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증진교실

전화

죽은 언니에게 전화하는 글

하이바라 아이는 번호를 누르고선 수화기를 들었다. 짧은 연결음 이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 후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삐-

신호음이 끝나고, 하이바라는 입을 열었다.


언니, 나야. 미야노 시호.

정말 오랜만이다, 그렇지? 오랜만인데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

별다른 일은 아니야.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녀석들이 언니의 전화번호를 아직 가지고 있어서 내가 남긴 메시지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조직은 워낙 이런 IT기술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어쩌면 가능성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 다른 시간선에서는 조직에 행적을 들켜서 폭파에 휘말릴지도 몰라. 물론, 그거 때문만은 아니야. 이제는 진짜 결정했거든. 그 결정에 맞추어 하나씩 변화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이것도 그중 하나고.

음…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인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언니 말대로 또래 친구를 많이 사귈 걸 그랬나 봐. 그 애의 고등학생 친구들은 말을 물 붓듯 쏟아내거든. 나도 셰리가 아니라 시호로 살아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래, 그러면 지금 친구들 이야기라도 해줄게.

오늘 츠부라야 군이 수학 시험에서 백 점을 맞았어. 코지마 군도 백 점은 아니지만 점수가 많이 올랐어. 그래도 열심히 가르쳐 준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체육 시간에는 축구를 하다가 요시다 양이 넘어졌어. 그 바람에 무릎이 까져서 피가 났는데, 다행히 흉은 안 질 것 같아. 실은, 보건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시다 양이랑 이야기를 했어. 요시다가 아니라 아유미라고,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쿠도 군은 나완 다르게 아이들을 이름으로 부르거든. 미츠히코, 겐타, 아유미. 언젠가 떠날 거면서 그렇게 친해질 수 있다니. 그 애도 참 무신경하다니까.

나도 알고 있어. 만남의 끝에는 헤어짐이 있다고.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그렇게 헤어졌으니까. 그래서 난 아직 헤어짐이 두려운가 봐. 그래도 용기를 내는 게, 뭍을 살아가는 이들의 방식인 거겠지.

나도 언젠가 요시다 양을, 아유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있지, 실은. 그냥 죽고 싶었어. 언니가 죽고 나서, 정말로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언니를 원망하는 게 아니야. 언니의 죽음에 일조한 스스로를 원망했을 뿐이야. 그 몇 안 되는 확률에 몸을 맡기고 약을 삼켰을 때부터 이미 시호는 죽었어. 이후 은사를 만나 하이바라 아이가 구원을 받은 거지. 참 진부한 이야기지?

당시엔 내 죽음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어. 녀석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느껴졌거든. 결코 나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나뿐만이 아니라, 그 애의 주변까지 철저하게 박살 날 걸 알았어. 그런데 그 애가, 쿠도 군이 살아가라고 했어. 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줬어.

그래서 여기서 버텨볼 거야. 박사님도, 아이들도, 쿠도 군도 내게 모두 소중해. 어둡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빠져나온 건 나였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준 건 모두 덕분이었으니까. 요시다 양도 그랬거든. 도망치면 이길 수 없잖아, 절대로. 이왕 도망치지 않기로 한 거, 이겨야하지 않겠어?

아, 쿠도 군이 좋아하는 여자아이 있잖아. 그 아이가 날 구해줬을 때 언니처럼 느껴졌다? 태양을 그리워해도, 폭풍우가 몰려와도 절대 시들지 않는 그 청결한 향기가 언니를 닮았거든. 어쩌면 나, 아직도 언니를 많이 그리워하나 봐.

그래서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이대로 살고 싶어. 미야노 시호보다는 하이바라 아이로서,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 시호로 언니를 만난 것처럼, 아이로 많은 인연을 만들어버렸거든. 나는 욕심쟁이라 더 나아가려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려고 해.

이게 언니가 원했던 내 모습이려나.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학생으로서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친구랑 이야기하고, 미래에는 사람을 죽이는 약이 아니라 살리는 약을 개발하는 그런 삶. 내가 감히 그런 삶을 꿈꿔도 되는 걸까 싶지만, 그래도 꿈꿔보려고. 부디, 언니가 이해해 주길 바라.

안녕은 너무 슬픈 말이니까, 대신 이렇게 말할게.

잘자,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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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댓글 4


  • 사려깊은 기린

    울다.

  • 전설의 날다람쥐

    읽다가 울었어요

  • 반짝이는 까마귀

    슬프다 나 죽으면 내 동생 어캄 ㄷㄷ;

  • 추워하는 바다표범

    좋은느낌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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