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가 피어나는 여름
백천이현
“사숙, 무슨 일 있는 걸까요?”
당소소가 그렇게 운을 뗀 건 이미 하루 종일 백천의 기행을 모르는 제자가 없어졌을 때였다. 아니, 어쩌면 망둥이 같은 한 놈은 아직도 모를지도 모르지만, 사실 청명이 그걸 알았다면 백천은 이미 대가리가 여섯 번쯤 깨지고도 남았을 테니 다행인 일이었다. ‘어디서 사형이 되어 가지고 그런 표정으로 화산을 돌아다녀!’ 나 때는 안 그랬다는 말도 함께 붙어 있을 것이다.
“표정이 안 좋아.”
영 남에게 관심이 없던 유이설도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유이설이 말하자 당소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기분 안 좋아.”
“좋은 날일 텐데, 축하를 받으면 그때는 기뻐하시는 것 같지만…….”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당소소가 건너편을 돌아보았다.
“사고가 없어서일까요?”
당소소에게 ‘사고’는 여럿이지만, 백천과 함께 언급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유이설은 마침 청자 배 제자들에게 선물을 받는 백천을 창문 밖으로 건너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웃음을 짓고 기쁨을 참는 기색으로 뭘 이런 걸 준비했냐고 말하나 싶더니 마음을 들킨 것인지 얼굴이 달아올라서 곧 소리를 지른다. 청자 배들이 도망치고 나서는 한숨을 쉬더니 선물을 주섬주섬 정리하는 모양새였다. 찰나 기뻐 보이던 얼굴은 분명 진심이었으나, 금세 안색이 다시 조금 어두워진다. 본인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화산의 모두가 그 표정을 알았다.
“기다려.”
망설이며 밖을 힐금거리는 당소소에게, 유이설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매는 곧 돌아올 거니까.”
*
그래서 본인은 아무도 모르는 짝사랑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짝사랑하는 상대만 모르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백자 배의 헌앙한 대사형 백천이 해가 지도록 언덕에 앉아 이렇게 슬퍼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백자 배의 막내 소이현 때문이었다.
‘속가에 의술을요?’
‘그래. 소소도 함께 가면 좋겠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보내면 속가에서 부담을 느낄 것 같아서 말이다. 우선은 이현이 네가 먼저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돌아오는 건…….’
‘아마 여름 끝물쯤 될 테지. 왜? 문제가 있느냐? 그러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뇨. 다녀오겠습니다!’
하필 속가에 잠시 들러 의술 수준을 살펴보고 간단히 전할 수 있는 건 전하라는 명령이 이현에게 떨어질 게 뭐란 말인가. 하필 왜 이때가 백천이 태어난 날 무렵이었으며, 그래서 여름의 더위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이 날에 왜 그는 짝사랑하는 이에게 의례적인 인사 한 번 못 받고 서러워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다른 이들의 축하는 고마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도 가기 전까지 열심히 준비했어요.’ ‘이현이도 사형을 정말 축하하고 싶었을 텐데.’ 같은 소리를 듣다 보면 조금 슬퍼지는 건 별수 없었다. 장문인이 고작 축하 받지 않게 하려고 이현을 보내버린 건 아닐 텐데 그냥 그랬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회의감을 느끼며 백천은 몸을 일으켰다. 고작해야 일방향인 마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경 쓰면서 이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사실 이현이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텐데도 그랬다.
그는 결국 그만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바쁜 와중이니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직 끝물이라기에는 조금 이르고,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을 테니. 단지 다른 제자들이 이현이도 축하했을 거라고 말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돌아서던 백천이 문득 멈춰 섰다.
이상한 걸 알지만, 어디선가 꼭 환청처럼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서.
“……형.”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지금은 다급한 어떤.
“사형!”
어떤 목소리가.
다급히 몸을 돌리자마자 그는 익숙한, 다정한, 그리하여 늘 그를 좇게 만들었던 어떤 눈과 마주쳤다.
기다림의 끝물처럼.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형. 아직 안 주무셨네요.”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지도록 달려온 소이현이 가까이 다가와 숨을 몰아쉬었다. 백천은 눈을 의심하면서도 급하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가, 불에 덴 듯 손을 떼어냈다. 스스로 건드려 놓고 떼는 폼이 멋쩍었으나 소이현은 다행히 눈치 채지 못했다.
“이현…… 이현아. 어떻게…… 온 거냐?”
“달려왔죠.”
화산의 제자이자 청명에게 무자비하게 굴려진 피해자 중 하나로서 체력이 모자랄 일은 없을 텐데 숨을 몰아쉬는 것만 보아도 그런 것 같긴 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백천은 그러냐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아직 해시 무렵이죠?”
무언가 묻기도 전에 소이현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백천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소이현의 낯이 환히 펴졌다. 꽃 피어나듯 향긋한 향이 날 것만 같아서 백천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다. 못 맞출까 봐 걱정했어요.”
“혹 무슨 일이라도…….”
“사형.”
소이현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어떤 마음을 뭉치고 구겨 혀 안에 올려놓은 듯한 발음으로, 해가 지고 어둠이 슬며시 내려앉았음에도 밝게 빛나는 얼굴로.
“생일 축하드려요.”
“…….”
“혹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급히 달려와서……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지만, 내일 중으로 꼭 전달 드릴게요.”
다정하기 짝이 없어 언제고 백천을 끌어당기는 목소리로.
바람이 불어 매화 사이로 갈색 머리칼이 고요히 흔들렸다. 백천은 입을 다물었다가, 시선을 깔았다가, 자신보다 약간 아래에 있는, 달려온 탓인지 열이 조금 오른 듯도 하고 웃음기가 어려 있기도 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끝내 자신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숨을 희미하게 뱉고 말았다.
정말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맙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단번에 행복하고 다정한 기분이 될 수 있는지.
“정말 고맙다, 이현아.”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태어난 날을 기리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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