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자하설영]잊힌 이들의 겨울上

잊힌 감정을 그는 기어이 겨울의 눈 속에서 찾아내었다

보존도서관 by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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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기가 완결나기 전에 쓰던 글입니다. 양해하고 읽어주세요.


정말이지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기에는 딱 좋은 날이었다.

눈 한 송이 내리지 않고 메마른 겨울, 추위로 살아있는 것들이 숨을 죽인 어느 겨울밤. 새하얀 달이 가만히 비천택을 비추다가 꾸물거리며 몰려오는 어둠에 자취를 감추었다.

 

온갖 번뇌와 고독, 고민이 가득한 밤이 슬그머니 비천택을 기어간다.

 

 

**

 

 

자하는 묘시卯時 즈음에 금빛 눈을 깜빡거리며 일어났다. 머리가 평소보다 맑고, 더욱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겨울이라 날이 짧아, 햇빛이 이제야 살짝 땅을 비추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던 참이라, 자하는 작금의 상황이 꽤나 기이하다고 내심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몸도 개운하고, 확실히 기분이 좋았다. 잠을 푹 자서 그런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밤이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대재앙신을 물리치고 처음으로 맞는 새해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 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일었다. 대재앙신과 동귀어진 하며 얻게 된 마기는 아직 잔존하여 있으나, 이러다가 정말 깨달음을 얻어서 신선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벽에 여느 때처럼 얌전하게 걸려있는 적멸을 허리에 매며 정원으로 나섰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청정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적멸이 약간 진동하자, 자하는 적멸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적멸이 진동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자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 밑으로 드러나는 금빛 눈에 햇빛이 스치며 반짝 빛났다. 얼마나 그랬을까? 적멸이 더 이상 진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별 일이 아니었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흐르는 것이 절경이었다.

 

오늘은 정말 날이 좋네.

번뇌를 잊은 발걸음이 경쾌했다.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하루는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굉장히 좋은 하루였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고, 수련할 때의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으며, 식사도 괜찮았다. 월성에서는 아무런 변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좋은 날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고 이견 없는 날.

 

그리고 그는 오후에 그 생각을 수정했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은 아니라고.

 

“백언랑. 내가 모르는 새에 화랑을 한 명 더 들인 거야?

“예?”

 

그렇게 그의 좋은 하루에 아주 약간의 금이 간 것은, 새해를 맞아 비천택을 찾아온 낯선 인물이 눈에 걸려온 탓이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의 옷을 입은 화랑. 유달리 자신의 눈을 마주하질 않아 도리어 더 시선이 갔다. 자하는 갑자기 적멸이 진동하고, 자신의 심장 부근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검령이 정말, 정말 이상한 것 같다.

 

그러니까, 백호영도?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보던 그는 결론을 내렸다.

완전히 처음 보는 이였다. 아무리 내가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새로운 화랑을 들였으면서 내게 소개 해주지도 않다니?

 

“백언랑. 막내를 들였으면 내게도 소개해주지 그랬어. 내가 지금은 아무리 국선이 아니라지만 말이야. 우리가 선문에서 동고동락한 세월이 하루 이틀이었나? 이건 좀 서운한걸?”

“……예?”

 

또 장난을 치시나? 오대선문의 화랑들은 자하의 말에 그런 의문을 지녔다가, 그의 얼굴이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자 의아스러운 낯을 하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백언을 향하자, 백언은 드물게도 당황하고야 만다. 새로운 화랑이라니, 막내라니!

백호영도에는 설영을 마지막으로 딱히 다른 화랑이 들어오지 않았다. 낭도는 몇 들어왔지만, 이 자리에는 없었고.

 

백언은 불가피하게도 설영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그건 정말로 불가피한 일이었고, 이윽고 백언은 깨달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하얀 설영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있다는 것을.

그리고 백언이 깨달은 것보다 약간 뒤늦게, 화랑들도 깨달았을 것이다. 설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이함을 말이다.

 

“그래, 저 화랑은 이름이 뭐야? 왜 내게 소개도 해주지 않은 거지? 언제 들였어, 백언랑?”

 

자하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생경한 얼굴을 보듯 설영을 보고 있었다.

백언에게 가지는 서운함은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기도 해서, 자하의 말이 장난이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백언은 자하를 한 번, 설영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건 또 난데없는 조화란 말인지.

 

“저, 상선. ……혹시 설영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름이 설영이야? 흔한 이름이 아닌데, 이름이 그래서 저렇게 쌀쌀맞은 표정을 하고 있나? 이름처럼 냉혹한 성격인가 보네!”

 

자하가 우스갯소리를 하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듣기 좋은 미성, 낭랑한 웃음이 비천택을 울리는데 자하를 제외한 아무도 저 말에 웃지 못했다. 저 말에 얽힌 진심을 읽지 못한다면 선문의 화랑 자격이 없을 터이므로.

자하는 지금 진심으로 설영을 기억하지 못하여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재앙신, 뇌질미타를 진혼하는 것에 성공하고 처음으로 맞은 새해이다.

그리고 설영은 자하와 함께 온갖 괴이한 일들을 조사해가며 대재앙신에 대한 실마리를 모으고 기어이 진혼에 성공한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설영의 공에 흠집을 내진 못할 터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자하, 그가 설영을 잊어버리다니?

 

유달리 맑은 길일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당사자 한 명을 제외하고서는.

 

“그런데 분위기가 다들 왜 이러지?”

 

자하는 겨울 햇살 아래에 어렴풋하게 서있는 화랑을 본다. 저 화랑은 온통 새하얘서 금방이라도 겨울 햇살에 부스러질 것만 같다. 그 모습에 어쩐지 시선이 머물렀다. 역시 기이하단 말이지. 보아하니 지닌바 일신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론 자신에게 미칠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느라 말을 않던 그는, 시선이 이리저리 분산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설영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분주하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류.

적멸이 그 기묘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다시금 검명을 토하며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내가 무슨 못할 말이라도 했나?”

“상선, 그것이…….”

“상선, 설영랑은 상선과 함께 대재앙신을 진혼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화랑입니다!”

“뭐?”

 

웅성거리는 소란이 이는 가운데, 참지 못한 송옥이 한 발짝 나서서 외쳤다. 그것은 자하가 상상치도 못했던 말임이 분명하다. 이미 확실했지만 자하의 태도는 확신에 한 번 더 못을 박은 것과 같았기 떄문에, 그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바라보던 화랑들이 슬금슬금 설영의 옆에서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그 귀마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들이 넘친다지만 고소해하며 비웃기에는 너무 큰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설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보더라도 백송월 같이 설영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이렇듯 창백하게 질려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내가 설영랑과 아는 사이였나 보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자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몇 가지의 단서만으로도 진실에 근접한 추론을 끌어내는 것은 그의 장기였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화랑을 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절로 술렁거리는 것이 그 추론에 확신을 더해주기도 했다.

 

“그것도 꽤나 친밀한?”

 

설영의 표정을 살핀 자하는 팔짱을 낀 채로 생각을 정리해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스쳤다. 그의 기억에는 전혀 공백이 없었다. 대재앙신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여정들은 다 자신의 것이었는데, 사실 그 사이에 한 명이 더 끼어있었다는 건가?

 

“…상선, 그럼…….”

“아무래도 오늘 월성에 기이하리만치 일이 없고 평온하다 했는데, 내가 휘말린 모양인걸.”

 

자하는 꽤 유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작 괴변 따위에 휘말려서 자신이 이런 꼴이 되다니? 화랑들의 시선을 전부 느끼면서도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완벽하기 짝이 없는 기억의 허점을 찾기 위해서 그 기억들을 반추할 뿐이었다.

 

“이거 면목이 없네.”

“아닙니다, 상선!”

“금방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적멸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던 자하는 한숨을 쉬며 적멸을 툭 건드렸다. 이런 종류면 말을 해줬어야지! 적멸이 알아듣는다면 정말로 억울한 일이었다. 메마른 공기를 들이키며 자하는 잠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보다가, 설영을 바라보며 고갯짓 했다.

 

“그럼 일단은 이 일을 해결할 열쇠부터 찾아볼까.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는데 미안하게 됐어. 다들 새해 복 많이 받고.”

“예, 상선…….”

“그리고 설영랑은 좀 남아. 내 기억을 점검해봐야 할 것 같네.”

“……예.”

 

떨떠름함인가? 몸을 돌려 실내로 들어가려던 자하가 고개를 돌렸다.

정말 겨울 햇살에도 부스러질 것 같네. 설영은 고개를 돌려 백언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입을 열 때마다 숨의 궤적을 따라 부스러지는 새하얀 입김을 보자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하자, 반사적으로 제 뺨을 가볍게 쳐서 정신을 차렸다.

 

…사실 쟤가 날 홀린 주범인 거 아니야? 자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떨떠름하게 다시 몸을 돌렸다. 이 상황도 내가 속고 있는 거라던가. 그러니까, 날 속인 김에 화랑들도 같이 속인 거지. 빈틈없는 백언을 속이고 저렇게까지 친해지다니 제법 대단한 귀신인걸?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사실 설영랑이 나와 선문의 화랑들을 홀려서……, ……언제 왔어?”

“…….”

 

설영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스쳐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자하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올렸다. 굉장한 잘못을 한 것 같아서,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정말 이름처럼 북풍한설이 따로 없네. 봐, 이상하다니까! 아무리 친하대도 내가 처음으로 동귀어진을 시도했을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법한 어린 화랑이 상선인 나를 이리 막 대하고 있잖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제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그래, 그랬지. 잠깐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런데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한 거야? 설영랑은 아무래도 기다림의 미덕이라는 걸 알 필요가 있겠어.”

 

그래, 그리고 나도 이상하긴 하네. 답지 않게 이상한 생각을 다 하고 있어. 자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느릿느릿 걸어와 걸터앉았다. 탁상에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고 있자니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소매를 걷고 먹을 갈며 묵묵히 먹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굳이 보고 있어봤자 자꾸 허튼 생각만 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설영랑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게 맞지?”

“……예.”

 

설영은 자하의 질문에 답하며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내리뜬 채로 아래에 시선을 고정한 금빛 눈은 일말의 온정조차 없이 차디찼다. 설영은 새해 선물 한 번 거창하다고 생각하고, 속에서부터 밀려 나오는 쓰디쓴 한숨을 간신히 삼켜 뱃속까지 밀어 넣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설영은 지난 밤의 일을 떠올렸다. 달빛이 비치고 있었으나, 결국에는 밤 중이라 얼굴에 드리운 음영을. 그럼에도 뚜렷하게 보이던 얼굴과, 자신을 빤히 직시하던 금빛 눈. 그리고 그는 그 가운데에서 경황없이 내뱉었던 정제 없는 고백을 떠올렸다. 떨림에 크게 들이쉬었던 숨에 섞여 들어온 겨울의 냉기. 주체할 수 없이 선명한 상대를 향한 자신의 애정. 그리고 꾹꾹 눌러 담아 그 원형을 알 수 없던 거절까지. 하나 남기지 않고 생생했다.

 

‘설영랑.’

‘나는 설영랑을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아. 굳이 힘을 주어 마지막 말을 발음했을 때. 설영은 그 선명하고 생생한 과거의 편린 가운데에서 오로지 그 얼굴만을 기억하지 못했다.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알려준 온갖 것들을 알고 있는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애정이라는 것에선 한없이 미숙한 자신을 알아서, 설영은 자하의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그런 밤이었다.

 

“왜인지 짐작 가는 이유가 있어?”

“……글쎄요. 대재앙신을 같이 물리쳤다는 것 말고, 특별한 일 같은 건 없었습니다.”

 

나른하게 내리뜬 노을빛 눈에 일렁이는 의심을 설영은 읽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여기서 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제가 당신을 짝사랑했습니다? 설영은 그런 꼴사나운 짓을 제 입으로 폭로하느니 단검 같은 것으로 제 배를 쑤셔버리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애정은 어찌할 수 없어도 자존심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 그럼 왜 하필 나는 설영랑, 너만 잊은 걸까?”

“……솔직히 저도 지금 상황이 달갑지는 않은데요. 혹시 무슨 일이 있진 않았습니까?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거나.”

 

설영은 그렇게 말하고 가만히 혀를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봤자 당연히 자신이 고백한 일이겠지. 그 외에 수상한 일이 있었다면 자하는 망설이지도 않고 적멸로 그 원흉을 꿰뚫어버렸을 것이다. 대재앙신쯤 되는 악귀도 아닌 존재한테 당하는 자하라니, 그건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그는 자하가 먹을 갈고 무어라 써내려가는 것을 입을 다문 채로 지켜보았다. 대충 자신이 겪은 일들을 정리해보는 것 같았다.

 

“이때 무덤에서 부장품을 꺼내어 준 것이 저입니다.”

“……부장품을 함부로 꺼내서 쓴다고?”

“귀신들은 저한테 상당히 관대하거든요. 그리고 선도를 수련하는 이들에게 금기인 행동을 상선이 하신 것보단 제가 한 게 더 자연스럽잖습니까.”

“알고 보니 대단한 망나니였네, 설영랑.”

 

설영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들을 하나둘 짚어냈다. 자하의 기억은 설영이라는 존재가 빠져 있는 기억들을 꽤 자연스럽게 이음새로 이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니 이상함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설영은 제멋대로 술렁이는 가슴을 꾹 눌렀다. 아니, 됐어. 이 일을 해결하면 기억은 절로 돌아올 테니. 지금 당장 저 사람이 내 추태를 기억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야. 속으로 눌러 담은 감정을 당신은 모를 테니까.

 

 

**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자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기억을 찾겠다고 발로 뛰는 휘하 화랑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설영은 분명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었다. 그것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금만 지켜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니까. 문제는 무엇을 숨겼냐는 것인데…….

자하는 아까부터 비천택 주위를 빙빙 도는 설영을 바라보다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해서 찾을 수 있긴 한 건가?”

“조용히 좀 해보세요.”

“……상선께 너무 불손한 언사인 거 아니야?”

 

자신을 슬쩍 향했다가 돌아오는 시선의 함의를 읽어낸 자하의 표정이 기막힌 자의 그것으로 변했다.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었다.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싶을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악령이 왔다 간 것인지 살펴보는 겁니다. 강한 악령일수록 잡다한 것들은 모습을 감추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악령이 왔다가 가거나, 뿌리를 내린 흔적이 없어요. 설영은 중얼거렸다. 정말 기이한 일을 보고 평하듯이. 자하는 잠시 설영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흔적이 없다고 말할 때 설영의 얼굴을 잠식한 불안을 읽은 탓이다.

저 기이한 불안감이 어디에서 연원하였는지 궁금증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흠, 설영랑.”

 

혹시 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설영이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보자며 말을 꺼내려던 찰나, 자하는 설영의 손목을 낚아채 몸을 돌리게 했다. 그러고 보니 설영은 자신과 눈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이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나 빤히 쳐다볼 뿐. 자하는 설영의 눈을 쳐다보려고 조금 더 고개를 기울인다.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왜,”

 

자하의 입이 다물린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신을 돌아본 설영의 눈을 보니,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설영의 손은 겨울 공기가 맴돌아서 굉장히 차가웠다. 설영은 자하의 손에 붙잡혔던 제 손을 빼내고는 두어 번 만지작거렸다. 아까보다도 더욱 느려진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는 숨을 골랐다.

 

“…없다고,”

 

이윽고 그는,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가 놓았다. 시리도록 하얀 공기를 들이마시고 짓씹듯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형형했다. 이 사람은 왜 기억을 잃어서도 자꾸 사람을 흔들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제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을 텐데요.”

“…….”

 

자하는 할 일이 있다며 자신을 버리고 성큼 앞서가는 설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상선인 자신이 상태를 되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변명인 것을 알긴 했지만, 그는 우두커니 서서 설영이 멀어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아.” 저도 제 잘못을 안다며 애꿎은 적멸을 툭 쳐낸 자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의 그 눈빛은, 그러니까 마치…….

 

아, 이제야 이 불편함을 알았다.

이제 보니 상대에게 잘못을 한 것이 설영랑이 아니라 자신 같지 않은가.

 

 

**

 

달빛 아래에 창백한 낯을 한 사랑스러운 사람이 서 있었다. 올해의 마지막 겨울은 눈 한 송이 없이 삭막한데, 정작 저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슴에는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범람한다.

이렇게 술렁이며 들고 일어나는 감정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까?

 

 

**

 

 

“내가 너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아.”

 

시시때때로 범람하는 감정이 떠올라서, 자하는 문득 지나가듯 그렇게 말했다. 자하와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정리하던 설영의 붓끝이 살짝 흔들렸다. 보기 좋은 필체가 어그러지는 것을 본 자하는 손을 휘저었다. 그냥 대충하라는 뜻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설영랑. 중요한 건 내가 기억의 일부가 떠올랐다는 거겠지.”

“기억이요?”

 

설영은 자하의 말을 무시하고 붓을 놀리던 것을 멈추었다. 자하의 표정은 진지했다. 적어도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분노와 원망 하나 절제하지 못하여 자하를 버리고 간 것이 어제였는데. 설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럴싸한 결론을 내렸다.

 

“귀신들의 가벼운 장난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기억이 조금씩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밤 중에 이 비천택 앞에서 마주한 적이 있을까?”

“……아주 많았죠.”

“아주 많아? 한밤의 밀회라도 가질 정도로 우리가 친밀한 사이였던 거야?”

“그건 재미없고요.”

“또 날 두고 가려고?”

 

자하는 종이를 내려놓고 나가려는 설영을 보고 그리 말하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짙은 먹물냄새. 그리고 그에도 지워지지 않는 범람하던 감정이. 기분이 묘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설영만 기억에서 지워진 것일까.

 

“설영랑. 설영랑이 말하지 않았지만 난 이제 알 것 같거든.”

“……뭘 알게 되셨는데요?”

“내가 보기에 우리는 꽤 친밀한 게 아니야. 정말, 대단히도 친밀한 사이였어.”

“…….”

“우리가 의형제라도 맺었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기억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설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자하는 의형제, 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설영랑처럼 냉혹한 사람과 의형제를 맺었을 리가 없어. 나는 혈육의 정은 없다시피 한데다가, 애초에 상선과 일개 화랑의 관계잖아? 그런데 의형제라니, 이건 선문이 발칵 뒤집힐 일이라고.”

“……하.”

 

“그래서 할 말 끝나셨습니까?” 한숨 같은 웃음 뒤로 이어진 설영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싸늘해진 것을 깨달은 자하가 웃는 낯 그대로 행동을 멈추었다. 원하는 답을 듣기는커녕 원하는 답과 더 멀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대체로 그의 예감은 맞아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입을 놀린 것인지 그 자신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상선의 생각처럼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의형제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요.”

 

입안이 썼다. 자하의 추측대로 친밀하다는 건 맞았다. 다만 자신의 일방적인 애정이었을 뿐. 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리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사소한 원한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도 족하므로.

 

각오한 일인데도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견디기가 버겁다. 잊혀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잊혀지지 않은 채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자하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었겠지. 애정에 허덕이는 사람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버겁게도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혀진 겨울은 지나치게 혹독했다. 설영은 자하를 최대한 돌아보지 않고, 제 할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

 

조각조각 난 기억들을 꿰어맞출수록 자하는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 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정작 그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을 때는 정의하지 못하였던 감정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본 감정은 그렇게 명확해서…….

 

“오늘은 또 무슨 기억을 찾으셨습니까?”

 

자하는 설영을 가만히 내다보다가,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입술 위로 주워섬겼다. 떠오르는 기억들은 단편적이었고, 산발적이었다. 설영의 도움을 받아 그 기억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만 해도 꽤 귀찮은 작업이었다.

 

“설영랑, 정말 안 볼거야?”

“그런다고 기억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냐, 조금 기억이 날 것 같다니까?”

 

정말 헛소리였다. 설영이 그 날 이후로 자신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업보나 다름 없었다. 의형제는 아닐 거라니, 그야 그렇겠지! 처음 기억을 잃은 그 날부터 지금까지 온갖 망발은 다 해댔으니, 정이 떨어져도 그럴 법 하긴 했다.

 

“…….”

 

자하는 뚫어지게 설영을 노려보았다. 그야말로 첫날과는 위치가 바뀐 꼴이었다. 그때는 자하가 제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지금은 설영이 제 일을 하느라 바쁘니까.

 

‘설영랑, 나는…….’

 

가장 처음 떠올랐던, 그 겨울밤 중의 기억은 거기에서 시작해서 제대로 된 끝조차 맺지 못하고 끝이 난다. 설영은 그 기억의 상세한 내용을 듣더니, 자신도 모르겠다며 그 기억을 뒤로 빼두어 버렸다. 자하는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하는 것이라는 걸. 그게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설영이 시간을 배열하는 내내 자하는 옆에서 먹을 갈았다. 설영을 바라보는 것은 잊지도 않았으니, 참 대단한 집념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우린 정말 친밀했어.”

“아니라니까요. 기억도 다 잃으셨으면서 뭘 그렇게 단언하십니까?”

“떠오른 기억에서 읽은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면, 내가 혹시 그런 후에 설영랑에게 뭐 대단히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거야?”

“그럴 리가요. 하늘 같은 상선이신데.”

“지금 비꼰 거지?”

 

시종일관 빠르게 움직이던 설영의 붓이 제자리에 머물며, 검은 물이 점점이 번져나갔다. 설영은 글씨를 쓰다 말고 고개를 들어 자하를 노려보았다.

 

“대체 얼마나 친밀한 분위기라고 생각해서 자꾸 이렇게 방해를 하죠?”

“내가 보기에는, …….”

 

자하는 기세 좋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늘게 눈을 뜬 설영을 보고 있자니,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저 어린 화랑에게 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천랑성의 환생에, 신국을 두 번이나 구해낸 사람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자하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뻔하지. 내가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가 없잖아? 아마 우린 입도 맞출 수 있는 사이였을 거야.”

“……상선이 제게 입을 맞출 수 있다고요.”

“왜 그런 표정이야? 너는 아니라고 할 거야?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시험이라도 해보겠어? 자하는 당당하게 말하며 설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종이와 붓을 옆으로 치우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기억 속의 그때와 같다. 그때는 지금보다 어두웠음에도, 자하는 그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도 설영의 얼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다.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못한다면 아마 상선이,”

 

설영이 발끈한 얼굴을 했다. 자하는 허락으로 간주하고 고개를 숙였다.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가렴처럼 그들을 가렸다. 어두운 밤이 그 날 그들을 그렇게 가렸던 것처럼.

상선, 하는 부름을 자하는 제 입안으로 삼켰다. 웅얼거림만이 들려온다. 겨울, 바깥에서 들이마신 그 공기처럼 차디찬 숨에는 모순적이게도 온기가 있었다.

 

이거구나.

 

자하는 이 온기를 마주하고서야, 망각조차 어찌하지 못한 감정을 자각했다. 기이한 충족감과 평온함이 그를 발끝부터 잡아먹었다. 아, 계속 설영랑을 볼 때마다 가슴이 술렁이던 까닭은 이 까닭이었구나. 설영이 밀어내지 않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을 향한 애정도. 그것이 자하를 만족시켰다.

범람한 것은 애정이었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이 자하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그를 삼킨 건 기실 괴변이 아니라 이 애정인 것이 분명하였다. 처음 기억을 잃었던 그 날에도 이미 온전히 설영을 향했던 감정이다.

내가 너의 모든 걸 다시 기억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백하게 질린 숨을 삼킨다. 겨울내음이 얽히고, 자하는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애정에 삼켜진 것이리라고. 사람을 지나치게 약하게 만드는 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서 이리 된 것이라고.

 

사랑하지 않았다면 잊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깜빡, 또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

 

잊힌 감정을 그는 기어이 겨울의 눈 속에서 찾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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