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왕국의 이야기

멸망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연히도, 혹은 뻔하게도, 왕실의 지난한 사치와 향락이 원인이었다. 폭정으로 서서히 기울던 왕국은 지독한 가뭄을 만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밭일을 하다 메마른 밭 위에 쓰러져 죽었다. 여인은 굶어죽어가는 아이를 끌어안고 조용히 시들었다. 아이는 부모를 잃고 헤매다 다리 밑에 묻혔다.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사들은 폭도가 되었다. 혹은 무기를 두고 도망쳐 사막에 고꾸라져 죽었다. 혹은 굶주림과 추위로 눈 먼 이들에게 매맞아 죽었다. 모두가 그러했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었다. 벌레처럼 죽은 이들의 시신이 온 나라에, 온 마을에 굴러다녔다. 배부른 것은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와, 왕실 뿐이었다. 밥 지을 솥조차 없어 굶어죽는 이들이 숱한데도, 황금을 녹여 만든 왕관을 쓴 이는 애첩의 머리에 와인을 부으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기회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폭정과 가뭄으로 뭉그러졌다 해도 왕국은 왕국이다. 비가 오면, 강과 접한 평원에서는 다시금 밀이 자라날 것이다. 그리하여 저 땅은 시들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리 여긴 다른 국가들은 죽어가는 사자 주위를 맴도는 승냥이 떼마냥 왕국을 탐냈다. 이미 강병도, 군마도, 기사도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는 왕국은 다른 것으로 승냥이 떼를 유인해 시간을 벌었다.

왕이 말한다.

“너는 이 나라의 왕족이며, 왕녀로 태어난 이다. 그러니 왕국의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라. 나의 강을 건너고, 나의 산을 넘어 가거라. 그리하여 그곳의 왕과 결혼하여 그를 막거라. 수천의 군사와 수십의 기사 대신, 네가 헌신하여 이 나라의 평화를 지켜내라.”

첫째 왕녀가 말한다.

“아버지, 어찌 이러십니까. 그에 대해서는 저 또한 압니다. 나이 예순에 스무 명의 첩을 두고, 세명의 왕비를 둔 이를 압니다. 끝내 이 나라를 노릴 이를 압니다. 끝끝내 저의 목을 치고, 우리의 강을 건너고 우리의 산을 넘어 이 나라를 침범할 이를 압니다.”

왕은 다시금 말한다.

“네 감히 나의 말을 거역하느냐. 너를 보내면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미 내가 받았다.”

첫째 왕녀는 읍소한다.

“아버지, 왕이시여, 그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그 승냥이의 말을 진정 믿으십니까. 강자와 약자 간의 약속이 얼마나 허무하고 연약한지 모르십니까. 차라리 제게 검을 쥐여주십시오. 차라리 제가 이 나라의 국경을 지키게 하십시오.”

왕은 분노한다.

“네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어찌 이 왕국을, 400년을 이어온 나의 나라를 약하다 말하느냐. 너의 사욕으로 이 나라를 모욕하는구나. 너는 그에게 가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너는 탑 꼭대기 위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리라.”

첫째 왕녀는 울며,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그곳에 저를 보내지는 말아주소서, 차라리 이 나라에서 죽게 하소서……. 그러나 왕은 완강했다. 너는 이 나라의 왕족으로 났으니 그 의무를 다하라. 왕은 말했고, 첫째 왕녀는 질질 끌려가 높은 탑에 감금당했다. 첫째 왕녀의 울음과 울부짖음이 밤새 탑을 울렸으나, 그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핏줄을 타고 이어진 광증으로 제 어미마저 베어버린 왕에게 감히 반박할 이는 없는 까닭이었다. 혹은, 이미 죽어 없어진 까닭이었다. 언니를 살려달라며 왕성의 뜰에 무릎 꿇은 동생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감히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다. 신부의 의사란 단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결혼의 준비는 수많은 이들을 굶기고 착취하며 차근차근 이어졌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을 날은 매일같이 다가왔다. 어느새 탑은 고요해졌다. 뜰에 무릎 꿇은 동생의 손은 동상으로 곱아들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결혼 전날 밤, 첫째 왕녀는 해냈다. 몰락해가는 왕국의 제일 기사이자, 걸음마를 뗀 이후 검을 놓은 적이 없다는 그는, 무너져가는 왕국을 붙들고 흩어진 기사와 병사를 어떻게든 그러모으던 그는 결국 탑의 창문을 뜯어내었고, 그 좁은 틈으로 제 몸을 우겨넣어, 마침내, 성공했다.

눈이 쌓일 정도로 내린 어느 날, 새하얀 눈발이 날리고 온 세상이 희게 뒤덮인 어느 날, 그는 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붉게 물든 눈 위로 붉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제 언니를 꺼내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읍소하던 둘째 왕녀였다.

그 날, 둘째 왕녀는 제 아비의 목을 찔렀다.

아비는, 왕은, 제 머리에서 왕관이 굴러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제 목을 붙잡고 컥컥거렸다. 벌벌 떨리는 손이 왕녀를 향했다가, 제 목을 관통한 단검을 붙들었다. 왕가에 길이길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초대 왕비의 보검이었다. 새파란 보석이 박힌 그 검은 왕의 피를 양껏 빨아 번들거렸다. 왕은 컥컥거리는 소리만을 내다가, 옥좌에 추하게 널부러졌다. 핏줄이 선 두 눈은 죽은 후에도 광증으로 가득했다. 둘째 왕녀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홀 중앙에 놓인 화로의 불꽃을 키웠다. 초대 왕비를 해하려 든 사특한 주술사를 불태웠다는 불꽃이었다. 왕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라 천명된 불이었다.

왕성을 모조리 뒤덮을 불길은, 왕조의 시작과 함께했다는 불꽃으로부터, 광증에 미쳐 제 자식을 팔고 제 자식에게 살해된 왕의 시체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빨간 깃발이 그보다 새빨간 불길에 삼켜졌다. 왕성 곳곳에 자랑스럽게도 걸려있던 깃발들은 차례차례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 날렸다. 황금으로 주조한 왕좌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지독한 화염이 온 왕성을 뒤덮었다. 그 불꽃은 이제는 왕녀가 아니게 된 동생의 의지에 따라 사흘밤낮을 타올랐다.

동생은, 언니를 살려달라 울부짖던 뜰에 서서 불타는 왕성을 바라보았다. 화염에 휩싸인 탓일까, 새빨개진 눈도, 그 위에 흩어져있던 붉은 머리칼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둘째 왕녀도 마찬가지로 자취를 감추었다. 왕성에는 오롯이 화염만이 남았다. 그 화염은, 그 불꽃은, 왕성에 깃발이 단 한 개도 남지 않게 된 순간까지, 왕국의 역사서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한 그 순간까지 타오르다가, 어느날의 함박눈 아래에 고요히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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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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