"
잠에서 덜 깬 연인의 목소리가 거실 너머에서 흘러들었다. 그가 아는 연인에게는 속삭이는 말조차도 더뎠다.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문지방을 밟는 걸음이 마치 비를 피해 잎사귀에 쉬는 나비와도 같았다.
아리키 모나의 시선이 햇빛이 바스락대는 창가의 반대편을 잠시 스쳤다. 가느다란 발목에 뭉툭하게 자리한 복숭아뼈가 곱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보니 어련한 봄이다. 연인의 젖은 입술 틈새로 부는 작은 바람과 손끝을 간지럽히는 거친 매듭의 감각, 꿇어앉은 무릎을 누르는 곧은 바닥의 미세한 온기까지 어디 하나 그것이 담기지 않을 곳이 없었다.
"이제 서서히 동계와 춘계 사이의 의복 교체가 이루어질 절기라 사료되어서."
느슨한 목소리가 먼지 섞인 공기에 휘말린다. 언젠가 짓눌려 둥글게 뭉개진 상자의 모서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하다. 여린 손목을 지지대 삼아 덩굴처럼 감기던 새끼줄이 햇볕의 눈길 아래 놓인다. 고작 상자 하나 여는 과정이 누군가 기모노를 벗어내는 모습처럼 섬세하기 그지없다.
때아닌 단풍처럼 붉은 상자의 안에는 옅은 색의 얇은 천들이 알록달록이다. 한 벌 한 벌이 꽃잎처럼 제자리에 가지런히 웅크린 모습이 꼭 색색깔의 풍선이 만개하기 직전의 들판을 보는 듯했다.
자연스레 등을 파고드는 사람의 열기가 있다. 카야마 이츠키가 연인의 손등을 부드러이 감아쥐었다. 저 멀리 수채화처럼 물기 어린 하늘에 실수로 물감을 부은 듯 몽실몽실한 구름이 한가득하다. 떠내려오는 봄에 온 마음을 빼앗긴 이들이 한참 서로를 끌어안는다.
"카야마 상, 봄인 듯하지."
"웬일로 그런 쉬운 단어를 쓰나요? 아리키 씨가."
"가끔은 그러할 때도 있는 것 아닐까."
"물론이죠."
짧은 대화 속 요동치는 노곤함조차 싹이 움트는 때를 상징했다. 녹색의 눈동자가 반쯤 가려지도록 휘는 눈매를 그의 연인은 보았을는지. 막 태어난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시작될 일상들이 가뿟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입던 계절을 정리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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