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날

폭주족 대장 신이랑 전설의 검도부 겨미

이순신 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모르면 간첩. 그런 류의 농담이 쉽게 입에 오르내리는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의 명성은 지역을 넘어서 전국구로 퍼져있었다. 흰 특공복을 입고 죽도 한 자루를 등에 멘 채 불을 뿜는 바이크를 타고 다니기로 유명한 그는 소문과는 달리 상당히 히키코모리적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도전하러 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직접 관할 지역으로 방문했고, 그때마다 무참하게 박살난 바이크의 사이드미러가 공터 구석에 쌓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박살난 사이드미러를 구석에 밀어 치우는 순신을 보고 누가 가볍게 질문했다.

“왜 하필 사이드미러입니까? 본체를 박살내 버리는게 더 가오살고 좋은데.”

순신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지.”

나한테 닿으려면 말이야. 아주 오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순신을 오만하다고 평가하지 않았다. 흰 특공복 사이로 묶인 붕대가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색이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에서 흘러넘치는 자신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그가 응당하게 가져야할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그 이름 세 글자에 실려있는 무게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고 그것은 누구보다 순신의 곁에 있는 이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이름의 무게는 한낱 고등학생이 지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순신의 뒤를 노리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순신에 관한 모든 것들은 지나치게 부풀려져 사실과 거짓을 혼동하기 쉬웠고 그것은 오히려 순신의 주변을 보호하는 방벽이 되곤 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알려진 사실은 갓 중학생이 된 남동생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남동생, 준신은 이순신을 도발하기 위한 각종 사건에 휘말리곤 했다.

준신의 학교를 멀리 해도 소용없었다. 흔적을 지우고 친척의 집에 맡겨도 어떻게든 그를 찾아냈다. 아직 어린 동생이 제 행동의 결과에 뒤흔들리는 것은 순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순신이 택한 마지막 선택지는 바로 검도 도장이었다. 지역에서 꽤 큰 규모에 역사도 오래 된 도장을 매일같이 다니며 도장의 사범과 다른 연습생들 사이에 섞여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도장의 관장 또한 상당한 실력자에 심신이 바른 어른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 다만 관장이 몹시도 깐깐하고 바른 사람인 터라 순신을 향한 호감도가 0에 가까웠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랄까. 덕분에 한동안은 동생을 노리는 사건이 적었다.

그러나 순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가까워지자 슬금슬금 다시 움직이는 세력들이 있었다. 이순신이라는 명성을 노리고 접근하거나, 혹은 이순신을 따르는 전국구의 양아치들을 모으려는 목적이 대부분이었다.

“끝이 없군…….”

이순신은 해진 목검의 손잡이를 다시 쥐며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는 날붙이들을, 그리고 그 뒤로는 총기를 소지한 이들도 언뜻 보이는 놈들이 총 서른 명 가까이.

“무의미한 저항은 관두는게 어때? 교섭을 하는게 이순신, 너한테도 좋을텐데 말이야.”

“교섭을 하러 온 사람의 자세가 글러먹었는데 고이 들어줄 순 없지.”

씩 웃는 이순신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미 꽤 많은 아군들이 상처입었고 이대로는 승산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심지어 아까부터 드는 묘한 불안감이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한 것들을 준비해 왔을 거라는 어떤 느낌. 이순신의 감은 꽤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폰을 만지작거리던 상대 진영의 한 녀석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슬슬 죽도 내려 놓지 않으면 곤란할걸~? 그런 무시무시한 걸로 위협받으면 깜짝 놀란 나머지 방아쇠를 당겨버릴 수도 있잖아.”

“쏘려면 진작에 쐈겠지.”

이순신은 희게 웃었다. 징글징글한 놈이군. 탄성과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가 상대진영에서 흘러나왔다. 이순신은 피와 땀에 얼룩진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공갈과 협박이 없으면 정정당당하게 싸우지도 못하는 놈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내가 죽도를 내려놓는 날은 오지 않을 거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내가 완전히 이 자리를 벗어나는 날이 되겠지.”

무거운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하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었다. 피끓는 소리를 하며 충족되는 자아와 자존감이 여리고 말랑한 상태라는 것이다. 아마 그대로 그들과 맞서 싸운다면 이순신은 큰 상처를 입고 완전히 망가졌을 테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그저 그런 말로 쓰고 버릴 생각은 아니었는 듯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를 상대로 꼴사납게 뭐하는 짓이야? 너네는 쪽도 없냐?”

상대 진영의 뒤에서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른 남짓 되는 건달 무리들의 뒤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타난 남자는 가벼운 손짓으로 장정 하나를 끌어당겼다. 끌어당겨진 건달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총 네 명. 남자의 등장과 함께 쓰러진 건달들의 숫자였다.

“뭐, 뭐하는 새끼야!?”

남자는 쓰러진 네 명에게서 빼앗은 듯한 총기들을 한쪽 손가락에 꿰고 아무렇게나 흔들어보였다. 순신은 남자의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번득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저건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미친듯이 경고하는 육감에 휩싸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숨이 막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신은 호흡조차 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순신과 그 패거리들을 흘낏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들이야 뭘 모르니 그렇다 쳐도. 너네는 한 두어달 병원 신세진다 생각해라.”

남자는 허리에 매달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그 안에 보관되어있던 목검을 꺼내들었다. 짙은 고동색의, 아주 반질반질한 목검. 목검의 날에는 검은 먹으로 새겨진 이름 세 글자가 보였다.

척준경.

남자가 한 손에 목검을 쥐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검끝의 움직임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검끝은 부드럽게 호를 그리기도 하다 날카롭게 공기를 가로베는 등 변화무쌍하게 움직였다. 한 치의 용납도 없는 무자비한 검술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단아하고 명료했다. 뿌옇게 끼었던 마음 속 해무가 목검 한자루에 가차없이 갈라졌다. 오랫동안 꾸던 꿈에서 드디어 벗어난 듯한 느낌. 이순신은 죽도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내가 검을 놓고자 하는 날이 온다면…….’

피에 젖은 손잡이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죽도가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탕, 타앙. 죽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심장도 바닥으로 떨어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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