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16
ACT II
#16. 퍼킨스
FBI 워싱턴 지부, 범죄수사과에서 작전지원부에 지원요청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를 알게 된 강력반의 선임 요원 퍼킨스가 상사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과장님, 제가 지원은 필요 없다 분명히 말씀드렸잖습니까!”
”말 좀 들어, 좀! 이 사건을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쪽도 나름 전문 인력으로 보내주는 거야.”
그 말에 퍼킨스가 대차게 눈알을 굴렸다. 수사과 과장은, 이 말 안 듣는 부하직원의 실적이 조금만 안 좋았어도 진작에 다른 부서로 전배시켜 버렸을 만큼, 매번 이렇게 퍼킨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과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번에도 신참 요원 울려서 나 면목 없게 만들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 알았어?”
”고작 1년 차 애송이 데리고 다니는 게 오히려 골치라니까요!”
퍼킨스가 말을 내뱉자마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새까만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퍼킨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과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작전지원부에서 왔습니다.”
”아아…. 그래, 왔구만. 여기 인사해. 새로운 파트너, 리처드 퍼킨스라네.”
과장의 소개에 남자가 몸을 돌려 퍼킨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요원님.”
깊은 한숨을 내쉰 퍼킨스가 어쩔 수 없단 티를 팍팍 내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름이 뭐지?”
남자의 은회색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애송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과장은 고개를 숙였고, 어이가 없어진 퍼킨스는 앞에 선 인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남아있는 이 자는 정말 애송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서슬 퍼런 눈동자는, 마치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인간처럼 날카롭게 벼려있었다.
첫인상은 최악이었으나 여러 사건을 함께 진행해 나가며 퍼킨스는 남자, 노먼 제이든에 대한 평가를 대거 수정했다. 애송이는커녕, 때론 퍼킨스보다도 노련하게 굴 때가 많아서 가끔은 이 자가 수사국의 정보를 캐내려 들어온 CIA의 첩자가 아닐까 하는 억측이 든 적도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긴 했다. 노먼은 첩자라기엔 지나치게 굼떴으니까. FBI 체술 훈련을 제대로 수료하긴 한 건지, 아니면 그냥 시야각이 안 좋은 건지. 용의자를 쫓다가 오만군데에 부딪히며, 넘어지고, 뒹굴었다. 그런 주제에 끈기는 있어서 기어코 범인을 잡긴 했지만. 가끔가다 보면 노먼은 범인의 총칼보단 시장바닥 야채 바구니에 맞아 죽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였다.
노먼은 아주 예의 바르고 한없이 건방졌다. 다른 요원에게는 서글서글 굴면서도 퍼킨스 앞에서만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기회가 날 때마다 첫날 했던 실수를 상기시켜 주었고, 결국엔 퍼킨스가 노먼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그의 비아냥거림이 겨우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역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인가, 노먼은 저보다 한 계급이 높고 까마득한 경력 차를 가진 퍼킨스에게 마치 동기 대하듯 했다. 다행히도 퍼킨스는 능력 있는 자들에게만큼은 관대했고 노먼은 충분히 그 관대함 속에 들 자격이 되었다. 초반에 조금 삐걱대던 둘은 금세 괜찮은 합을 맞춰나갔고 나중에는 그들이 해결해 낸 사건 수가 수사과 내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자랑했다. 부서는 달랐으나 주 업무가 겹쳤기에 둘은 자주 마주쳤다. 이제 퍼킨스의 전담 지원은 노먼 제이든이 되었고 전문 수사 분석이 필요할 때마다 퍼킨스는 곧장 노먼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다 언제 한 번은, 노먼이 퍼킨스를 사지에서 구해낸 사건이 있었다. 노먼은 퍼킨스 역시 적잖게 자신의 뒤를 봐줬으니 이제야 공평해졌다는 말을 해대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넘겼으나, 퍼킨스는 그 후로 이 어린 후배에게 부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FBI의 수사관을 대상으로 ARI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노먼은 당연하단 듯이 완벽한 점수로 프로그램을 통과했고, ARI를 사용할 권한을 획득했다.
노먼은 그때부터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수사본부 한 팀이 며칠은 족히 조사해야 할 까다로운 현장들도, 단독으로 몇 시간 훑어보는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 짓고 범인을 특정했다. 퍼킨스는 잠깐 쓰고서도 어지러워 내동댕이쳤던 안경을, 이 젊은 요원은 하루 종일 쓰면서도 마치 제 눈동자처럼 다뤄댔다. 아직 20대의 팔팔한 청년이라 그랬다기엔 그 또래의 수많은 요원 역시 ARI에 통 적응을 못 했다. 이제 안경은 요원의 책상 서랍 구석에 처박혀 기술부의 예산이 함부로 새어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어린 확신을 받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노먼이 날개 돋친 듯 화려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많은 요원이 ARI의 단점을 보완한 신모델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술부가 하는 일이 늘 그렇듯 교체된다는 말이 나온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자, 요원들은 그 안경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원래 하던 방식의 수사, 즉 노가다를 뛰어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퍼킨스만은 유능한 파트너의 도움으로 여전히 월등한 공적을 자랑했다. 노먼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용의자를 추려내면 퍼킨스가 추가적인 정보를 살펴보고 그에 맞는 지원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둘은 아주 죽이 척척 맞는 동료가 되었다.
그러기를 3년, 기어코 일이 터졌다.
노먼에게도 ARI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는 퍼킨스가 봐온 그 어떤 부작용보다 심각했다. 다른 요원은 기껏해야 현기증과 멀미를 호소하고 코피만 좀 나고 말았지만, 노먼은 쓰러진 후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맸다. 회의실에서 갑자기 고꾸라져 귀와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파트너를 보며, 퍼킨스는 정말 오랜만에 동료의 죽음을 목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의식을 되찾은 노먼은 빠르게 회복했으나 ARI는 기술 부서로 넘어갔다. 노먼은 마치 수족을 잃은 것처럼 우울해했다. 퇴원 후 곧바로 작전지원부와 기술부 담당 부장에게 찾아갔으나 돌려받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더더욱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퍼킨스는 그에게 이만 포기하라 충고했다.
그러나 며칠 뒤. 노먼이 직접 FBI 최고 국장을 찾아가 ARI를 돌려달라 요구했다는 소식을 동료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퍼킨스는 그 애송이가 드디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일개 요원이, 법무부 장관을 만나고 돌아온 국장이 있는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자신의 성과와 실적을 눈앞에 들이밀며 ARI 재지급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전 수사과에 퍼졌다. 퍼킨스는 능력 있던 파트너가 미처 다 피지 못하고 져버린 것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단 1주일.
ARI를 쓴 노먼 제이든이 승리자의 미소를 띠며 사무실로 걸어들어왔을 때. 퍼킨스는 난생처음으로 이 애송이를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ARI 부작용 방지를 위해 트립토카인이라는 향정신성 약물이 노먼에게 추가로 지급되었다. 이론적으론 고카페인 음료를 마셔 잔뜩 각성한 신체에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했다. 당연히 신체에 좋을 리가 없었다. 노먼은 ARI를 돌려받는 대신 하루 1시간 이상 착용하지 않을 것을 권고받았다. 한 번 부작용을 겪었던 노먼은 그 말을 꽤 잘 지켰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듯이 시간이 갈수록 노먼은 안경을 쓰는 횟수와 시간을 점차 늘려나갔다. 퍼킨스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자신은 요원으로서 필요한 일을 하는 거라며 시도 때도 없이 트립토카인을 주입하고 몸을 혹사했다. 아마 이렇다 할 부작용이 다시금 찾아오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쌓여가는 실적에 몇 년 안 되어 둘 다 한 계급씩 특진했고 노먼은 선임 수사관으로, 퍼킨스는 수사 감독관으로 올라갔다. 퍼킨스야 그렇다 쳐도 노먼의 경력을 계산하면 이는 파격적일 만큼 빠른 승진이었다. 그리고 노먼은 얼마 안 가 작전지원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프로파일러 자리에 지원했다. 연차도 한참 모자란 애송이가 용감하기 짝이 없다며 비웃는 퍼킨스의 얼굴에 당당히 합격장을 던지고, 노먼은 콴티코로 떠났다.
그 후로 퍼킨스는 한동안 노먼을 보지 못했다. 버지니아주 범죄행동분석팀에서 일하게 된 노먼은 전국에 산재한 미제사건을 해결하느라 바빴고, 퍼킨스는 그사이 디트로이트로 전근해 온 터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평생 볼 안드로이드를 이곳에서 다 봤다. 인간을 조사하는 데엔 이골이 나 있었지만, 안드로이드를 조사하는 건 정말이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불량품이 오류를 일으키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고 퍼킨스는 몰려드는 업무량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안드로이드 범죄 대응팀의 지휘 감독관으로 임명된 날. 한 소녀가 퍼킨스의 눈앞에서 추락했다. 아이가 친구처럼 대하던 또 다른 불량품이 벌인 일이었다.
안드로이드는 더 많은 사람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피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퍼킨스의 동료 FBI도 불량품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두 명이나 순직했다. 퍼킨스는 사이버라이프 사에 대한 수사권을 몇 번이고 요청했으나 모조리 기각당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스트랫포드 타워 침입 사건이 터지고, 안드로이드가 방송국을 해킹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영상을 전국에 내보냈다. 드디어 정부의 승인이 났다. FBI가 불량품 관할 사건을 완전히 넘겨받았고, 계엄령이 내려졌다. 퍼킨스가 총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때쯤, 모든 불량품의 씨를 말리려 이를 갈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무리가 수용소를 향해 나아갈 때 그는 공격 명령을 내렸고 안드로이드는 계속해서 다가왔다. 동포가 죽건 말건 상관도 안 하며. 상부는 불량품을 몰살하라 명령했고, 퍼킨스는 이에 따라 행동했다.
그렇게 안드로이드가 열 대 남짓 남았을 무렵, 퍼킨스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군인들이 총을 내렸고 대통령으로부터 직접적인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행진하기 전과 달리, 그깟 노래 하나에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 안드로이드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였는지 완벽히 잊은 듯했다.
퍼킨스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좌천되었다. 그에게 안드로이드 사살 임무를 내린 FBI 수뇌부는 대중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퍼킨스를 언론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책임자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3개월. 그는 또다시 감독관으로 강등당했다.
‘해방의 날’이라 불리는 2038년 11월 11일. 그로부터 반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안드로이드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늘어났으나 불량품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증가세를 타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안드로이드 범죄 대응팀의 일손이 부족해지고, 콴티코에서 새로운 감독관이 디트로이트로 파견되었다. 퍼킨스는 그렇게 이전 파트너를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전임자가 사임하고 그 뒤를 이어 부임한 FBI 디트로이트 국장, 데이나 깁슨으로부터 노먼의 디트로이트 발령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퍼킨스는 자신과 노먼이 함께 이룩해낸 실적을 그에게 넌지시 흘렸다. 깁슨은 두 유능한 인재를 따로 떨어뜨려 각자에게 신입 요원을 배정해 주는 편이 장기적으로 좋다고 여겼으나, 퍼킨스가 이번에는 노먼의 까탈스럽고 무대포적인 성격에 대한 험담과 함께, 그가 날뛸 때 고삐를 쥘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주장을 또다시 티 나게 흘림으로서 결국 깁슨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둘을 파트너로 배정하게 만들었다. 퍼킨스는 그러면서도 철석같이 자신이 노먼과 파트너가 되길 원한 게 아니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노먼 제이든은 필라델피아에서 2년간 잡지 못한 연쇄살인마를 단 며칠 만에 잡아넣은 영웅으로 돌아왔다. 그 일로 노먼은 또다시 한 계급 특진했고, 퍼킨스와 같은 수사 감독관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이제 같은 부서에서 안드로이드 범죄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다.
퍼킨스는 이때쯤부터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공생해 나가는 현실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FBI에도 안드로이드 직원이 하나둘 생겨났으니. 웃기게도 그들은 불량품이 되어 FBI를 뛰쳐나갔으면서, 이젠 정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일자리를 되찾으러 돌아왔다. FBI는 대중의 눈치를 보며 이들을 받아들여 줄 수밖에 없었다.
퍼킨스는 처음엔 이 결정에 굉장한 반감을 품었다. 그러나 몇 개월 지켜본 결과, 그들에게도 고유의 성격이 존재함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사건을 수사하며 면담한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그가 심문하고 잡아 처넣은 안드로이드 범죄자의 행동 방식과 범죄 유형이 인간의 그것과 비슷하다 못해 똑같았으니. 적어도 그들에게도 인간과 닮은 욕구가, 감정이 있다는 것 정돈 인정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쯤은 안드로이드가 제공하는 업무적 편리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또 반쯤은 불신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반면, 노먼은 안드로이드에 대한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마치 인간 대하듯 대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하지만, 동시에 차갑고 냉정하게. 노먼은 어느덧 10년 차 베테랑 요원이 되었고 나이가 주는 침착함 때문인지 그의 성격은 신참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변해있었다. 어느 면에선 여유가 생겼고, 어느 면에선 좀 더 냉소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점이 있었다. 무모한 정의감. 아니, 그 점만큼은 더 심해진 듯 보였다.
FBI에 입사한 모든 요원은 누구나 다 처음엔 자신이 맡은 사건을 멋지게 해결해서 정의를 실현하리란 무모함이 존재했고, 이는 어찌 보면 요원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함양이었다. 그건 퍼킨스도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문제 삼을 점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먼은 그런 단순한 정의감을 넘어서, 몸을 사리지 않고 위험 속에 거리낌 없이 뛰어들었다. 일반인이라면 영웅으로 취급할 만한 성품이었으나 오랜 수사경력에 더해 사람의 심리를 깊이 공부한 퍼킨스에겐, 그건 영웅적 행동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신호로 다가왔다.
노먼은 어릴 적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퍼킨스도 그런 걸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간 노먼이 무심결에 흘렸던 말과 대략의 이력을 종합했을 때 알아낼 수 있는 게 적진 않았다.
그는 부유층의 입양아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온 인재였다. 보통 그런 경우엔 극성맞은 부모 아래서 자란 도련님 같은 면모를 보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노먼에겐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휘황찬란한 호텔이건, 매일 같이 살인사건이 일어날법한 허름한 모텔이건, 어디서든 잘 잤고 거친 범죄자 사이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게다가 자주 있진 않지만 가끔가다 내뱉는 걸쭉한 욕설이나 비아냥거리는 말투 역시 몹시 자연스러웠다. 굳이 도련님 같은 면모를 찾자면… 구사하는 고급 어휘, 몸에 밴 예의범절, 까탈스러운 식성 정도랄까.
게다가 노먼은 가족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퍼킨스는 노먼이 휴가계를 내고 보스턴에 다녀온 후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당시 부모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노먼은 인정욕구가 다른 이보다 강했으며 약한 모습을 내보이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별것도 아닌 부상에 엄살을 부린 적은 종종 있었으나 뚜렷하게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몇 가지 요소에선, 상사의 권고를 듣지 않고 도망 다니거나 어쩔 수 없이 면담에 참석해도 상담사의 눈 마저 속이며 능글맞게 넘어갔다. 노먼은 솔직한 매력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만큼 비밀이 많은 인간이기도 했다. 누군가 함부로 선을 넘으려 하면 명백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퍼킨스는 자주 봐왔다.
노먼은 특히나 어린 피해자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그가 콴티코에서 아동 관련 범죄를 주로 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퍼킨스는 크게 걱정했다. 자신이 안드로이드 사건으로 정신이 없지만 않았어도 그도 노먼을 따라 콴티코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퍼킨스가 정말 그랬다면, 노먼은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 뻔했다. 말마따나 노먼은 필요 이상의 간섭과 걱정을 극도로 싫어했으니. 그렇기에 퍼킨스는 그가 사선을 넘나드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조마조마해하기보단, 여기서 자신의 일을 하며 노먼이 좀 더 성숙한 요원이 되어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퍼킨스의 바람은 처참히 어그러졌지만.
노먼은 요원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한 인재가 되었으나, 인간으로선… 글쎄. 노먼의 됨됨이를 논하기에는 퍼킨스 스스로가 그렇게 훌륭한 인간이 아니기에 판단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노먼 때문에 그의 흰머리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본 파트너의 ARI 의존도는 이전보다 훨씬 높아져 있었다. 그는 가끔씩 손을 떨고 코피를 쏟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안경을 착용했다. 퍼킨스는 물론이거니와, 깁슨 역시 노먼이 ARI를 쓰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노먼이 병원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많아졌고, 이는 전부 FBI 의료기록에 올라왔다. 깁슨이 그를 불러 충고했으나 노먼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RK800, 코너와 함께 사건을 수사한 며칠간 노먼은 그놈의 지긋지긋한 ARI를 딱 하루, 착용하지 않았다. 근 반년간 퍼킨스가 봐왔던 바로는 주말을 제외하곤 그게 노먼의 ARI 착용 중단 최장 기록이었다.
노먼은 코너가 다시 경찰서로 돌아갔다는 핑계로 깁슨에게 찾아가 몇 년 전 최고 국장에게 했던 짓을 똑같이 반복했고, 이번에는 당시 받아냈던 ARI 특별사용허가서와 함께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의료 소견서까지 추가로 제출하여 깁슨을 설득해 내는 데 성공했다.
퍼킨스는 ARI를 달라며 손을 내미는 노먼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자신의 파트너가 그 이후로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음에 탄식했다. 국장의 허가 마저 떨어진 이상 퍼킨스도 더는 강제할 수 없었다. 깁슨은 퍼킨스더러 노먼을 유심히 지켜보라 당부했고, 퍼킨스는 속으로 그럴 거면 국장 본인이 그의 자리를 대신해 보라 따지고 싶었으나 애써 인내심을 발휘해 꾹 눌러 담았다. 노먼과는 다르게, 자신은 상사에게 함부로 대들지 않는 성숙한 요원으로 성장했으니.
노먼은 또다시 몇 주간 그 안경을 갖고 까불며 사건을 해결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더는 자신의 앞에서 ARI를 쓰고 공놀이를 하는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은, 노먼이 정보를 찾는답시며 안경을 착용하고 팔을 휘두르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퍼킨스가 알기로 그런 커다란 동작은 ARI를 조작해 정보를 찾는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날은 점점 추워졌고 퍼킨스는 이제 재킷 위에 코트를 걸쳐 입어야 했다. 거리 곳곳에 할로윈 장식이 가득했다. 퍼킨스는 집을 나서다가 이웃의 정원에서 도로까지 굴러 나온 호박에 걸려 크게 넘어질 뻔했다. 볼썽사나운 자세로 간신히 균형을 잡은 퍼킨스가 욕설을 지껄이며 호박을 걷어찼다.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의 호박은 떼구르르 굴러 이웃의 정원으로 도로 들어갔다. 동그라미도, 세모도 아닌, 희한하게도 네모꼴로 만들어놓은 눈이 마치 파트너의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똑 닮아서 퍼킨스는 한층 더 열이 뻗쳤다.
퍼킨스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주차된 차로 걸어가며 퍼킨스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바라봤다. 정말 타이밍이 뭣 같게도, 그의 파트너로부터 온 전화였다.
퍼킨스가 통화버튼을 누르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왜!”
[깜짝이야. 또 웬 성질이야?]
“젠장. 이놈의 멍청한 할로윈이니 뭐니, 죄다 없애버려야 해.“
[갑자기 뭐야. 굴러다니는 호박에 넘어지기라도 한 거야?]
오싹해진 퍼킨스가 고개를 빠르게 돌려 주변을 살폈다.
“너 지금 어디야. 나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지?”
노먼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저번에 보니까 네 이웃들, 부활절 장식에 진심이더라고. 나도 이상한 계란 모형에 걸려 넘어질 뻔했어.]
퍼킨스는 노먼이 막 디트로이트로 발령된 후, 집을 구하러 다닐 동안 자신의 집에 잠시간 머물게 해줬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이웃은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토끼 동상이며 계란 따위를 동네 여러 군데에 배치해 놓았었다.
퍼킨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나 지금 출근 중인데.”
이번엔 노먼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 말고 DPD로 와. 코너를 데려가야 해.]
“코너? 왜?”
[이번 사건, 우리랑 같이 수사하기로 했어.]
“뭐? 또 그쪽에서 협조 요청한 거야? 메일함에 아무것도 안 들어와 있던데?”
[아니…. 내가 요청했어. 미안, 너한테 미리 말해야 했는데.]
퍼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네가? 언제?”
[어제 우리 따로 조사 나갔었잖아. 그때 코너랑 다시 마주쳤는데… 이것저것 얘기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됐어.]
퍼킨스는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도 깁슨도 아닌, 노먼이 그 기계에게 협조를 요청할 만한 이유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노먼이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오면 설명해줄테니. 일단 그쪽으로 와. 어차피 거기서 현장으로 바로 가야 하니까.]
퍼킨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좋은 건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기계 놈은 귀찮았지만 적어도 그가 있으면 파트너가 ARI를 쓰는 횟수를 줄일지도 몰랐다. 빠르게 판단을 끝낸 퍼킨스가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1번 관할서, 맞지?”
[응. 맞아.]
“15분 뒤에 도착하니 기다려.”
[좋아. 커피는 내가 대령할게.]
“베이글도. 따뜻하게 데워서.”
노먼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퍼킨스는 목적지를 재설정하고 차를 돌려 버밍엄 거리를 빠져나갔다. 차량이 만든 바람에 도로 위에 깔린 노란 단풍잎이 산산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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