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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마탑주였다 / 안단테
1
결혼을 한 후에도 단테의 일은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에이는 마법사가 아니었으므로 단테가 읽는 책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에이는 밤마다 종종 등불 아래에서 남편이 낱장 위에 글씨를 끼적이는 모습을 보았다.
단테. 누워서 이름을 부르면 남자는 불리길 기다린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냥 불러봤다고 말하면 눈을 깜박이다가 웃으며 다가왔다. 에이, 마주하듯 불러오는 이름이 있었다. 곧 커다랗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이 덧그리다가 뺨을 덮고, 아래까지 흘렀다가.
눈을 감았었지.
별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전날에도 단테는 책을 읽었다. 정체를 숨긴 마탑의 주인은 아내에게 달라붙지 못해 안달난 상태였지만, 어쨌든 직업이 직업인 이상 별수 없이 일을 해야 할 때는 있었고, 보통 책 안에 메모를 적듯 짧게 서식을 써갈기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러지 못하면 집 안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단테는 어떻게든 가볍고 빠르게 일들을 해치우고자 했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두고 머나먼 마탑까지 다녀와야 한다니 그건 너무 귀찮고 비효율적이며 쓸모도 없는 짓 아닌가? 아무튼 그에게는 에이 없는 일 분 일 초가 모조리 쓸데없는 시간이었다.
하여 의도치 않게 일이 막히면 그는 조금 짜증이라도 난 것처럼 글씨를 꾹꾹 눌러적었다. 단테가 얼굴을 구기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기도 했다. 에이는 언젠가 마샤에게 선물 받았던 찻잎을 우려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대뜸 다가와 남편의 이마를 꾹 누르기도 했다. 미간을 좁히고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단테는 퍼뜩 놀랐다가, 다정하지만 엄한 눈을 마주하고 눈가를 접어 웃었다. 미인계 쓰지 말라고 말하면서 에이가 차를 넘기면 단테는 그 웃음이 의식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금방 끝내겠다고 고맙다고 중얼거리곤 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을 지키듯 차를 비운 채 이제 됐다고 에이에게 안기면, 에이는 꼭 익숙한 사람처럼 팔을 뻗어 남편을 안고 토닥이곤 했다. 하여튼 간에 나쁘지 않았다.
2
만약 에이가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썼는지 물었다면 단테는 그야 비밀이고 뭐고 에이에게 위험하지 않을 수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을 테지만, 에이는 그가 무엇을 적었는지 알아볼 마음이 없었다. 읽어봤자 이해도 못 할 텐데 뭘 굳이. 그토록 심드렁했으니,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책 사이에서 팔랑팔랑 빠져나온 종이를 본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햇살이 아름다운 오후. 급한 일로 불려 나간 단테가 깜빡 잊었는지 책을 탁자 위에 올려 둔 채 사라졌고, 거실로 들어서던 에이가 책을 발견해 무심코 집어 든 순간 그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집어 든 종이는 책의 낱장이라기에는 작았다. 단순한 이면지 같았는데 책갈피라기에는 너무 투박한 색지였다. 밀빛 같기도 했고 옅은 갈색 같기도 한 색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색이기도 하고, 에이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종이를 뒤집었다. 몇 페이지에 끼워져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책이랑 같이 올려두면 되나, 무의식적인 생각은 적힌 글자를 보자마자 사라졌다.
“아.”
나지막한 탄성.
창가 새로 햇살이 들어와 글자를 비춘다. 낯익다면 낯익은 글자였다. 이백 년이 넘도록 홀로 살아온 긴 세월은 별로…… 의식하지 않았지만.
눈을 깜박이던 에이는 주섬주섬 종이를 다시 뒤집어 보았다가, 잠깐 실소했다가, 종이를 붙이듯이 책 표지 위에 두었다가 다시 또 웃었다. 바닥에 고이듯 꿀처럼 흘러내린 햇살 위로 잠깐 희미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A
의미도 없는 단 한 글자 알파벳.
그 옆에 소심하게 D로 시작되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법 수식이나 연구만 적어둔 건 아닌 모양이다. 괜히 귀엽게. 에이는 책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식사 준비나 할까.
햇살이 좋아서인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3
단테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말을 왜 적냐고 하면, 당연히, 단테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희대의 천재이니 불세출의 마법사이니 마탑주니 별 소리를 듣는다 해도 그 또한 사람이고,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근 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마탑에서 연구만 한 세월이 대단히 길었고 그동안 집중력이 흔들렸던 적은 없지만, 아무튼 요즈음은 뭘 굳이 이런 것까지 그가 도맡아 해야 하나 싶었다. 당장 등 뒤에서 에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비스듬히 누워 낮잠을 자거나 차를 끓이거나 요즈음 들어 자꾸만 찾아오는 마샤와 잠시 외출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에이가 그의 옆에 있지 않은가.
집중력은 모조리 에이의 존재로 귀결됐다. 단테는 문장을 적다가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흔하고 억울한, 그러나 사랑스러운 답답함이었다.
결국 펜촉이 뭉그러진다. 빼곡하게 적힌 서적 안의 글씨를 쳐다보던 단테는 신경질적으로 턱을 괴었다가, 문득 펜을 움직였다. 무의식적인 휘갈김이 이어졌다.
어떤 알파벳.
누군가의 이름.
에이.
그 얼마 되지 않은 획순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기이했다. 익숙해지다가도 낯선 기분이었다. 펜촉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색지를 조금 물들였다. 단테는 급히 펜을 들었다. 거실에서 차를 끓이는 듯 에이가 조금씩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로 문득 빛이 새어 들어서 책상 위를 덮었다.
짜증나고 답답하고 억울한데도 이상하지.
나쁘지 않은 건 결국 그 이름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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