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셔시온

𝐒𝐢𝐞𝐠𝐞 : 𝐓𝐡𝐞 𝐠𝐚𝐭𝐞 합작품

「 공동 퀘스트 [ 최초이자 최후 ]가 시작됩니다. 」

 

상공의 거대한 게이트를 바라본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게이트. 시스템이 띄운 퀘스트 창의 퀘스트 이름인 ‘최초이자 최후’. 어셔 이든은 직감한다. 이것이 어쩌면 최후가 될지 모른다고. 제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부조리한 최후. 평범하고 평화로우며, 어떠한 고난도 역경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삶의 최후. 문득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본다. 제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고개가 돌아가고 눈동자를 마주한다. 희게 보이기만 하는 회색빛 눈동자는 평소와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도. 제게 닿는 시선의 온도도. 한때 제 삶의 가장 부조리한 존재라고 여겨졌던 사람. 하지만 이제는 무엇보다도 선명하고 변치 않는 존재. 뒤엉켜 진창이 된 속이 차츰 진정된다. 여전한 미소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 * *

 

세상이 뒤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게이트의 출현이 인류사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흔히들 픽션, 상상, 공상이라 치부하던 일들이 그 속에서 그대로 도려내어져 현실로 옮겨진 것처럼 이전에 알던 현실과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적인 게이트, 그것과 싸우게 된 인류. 인류 속에서 나타난 헌터들. 그리고 어셔 이든은 그중 하나였다.

어셔 이든은 평범한 삶을 지향했다. 무난하고 큰 굴곡 없는 평범한 삶. 고난도 없을 삶. 그는 그런 삶을 살고자 했고, 아마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 테다. 게이트의 출현으로 그가 지향하는 삶에 큰 고난이 얹어졌다. 자신의 장르가 일상에서 액션 판타지로 바뀌었다. 난데없는 각성. 이미 벌어진 일에 차라리 낮은 등급을 바라면서 등급 측정을 했고, 하얀 종이에 콱하고 찍힌 A. 그대로 헌터가 되었다. 한순간에 자신과 세상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어셔 이든은 평범한 삶을 바랐다. 실제로도 게이트와 싸우는 일을 제외하고 그의 일상은 여전했으니 그 정도라도 유지되기를 원했다. 게이트가 열리면 진압하고, 괴물과 때로는 동료였던 사람과 맞서 싸우는 되풀이되는 시간. 한결같은 일상. 때로는 부상의 고통으로 밤을 지새우고, 때로는 얼굴을 마주한 동료의 죽음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따금 견딜 수 없는 날이 찾아와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그런 일상을 보냈다. 현상 유지되는 일상. 느릿하게 마모되는 순간. 그리고 그를 만났다. 제 일상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리는 사람을. 그날부로 어셔 이든의 평범하고, 고난 없을 삶은 산산이 부서졌다. 시온 자네트 싱클레어. 재난을 마주했다.

 

 

* * *

 

“어셔, 힘들어?”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어쩌지. 벌써 힘들면 큰일인데?”

 

나긋한 목소리가 어셔의 위에서 내리꽂혔다. 간신히 기운을 긁어모아 고개를 치켜들자,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상대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희게만 보이던 회색 눈동자가 제 색채를 찾은 것처럼 보였고… 이어지는 말에 시답잖은 생각을 눌러 접었다. 불쑥 튀어나오는 말도 삼킨다. 휘말리면 안 된다, 안된다. 어셔는 결심을 되뇌며 시온을 바라봤다. 여상스러운 표정이 저를 놀리는 양 싶다.

 

“아파?”

“…… 안 아파 보여?”

“난 네가 참 좋다니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자 웃음이 들린다. 미온한 열기를 품은 손바닥이 뺨에 툭 닿았다. 평소보다 따뜻한 편인 걸 깨닫는다. 시온은 손이 서늘한 편이었다. 목덜미나 뺨, 신체 어딘가에 시온의 손이 닿으면 서늘함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 순간 잔잔한 열기를 가진 손에, 덜컥. 무언가를 깨닫고 만다. 어셔는 서둘러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뭘…!”

“일어날까, 어셔 공주님?”

“야!”

“음, 안 힘든 거 같은데. 조금 더 해도 좋겠어.”

 

바닥에 고정된 어셔의 시선에 시온은 웃음을 터트렸다. 노래하듯 말을 이었고 그 말에 참지 못한 어셔는 시선은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회색과 하늘색. 서로 다른 온기를 가진 눈동자가 허공에서 교차하고,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올려다보던 시선은 어느새 비슷한 높이에서 맞물렸다.

 

“게이트에서 휙 날아갈지도 몰라.”

“네가 S급인 건 까먹은 건 아니지?”

“설마.”

 

시온은 어셔의 어깨를 툭툭 쳤다. 힘든 기색 하나 없는 모양새에 어셔는 주먹을 꾹 쥔다. 하지만 쥘 뿐이다. 이미 한바탕 해버린 전적이 있기에 더는 안된다. 전략적인 후퇴였다. 그리고 지금은 체력이 바닥났기에 ―어셔 본인만 체력이 없지만.― 참아야 했다. 결국 손에 들어간 힘을 푼다. 느릿한 한숨이 바닥에 깔린다. 정말 시온은 어셔의 인생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재앙이었다.

 

 

* * *

 

시온 자네트 싱클레어. S급 각성자. 시온은 갑작스레 뚝 떨어진 헌터였다. 정말로 갑작스러웠다. 협회 쪽에서도 어셔에게도. 어셔는 그날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겨울, 빅 벤 상공에 생긴 거대한 게이트. 추정 등급은 A급. 게이트의 등급도 게이트가 생긴 위치도 협회 입장에서는 고려해야 할 요소에 더해진 요소들이었다. 그 때문에 협회는 골머리를 앓으며 게이트에 들어갈 헌터를 소집했고 어셔는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부름에 응한 어셔는 평소와 달리 걸음걸이가 거칠었다. 기분 역시 좋지 못했다.

 

“이러다가 못 들어가겠네. 안 그래?”

“그러게 말이다. 우리 오늘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어셔, 넌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햄버거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을 거야…….”

 

오늘은 오랜만에 그에게 찾아온 휴식일이었다. 휴식일을 기념하며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를 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새 파자마를 꺼내 입었고 영화를 보면서 먹을 햄버거까지 주문했다. 막 도착한 햄버거의 포장을 벗기고, 재생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단 한 장면도 보지 못하고, 단 한 입도 먹지 못한 채로 불려 나왔다. 하물며 이어진 기나긴 대기에 어셔는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에 꽤나 기분이 별로였다. 언쟁은 높아지고 있었고 대기 중인 헌터들의 컨디션은 최저점을 갱신하고 있었다. 날씨의 영향을 덜 받는 헌터들이었지만, 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 지지부진한 상태가 계속되던 중.

 

“어?”

 

한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정확히 게이트가 열려있는 그 위치, 그 지점에.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게이트로 모였다. 아주 작은 탄성 하나가 시작점이 되어 거대한 소음을 자아냈다. 그 소리에, 그 시선에, 어셔 또한 물에 휩쓸리듯이 따라 행동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이트가!”

“저거 사람 아니야?”

 

상공에 생긴 거대한 게이트는 검은 입과 같았다. 입 주위에 흉터가 가득한, 벌어진 입. 게이트는 불길한 검은빛이 일렁였는데, 한순간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차츰차츰 규모를 줄여나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게이트의 틈새에서 무언가 나왔다. 거센 바람이 휘날리던 어두운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앉았고 검은색의 코트 자락이 걸음에 맞추어 춤추둣이 휘날렸다. 희게 보이는 눈동자가,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사람이었다.

 

“사람이 제법 많네요.”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소음 사이에서 유달리 선명했다. 그 사람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 개중에는 불쾌한 시선들이 섞여 있다는 걸 어셔는 알아챘다. 자신이라면 회피하고 싶었을 시선들. 그 사람은 어셔와 다르게 개의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개의치 않았다. 입가에 걸린 웃음기만 짙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정작 다른 사람들처럼 볼 자신은 없었기에 힐끔대기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사람이었다. 게이트에서 나타난 사람인 건지, 몰래 게이트에 들어간 사람인 건지. 만일 후자라면 홀로 게이트를 클리어했을 텐데, 그 말인즉슨 등급이…. 더욱이 잠깐이지만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봤다.

 

“역시 가장 궁금한 건 게이트겠죠? 제가 닫았어요. 우리 헌터들이 어떻게 나올까, 구경하고 있었는데 들어가지도 않을 분들이 지루하게 만들어서… 유감이네요.”

 

말 한마디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의 눈매가 휘어졌고 반대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모호한 상을 띄었다. 고심하는 듯 손끝으로 입가를 툭툭 두드리며 이어진 말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게이트에서 문제라도 발생했다면 무능하다는 걸 증명했겠죠? 그렇게 티 낼 필요는 없어요.”

 

웃음기가 밴 목소리가 귓가에 내리꽂혔다. 어셔는 제 귀를 의심하며 힐끔거리는 것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의 발언을 듣고 있자니 곧바르게 보게 되었고, 시선이 맞물렸다. 희게만 보이던 눈동자가 회색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휘어진 눈매에 이채가 돈 것을 봤다.

 

“떠나기 전에 제가 누군지 궁금할 테니 이건 알려드릴게요. 시온 싱클레어. 아마도 당신들 기준에서는 S급일 것 같네요.”

 

S급 각성자 시온 자네트 싱클레어의 화려한 데뷔 순간이었다.

 

 

* * *

 

“어셔, 심심해?”

“안 심심해. 저리가.”

“정말?”

 

큰 소란을 몰고 화려한 데뷔를 한 시온은 어셔에게 먼 사람이었다. 헌터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한다면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겹치는 게이트에 들어가고, 기회가 닿는다면 훈련하고. 그 정도의 수준. 시온이 제게 먼저 관심을 가지면 모를까, 스스로가 먼저 시온에게 다가갈 성정도 되지 못했다. 애초에 시온 싱클레어라는 사람과 어셔 이든이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궤가 달랐다. 만인의 중심에 서 있는 시온. 첫 모습이 조금―어셔는 고민했다.― 반항적인 면모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무능한 걸 조금, 아니 많이 싫어하긴 했지만 말이다. …… 생각해 보니 지루하거나 소란스러운 것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재미없는 사람도…. 그에 반해 자신은 헌터 A정도였다. 만인의 중심은커녕, 관계에 있어서 중심축 되는 인물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고루 어울리기만 했다. 그렇기에 어셔는 시온과 가까워질 일이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강아지보다 고양이 같네.”

 

지독하게 얽히고 말았다. 정말 지독하게 얽혔다. 이게 다 제게 관심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시온이 먼저 다가와서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에는 친목 활동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주변 헌터들에게 물어봐도 시온이 어셔 본인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의 관심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오롯이 어셔 이든뿐이었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관심이었다. 대체 왜? 그 많고 많은 헌터들 중에서 자신에게 이런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지. A급이라서? 어셔 이든 본인이 유일한 A급이라면 모를까, 자신 이외의 A급이 꽤 있었다. 그리고 관심을 보이려면 F급이나 S급에게 보이는 게 자연스럽지 않는지. 아니면 유능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헌터들. 머리를 쥐어짜 봐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짚이는 부분이 있다면 시온의 요란스러운 첫 등장 때 맞물린 시선.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이라면 자의식 과잉이 아닌지… 어셔는 벽에 머리를 박고 기대었다. 이유 모를 관심이 답답했다. S급은 다 이런가? 시온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어셔에게 찾아온 재해였다.

 

 

* * *

 

어셔는 시온에 대한 평가를 정정한다. 시온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다 못해 미친놈이 분명했다. S급이라는 부담에 짓눌려 미친 걸까?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데. 아니, 사실 시온보다 더 미친 건 어셔 이든. 스스로가 분명했다. 어셔는 오랜만에 절망적인 감정을 느낀다.

 

‘내가 왜… 뭐가 좋다고…….’

 

어셔는 벽에 머리를 박고 기댄다. 익숙한 감촉과 온도의 벽이다. 시온과 아주 지독하게 얽힌 이후로부터 애용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동료들도 익숙한 광경인 듯 어깨를 툭툭 치고 떠난다. 어셔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 고민은 깊어진다.

 

“오늘은 산책 못 가서 슬픈 강아지 닮았네.”

 

목덜미에 서늘한 손이 닿는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대로 벽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음?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이야, 어셔.”

“아으…… 너 진짜 이렇게 불쑥 나타나지 말라고!”

“다음에는 주의해 볼게?”

“…….”

“부끄러워하지 말아. 화들짝 놀라서 벽에 머리 박은 어셔 이든에 대한 건 비밀로 해줄게. 그러니까 훈련 늦지 말아.”

“야!”

 

소리를 지르는 어셔를 뒤로하고 시온은 사라진다. 혼자 그 자리에 남게 된 어셔는 이마를 문지르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손을 가슴께로 올린다. 심장이 위치한 그 자리에 손바닥을 대자 요란스럽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게 바로 흔들다리 효과인가. 시온만 보면 심장은 왜 방정맞게 뛰고 있는지. 감정을 자각하니 단순한 신체 반응마저 단순한 의미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놀람과 흥분. 어쩌면 분노에 의한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라고 생각했지만 더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요란스럽게 뛴다고 여겼던 심장은 간질거렸다. 소리를 질러 붉어진 얼굴은 열이 번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어셔 이든은 깨달았다. 자신이 저 재앙이고 재난이고 재해 같은 시온 싱클레어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지독한 짝사랑으로.

 

 

* * *

 

헬기 프로펠러 소리가 시끄럽다. 열린 헬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날카롭고 차갑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게이트는 여전히 거대했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시선을 옮겨 퀘스트 창을 바라본다. 처음 봤을 때와 같다. 느릿한 한숨을 뱉고 어셔는 허리춤에 끼워둔 검을 점검한다. 검을 찬 방향과 반대 방향인 허벅지에 고정해 둔 총도 확인한다. 매번 게이트에 들어가기 직전 하는 행동이지만 지금은 더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긴장돼?”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어.”

“걱정 마, 어셔.”

 

어셔는 고개를 돌려 옆에 서있는 사람을 본다. 여전한 미소가 시야에 가득 들이찬다. 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어셔의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제가 좋아하는 머리카락이다. 손을 옮겨 순해 보이는 눈가 근처를 문지른다. 서늘한 감촉에 찡그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기분은 어때?”

“억울해.”

“아, 억울해?”

“억울하면 안 돼?”

“아니. 귀여워.”

“너, 너 진짜!”

 

유쾌한 듯 시온은 웃음을 터트린다. 심장 부근에 무언가 꽉 차는 게 느껴진다. 온기를 머금은 손을 잡는다. 차게 식은 제 손에 열이 옮겨붙는 기분이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시온은 반대 손을 쥐었다 편다. 검은 그림자가 헬기 바닥에서 일렁거리며 움직이는 게 들어온다.

 

“인사는 필요 없지?”

“물론. 굿바이 키스도 없을 거야. 우리는 무사히 해결하고 나올 테니까.”

 

비정상적인 여유, 그 사이로 묻어나는 오만함. 어셔의 눈에 비친 시온이다. 사람의 감정에는 한계가 존재할 테다. 그렇기에 한계치를 벗어난다면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어셔의 눈에 보이는 시온은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저를 향한 감정도, 이 상황에 대한 감정도. 어셔 이든은 부조리함을 느낀다. 불가해한 절망의 순간. 어쩌면 결말이 뻔히 보이는 상황. 숨이 막혀 짓눌려오는 기분.

 

“그래. 이번을 넘기면, 그때는 잠시라도 좋으니까 조용하게 함께 있자.”

 

그러나 한때 제 삶의 가장 부조리한 존재라고 여겨졌던 시온의 옆에서 숨 쉰다. 짓눌린 숨이 자유롭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선명하고 변치 않는 존재라는 걸. 검은 그림자가 주는 안온도 알고 있다. 다른 것들보다 검을 뿐이다. 무엇보다 검기에 불변한다.

 

“생각만 해도 즐겁네. 해보고 싶었던 이것저것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10, 9, 8…. 어셔는 시온을 바라본다. 시온도 어셔를 바라본다.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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