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더위
이 글을 토끼님께 바칩니다. / 2020.04.03 업로드
새소리가 작게 짹, 울렸다.
날씨가 추워지자마자 꺼내 옷장 한 쪽에 걸어두었던 베이지색 코트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많은 손길이 묻은 옷이다. 나의 손 다음으로 많이 닿은 손길은 아마, 아니 확실히 네 것일 테다. 지난 초봄까지 입고 바로 상자 행이었던 것이라, 누군가가 봤다면 세탁을 해서 입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을 확률이 100퍼센트였다. 그러나 이 집에는 지금 나 혼자이니 그냥 이 향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 입고 싶었다. 왜, 그런 감정 있지 않은가. 소중한 사람의 손이 닿은 무언가는 물에 담그기도 싫어 괜히 망설이게 되는 것. 사람의 몸이야 사흘만 씻지 않아도 티가 나기 마련이라 어쩔 수가 없지만 옷 같은 경우는 굳이 자주 씻어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 해도 꽤 오랫동안이나 이 상태로 있었던 이 코트에는 적용할 말이 아니지 싶기도 하고.
이런 처량한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시간은 20분이나 지나 있었다. 사람 하나가 그리워 내 일상을 버리게 생겼군, 꽤 로맨틱하네. 요 며칠은 늘 익숙한 듯이 그 옆의 다른 옷들을 집어들었지만 오늘은 정말로, 너의 손길에 바람을 쐬어주고 싶다. 그리 생각하며 팔을 끼우자마자 어깨에 후끈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일 년이나 옷의 본분을 다하지 못 해서 그런지 더 뻑뻑한 느낌. 팔을 휘적거리며 그 감촉에 익숙해지고 있을 때쯤엔 밖에서 작은 배들이 강을 누비는 소리가 소소하게 창문을 넘었다. 저 소리가 들리면 정말 나가야 할 때다. 이 때마저 놓치면 싫은 소리를 피할 수가 없기에, 그나마 따뜻했던 공기 속에서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한다. 쭈뼛쭈뼛, 그러나 스스로에게 단호한 손길로 문을 열자마자 냉랭한 공기가 훅 부딪혀왔다. 너무 다른 온도차에 안 쪽의 공기들이 바르르 떨며 더 구석으로 몰려가는 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문을 닫으면, 차갑기 그지없었던 밖의 것들이 되려 물들어 따뜻해진다. 그렇게 내가 집에 돌아올 즈음이 되면 이미 나가기 전처럼 온기가 채워진 후이다.
요새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네가 떠오른다. 내 겨울, 나는 차가운 이 계절만 되면 내 겨울 그 자체였던 네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아지랑이는 몹시 더울 때야 눈 앞에 알랑거리는 것인데, 내 겨울은 내게 참 더웠나보다. 파릇파릇한 새싹 하나 없고 낙엽도 이미 다 쓸려나간 후에 찾아오는 더위는 나에게 그 이질감이 참 컸었다. 그러나 사람이 늘 그렇듯 익숙해졌고 이제 나는 추운 겨울이 너무도 어색하다. 입김이 피어올라 회색빛 하늘에 흐려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시리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다. 후, 하고 일부러 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숨쉬듯 가볍게 내쉬면 그제야 눈에 보이는 물방울들. 사람도 그 과학의 일부라는 것을 나는 그 때서야 처음 알았다. 일부러 울려 했을 때는 그렇게도 메말랐던 양 뺨이, 가만히 눈을 감으니 그 틈새로 배어나오는 물방울들에 젖어 축축해졌던 때. 그 때서야.
아직 떠나지 않은 배가 있었다. 이 시간에 강가에 남아있는 배는 드문데. 쪼그려앉아 바닥에 손을 대니 파스스, 부서지는 흙들이 상쾌했다. 찰기없는 흙을 한 줌 집어 강가에 던져보았다. 그냥 습관같은 것이다. 하루라도 안 하면 그 날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은 느낌에 겨울 그 한 계절만은 거의 반강제로 매일 하고 있는 내 징크스. 흙이 가라앉는 것을 보며 나는 하루의 첫 의문을 강에 띄운다. 언제쯤이면 이 강 위로 내가 던진 흙이 얹히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내가 영생을 산다면 볼 수 있을까. 남들은 정말 쓸 데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의 첫. 첫 의문을 인생 고민 같은 것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아무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이 시간이 유일하다. 아침의 상쾌함과 추위의 메마름, 내 겨울의 폭염, 물이 가끔 들려주는 소리 등이 어우러지는 시간은, 단 이 순간 하나 뿐이다. 내가 매일 촉박함을 애써 무시하고 이 곳에 잠시라도 머물렀다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내 겨울은 몹시도 덥기에, 그 열을 흙 한 줌과 함께 이 곳에 던지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이 곳을 지날 때 흙은 놔두고 그것만 돌려받는다. 그리고 내 손길이 하나 더 묻은 코트를 옷장에 푹, 파묻어놓는다. 내일 다시 입고 싶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예외없이 그 루트를 밟고 똑같은 하루의 똑같은 마무리를 할 것이다. 내 겨울이 모두 지날 때까지, 그래서 모든 것을 다시 잊고 시림을 다시 배워가는 어른처럼, 그렇게 또 내 겨울을 내릴 것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폭우가 내린다면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의 가벼운 발걸음을 뗄 것이다. 우산 없이 온 몸을 다 적시며 너를 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내 겨울의 막바지를 강에 띄울 것이다. 그 이후로 더 이상 내 겨울은 없다.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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