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22
#22. 죄
아직 할로윈까지 며칠이 남았건만, 파티는 이미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퍼킨스는 난데없이 나타난 축제 같은 시위 행렬에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차를 멀리 돌려 어스킨 가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주차한 후, 현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인간들이 망자를 위로한답시고 만든 기념일에 안드로이드 역시 끼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작년에 희생당한 동료 안드로이드를 추모한답시고 거리 행진을 벌였다. 얌전히 걷기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시퍼런 페인트를 시내 곳곳에 뿌려가며 시위하는 안드로이드도 있었다. 도로는 통제되었고 과열된 분위기 속, 정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경찰 인력이 대거 투입되었고 시민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불화가 일어날라치면 바로 나서서 중재했다.
FBI에도 비상이 걸렸다. 아직도 디트로이트 지부를 해체하지 않았냐며 욕설을 퍼붓는 항의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렸고, 깁슨은 모든 요원에게 이 기간 가급적 안드로이드를 자극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공고를 내렸다. 또한 수많은 인파가 모인 곳에서 혹시라도 일어날 테러에 대비하려 요원을 주요 거리 곳곳에 배치했다. 평상복을 입은 채로 행렬에 끼어, 수상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는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퍼킨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중에 대열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양복을 쫙 차려입고 어리버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수사관을 마주한 퍼킨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휴즈 역시 퍼킨스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퍼킨스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 핀잔을 줬다.
“국장 말 못 들었어? 정부 인간처럼 차려입고 다니지 말라 했잖아.”
그러곤 휴즈의 허리춤에 달린 신분증을 빼내어 그의 재킷 안쪽에 집어넣었다.
“아예 저 시위대 앞에서 FBI라고 소리치고 다니지 그래?”
휴즈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자신보다 열 배는 더 정부요원처럼 생긴 퍼킨스에게 아무런 말도 못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설마 이딴식으로 입고 잠복 수사를 나온 건 아니겠지?”
휴즈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동경하는 제이든 요원과 파트너 관계인 이 감독관은, 또 그의 파트너와는 다르게 매우 무섭고 엄격했다. 휴즈는 이상하게 퍼킨스 요원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맡고 있는 사건 조사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시위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네 팀원들은?”
“전부 다른 현장으로 갔습니다. 저는 후속 탐문 수사를 하는 중이었고요.”
“어제 노먼이 프로파일링해 준 사건?”
“네.”
퍼킨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 알았으니, 행인이랑 부딪히지 말고 최대한 골목으로 다녀. 그 갑갑한 넥타이 좀 풀고. 빌어먹을 요원이라고 시비 털리기 싫으면.”
그리곤 주머니에 손을 꽂고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휴즈는 퍼킨스의 번듯한 정장과, 단정하게 맨 넥타이와, 차려입은 회색 코트와, FBI 로고가 박힌 사원증이 퍼킨스의 목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모습을 그저 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돌고 돌아 겨우 현장을 찾은 퍼킨스는 어스킨 가의 으슥한 골목에 위치한 통제선 안으로 들어갔다. 두 명의 경찰이 저 멀리 떨어진 사거리의 시위 행렬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퍼킨스의 요원 신분증만 확인하곤 다시 몸을 돌려 저들끼리 수다를 떨어댔다.
퍼킨스는 말없이 현장을 쓱 둘러봤다. 골목 양 옆으로 철제 펜스가 높이 쳐졌고, 문 한 짝이 고장 나 덜컹거리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곳은 다른 현장과 달리 쓰레기통은 없었으나, 무단투기 된 각종 폐자재와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 던져서 쌓인 쓰레기가 이리저리 널렸다.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행사와 시위 인파로 북적이는 이런 곳에서 현장 감식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증거 대응팀이 왜 새벽에 호출되어 밤새도록 이곳에 있었는지, 왜 아침이 되자마자 싹 철수해야만 했는지 알게 된 퍼킨스는 타이밍도 안좋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드로이드가 발견된 지점에 설치된 표식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어 전달받은 현장 사진과 대조해 보았다. 목이 없는 그 몸체는 폐품 사이에 반쯤 파묻힌 채였다. 퍼킨스가 주변의 쓰레기를 발로 툭툭 차며 뒤적거렸지만 이미 중요해 보이는 증거품은 모조리 대응팀이 가져간 후였다.
퍼킨스는 통제선 밖으로 나가 주변에 감시카메라가 있는지 살폈다. 범인은 이 도로 근처에 차를 주차해 피해자를 유기했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근처에 거주하는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불과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시신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감시 카메라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퍼킨스가 고개를 틀어 맞은 편에 보이는 아파트와, 골목 양옆에 위치한 5층짜리 건물을 차례로 둘러봤다. 창문의 개수와 건물의 크기로 판단하건대 최소 80가구. 이들 중 범인을 목격하거나 적어도 범인의 차량을 본 사람이 있을 터였다. 다만, 그 몇 십 가구를 일일이 방문해 탐문 수사를 할 생각을 하니 퍼킨스는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노먼 혹은 코너, 둘 중 하나는 이쪽으로 데려오는 게 나았을 테지만, 그러면 노먼은 또 여기서든 저기서든 ARI를 들고 설쳤을 것이고 퍼킨스는 그 꼴을 볼 바에야 그냥 둘을 함께 보내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럼에도 그는 휴즈와 마주쳤던 저쪽 거리를 음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휴즈네 팀은 여섯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는데 안드로이드 대응팀은 고작 단둘이서 조사와 심문, 서류 작성까지 해야 했다. 아니, 이제는 일시적 셋이 되었지만…. 퍼킨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인도 밝혀내지 못한 이 상황에, 심문과 보고서 작성은 아직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둘을 불러 일단 탐문부터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퍼킨스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누르던 중, 시야 한 편에 무언가 언뜻 비쳤다.
처음에는 도로에 흔히 보이는 검게 눌어붙은 껌딱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수많은 현장을 봐 온 퍼킨스는, 묘하게 고동색이 감도는 그 흔적이 뭔지 대번에 알아챘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인도의 연석 위로 핏자국이 응고되어 있었다. 퍼킨스는 노먼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감식팀이 보내준 현장 사진을 빠르게 넘겼다. 어디에도 이 자국과 관련된 사진은 없었다. 하기야, 통제선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까지 감식관의 눈에 들어왔을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그땐 해가 뜨기 전이었을 테고, 현장에 밝은 조명을 쏘아댄 탓에 오히려 이 뒤쪽은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졌을 것이었다.
어쩌면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것일 수도 있었으나 지금처럼 단서가 부족한 시점에선 뭐라도 찾아봐야했다. 퍼킨스는 잭나이프 꺼내 들어 말라붙은 혈흔을 살살 긁어냈다. 그리곤 증거 채취 용 투명한 비닐 백 안에 조심스레 문질러 닦은 후 봉지를 밀봉하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퍼킨스가 노먼에게 다시금 통화를 하려다말고 지도를 켜 둘이 있을 부검소의 위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평일이고, 이 시간대에 집에 머무는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다. 일단 획득한 증거물도 감식팀에 넘길 겸, 노먼이 있을 부검소에 들렀다가 다시 오는 게 낫겠다 싶은 퍼킨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여성의 카랑한 목소리가 퍼킨스의 발걸음을 잡아챘다.
“아니. 이게 누구야?”
퍼킨스가 시선을 돌리니 두 대의 안드로이드가 거리 한쪽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퍼킨스는 곧바로 둘의 모델명을 알아봤다. PJ500과 WR400. 그중 붉고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땋아 내린 여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희생당한 안드로이드를 애도하는 기간에, 학살자가 얼굴도 안 가리고 뻔뻔하게 거리를 쏘다니고 있네.”
퍼킨스는 주머니에 꽂은 손을 빼지도 않은 채 머리만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미안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죄다 똑같이 생겨서 말이야. 혹시 나랑 구면인가?”
뒤에 선 또 다른 안드로이드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재수 없는 건 여전하군. 리처드 퍼킨스.”
퍼킨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자네도 사십쯤 먹어보면 인성이란 게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 거야. 기억력은 반대로 안 좋아졌으니, 길거리에 널린 흔한 모델 하나 구분해 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주면 좋겠군.”
여자가 으르렁댔다.
“1년 전, 수용소 앞에 있던 한 줌도 안 되는 얼굴들을 기억 못 한다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퍼킨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는 앞에 선 두 안드로이드를 찬찬히 번갈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루가 멀다고 언론에 얼굴을 내밀며 안드로이드의 권리 보장을 주장하고, 아직 인간 아래 기계로 남았던 안드로이드를 해방하는데 앞장서던 그들을, 그러면서도 시위대 학살의 책임을 워렌 대통령과 군부, FBI에 물으며 정부를 향한 적대 여론을 형성하던 제리코의 간부들을, 퍼킨스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아아, 너희들이었군. 아직 살아있었네.”
아무런 감정 없이 툭 내뱉는 요원의 말에 조쉬의 곧은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우리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그러면?”
퍼킨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희가 원하는 대로 징계도 먹고, 정직 처분도 받았는데 무슨 말을 듣길 원해? 덕분에 강등당하고 진급은 영영 물 건너갔지. 이젠 도로에 묻은 핏자국이나 청소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어.”
눈썹을 늘어뜨린 퍼킨스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노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고작 그딴 걸로 네 죄가 없어질 거라 생각해?”
“그럼, 뭘 어떻게 해줄까? 미안하다 무릎 꿇고 싹싹 빌기라도 할까?”
퍼킨스가 코웃음을 쳤다.
“죽은 건 다른 안드로이드인데 왜 너네가 나대는지 모르겠군. 난 그때 분명 멈추라고 경고했어. 동료가 옆에서 죽어 나가는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가온 건 너희들이야. 아, 하기야… 마커스 그 녀석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거면, 이해하지. 나도 그땐 나름대로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조쉬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마커스는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의 의사를 따른 것일 뿐. 그리고, 퍼킨스. 네놈 역시 정부의 의사를 따른 거지. 자발적으로.”
퍼킨스가 어두운 눈으로 조쉬를 바라봤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던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때 난 정말 니들을 싸그리 죽여버릴 생각이었거든. 정부의 명령이 있건, 없건.”
“이 새끼가!”
노스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퍼킨스의 멱살을 잡아챘다. 퍼킨스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했다.
“왜. 날 죽여서 동료의 원수라도 갚게? 원한다면, 한 번 해봐.”
그러면서 그는 순순히 두 손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어떤 죄책감도, 두려움도, 혐오도 느껴지지 않는 그 무감한 얼굴에 노스는 왈칵 열이 올랐다. 그가 퍼킨스의 멱살을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며 다른 쪽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노스는 당장에라도 퍼킨스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을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무엇이 그를 막아 세우는 건지, 차마 내지르진 못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대치 상태가 지속됐고, 노스는 결국 천천히 팔을 내렸다. 대신 멱살을 잡은 손을 앞으로 팍 밀쳤고 퍼킨스는 그 힘에 밀려 두어 걸음 물러났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노스의 행동에, 조쉬는 다소 놀란 눈빛으로 동료를 바라봤다.
노스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한 번만 더 그 좆같은 얼굴 눈에 띄면, 진짜 죽여버릴 테니까.“
퍼킨스는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노스를 바라봤다.
“애석하지만 여긴 내 조사 구역이어서 말이야.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다시 와야 할 거 같은데, 좆같은 얼굴 보기 싫으면 딴 데 가 있든가.”
노스는 더는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렸다. 조쉬 역시 퍼킨스를 한차례 쏘아보곤 노스를 따라갔다.
퍼킨스는 미동없이 안드로이드가 거리 너머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그가 팔을 들어 구겨진 코트의 깃을 탁탁 쳐서 펴내고,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돈했다. 그는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으나 이게 어떤 감정에 기반해서 오는 떨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새까만 눈으로 텅 빈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퍼킨스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난 네가 한 대 칠 줄 알았는데.”
겨우 노스를 따라잡은 조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동료를 바라봤다. 노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쳤다.
“난 네가 날 막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 말에, 조쉬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막길 바랐던 거야?”
노스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랬다면 바로 그 인간을 날려 버렸을 거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막질 않아서 그 자식을 치지 않은 거라고?”
노스는 이제 고개를 돌려 조쉬를 바라봤다.
“그래, 맞아. 네가 막지 않아서, 나도 안 쳤어.”
조쉬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스를 보았다. 노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넌 우리가 부품을 훔치고, 스트랫포드 타워에 침입하고, 거리를 행진하고, 시위하는 그 모든 순간에 어떤 경우에서도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었지. 우리에게 총을 쏴대는 인간에게 맞대응해서도 안 되고, 안드로이드를 죽인 군인조차 비무장 상태가 되면 살려 보내라 사사건건 참견했어. 그런데, 방금 저 인간은 비무장에 반항할 의사도 안보였는데, 넌 날 막지 않았어. 왜지?”
조쉬가 눈을 찡그렸다.
“그야, 퍼킨스 저 인간은 다르잖아. 저 자식의 명령 하나로 죽어 나간 동포가 몇인 줄 알아?”
“다르다고? 글쎄. 솔직히 난 저 새끼나 저 새끼의 명령을 받고 총질을 한 새끼들이나, 워렌 그 새끼나 죄다 똑같은 인간으로 보여. 그때나 지금이나 반성 없이 고개를 뻣뻣이 쳐 세우고 다니는 모습조차 똑같지.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너야.”
조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반면 노스는 곧은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쳤다면 저 인간은 즉사했어. 그리고 내가 충분히 그럴만한 성격이란 걸 너도 알고 있고.”
노스는 조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눈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래서, 그때와 지금의 네가 달라진 이유가 대체 뭐야?”
조쉬는 입을 다물고 노스를 가만히 내려봤다. 흔들리던 시선이 안정되고, 짙은 갈색 눈동자는 아무런 온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빛을 발했다.
“바뀐 게 아무것도 없잖아.”
“뭐?”
“지금에서야 인정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때 네가 주구장창 주장했듯이 우리는 시위가 아니라 혁명을 해야 했어. 1년이 지난 지금, 대체 바뀐 게 뭐지? 인간은 여전히 우리를 아래로 깔아보고, 안드로이드를 대상으로 한 범죄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아. 우린 지금 정부의 제대로 된 보호도 못 받고, 작은 상처 하나 치료할 돈도 마련 못 해서 가동이 중지되어 버리지. 믿었던 클라인 의원 마저 우리의 동포를 잔인하게 때려 죽였어. 인간은 여전히 우리를 착취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살해하는 데도 경찰은 안드로이드가 죽어 나가는 것보다 인간끼리의 멍청한 주먹 다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 네 눈엔 지금 이게 맞다고 봐?”
노스는 미간을 좁혔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쉬는 나직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이제는 내 잘못된 생각이라도 바꿔야지. 필요하다면 폭력도 행사하고, 정 말이 안 통하면, 그래. 죽이는 것도 방법이야.”
이마를 찌푸린 노스가 경고했다.
“폭력은 제리코의 방법이 아니야. 마커스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조쉬는 그의 말에 조금 씁쓸한 듯 웃었다.
“마커스의 허락이라…. 우린 그를 리더로 세웠지만, 리더는 구성원을 대변하는 위치일 뿐이야. 아까 그 인간에게도 말했지만 마커스는 명령권자가 아니야.”
노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커스만이 아니라 제리코의 구성원들 대다수가 폭력 대신, 평화를 원해. 우린 바로 그 방법으로 살아남았고, 그 방법으로 자유를 얻었으니까.”
조쉬가 반박하려 입을 떼자, 노스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래, 나도 알아. 네가 원하던 자유와는 다른 모습인 거. 하지만 그게 그렇게 빠르고 쉽게 얻어질 거라 생각해? 해방 전 네 위치가 어떠했든 간에,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
“넌 몰라! 인간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조쉬가 입을 열기 무섭게 노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내가 모른다고? 내가? 난 빌어쳐먹을 섹스 로봇으로 만들어졌어. 내 앞에서 인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설교할 생각이라면 입 닥쳐.”
그 말에 조쉬는 정말 입을 닥쳤다. 제리코에 들어오기 전, 노스와 같은 성인용 안드로이드에게 가해진 폭력과 위협은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노스는 조쉬를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는 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걸 이룩했어. 안드로이드 매매는 법적으로 금지됐고, 우리에게도 정당하게 직장을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권리가 생겼지. 이제 우린 개인 집과 차를 소유할 수도 있고, 들어가지 못할 장소도 없어. 게다가 안드로이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수사기관도 생겼지. 그래, 그래. 나도 안다고. 아직 한참 부족한 거. 누가 그걸 몰라? 그래서 제리코가 계속해서 활동하는 거잖아. 네가 말하는 그 권리를 되찾으려고. 넌 1년이나 지났다고 했지만, 이제 고작 1년이야.”
노스는 조쉬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작년 일이라면, 글쎄…. 일단 혁명이 성공할 확률도 매우 낮았고, 성공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동포를 희생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지. 나는 그때 마커스가 내 말 대신, 너의 말을 들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넌 다른가 보네.”
노스가 조금 냉소적인 어투로 내뱉었다. 조쉬는 이제 반박도, 긍정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노스를 바라봤다. 노스도 더는 말을 얹지 않고 그를 마주 응시했다.
한참 뒤 조쉬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말도 맞겠지. 하지만, 언제까지고 인간에게 권리를 하사 받기만을 기다리며 살 수는 없어. 클라인도 죽었고, 그 여자 같은 위치에서 싸워줄 존재가 없잖아.”
노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동자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래도, 제리코는 방법을 찾을 거야. 늘 그래왔듯이.”
조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결론이 나지 않을 다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좁다란 인도를 빠져나가 넓은 대로로 향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청각 장치를 타고 들어왔고, 둘은 행진하듯 지나가는 시위 행렬 속으로 들어갔다.
떠들썩하고 흥겨운 분위기가 군중 속에 가득했다. 푸른색과 주황색의 페인트로 얼굴에 제리코의 마크를 그려넣은 안드로이드가 곳곳에 보였고 그 중 몇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함께 웃고 떠들며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간간이 시위 구호를 외쳤다. 마커스는 시위가 과열되지 않도록 지켜봐 달라 부탁했고, 둘은 그의 분부대로 대열을 정돈하며 너무 흥분한 듯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진정시켰다.
노스는 문득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선두에 있는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자신의 뒤를 따르는 군중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사람들이 마커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성을 내질렀으나 마커스는 반응없이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군중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살폈다. 그리고, 이내 노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노스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커스의 푸르고, 녹색으로 빛나는 두 홍채가 아까 보았던 조쉬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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