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회귀

옷깃만 스쳐도 (2022.11.26)

전생을 기억 못하는 이자하, 반면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Snapdragon by 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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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던 그때 그는 몇 모금 마시지 못한 맥주캔을 손에서 놓쳐버렸다. 

"이자하?"

뉴스채널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투쟁', '단결'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곱슬머리의 청년이 무슨 말인가 대답하고 있었다. 그의 인터뷰는 고작 10초 남짓으로 금방 다른 보도로 넘어갔지만, 마지막에 잠깐 눈이 마주친 것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몽랑. 전생의 이름을 떠올려버린 그 순간 모든 것이 기억나버렸다.

10초 남짓한 인터뷰에 나온 시위 청년을 찾는 일은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몽랑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몽랑은 인터넷에 뜬 뉴스 영상을 기어코 찾아내어 이자하의 사진을 캡쳐해서 휴대폰에 넣어 다녔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얘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사람들은 모른다는 대답과 네가 남자를 찾는다니 무슨 일이냐 정도의 반응과 미팅하러 가자, 술 마시러 가자는 꼬드김만 돌아왔다. 진짜 돈을 써서라도 이자하의 뒷조사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때쯤 사진의 인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나타나며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문주님?"

 그것도 전생의 이자하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이들도 자신처럼 전생의 기억일랑 눈곱만치도 없었으며, 이자하의 사진을 보는 순간 모든 전생을 수초 내에 전부 떠올려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결국 이자하와 인연이 있던 그 사람들도 몽랑과 같은 짓을 주변 사람들에게 해대며 그렇게 전생의 인연들을 더 끌어들이게 되었고, 이렇게 몇 다리 건너서 결국은, 기어코 "얘 우리 학교에서 유명 인사야. 미친놈이라고 소문났어."라는 대답까지 도달한 것이다.

전생의 기억이면 전생의 기억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도 좋았을 것을. 어쩌면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몽랑으로썬 어쩔 수 없었다. 전생 이자하는 몽랑이 은퇴를 하기 직전에 갑자기 사라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라져버린 이자하를 찾기 위해 몽랑이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그 어디에도 이자하가 없었고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함께 죽지 못했다. 천하의 이자하가 어디선가 객사하지는 않았을 테고, 누군가한테 쉬이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의 너는 어디로 간 것일까. 왜 어찌하여 우리 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인가. 몽랑은 평안한 죽음을 맞는 그 순간에도 궁금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한 만큼 꼭 돌려주리라 생각했다. 사실 자기가 제일 걱정했음에도. 다들 어디선가 문주님은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나중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몽랑만큼은 온 강호를 찾아다니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기어코 사라져 버린 이자하를 찾아낸 곳은 병원이었다. 어떤 괴한에게 습격당해 칼에 찔렸다는 것이 현세에 환생한 모용선생의 이야기였다. 모용선생 또한 전생의 기억이 없이 잘 지내다가 칼에 찔려 응급실로 실려온 이자하를 수술실에서 만났을 때 기억이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정말이지 무슨 정신으로 수술했는지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토로하며 피곤한 얼굴로 근무하러 돌아갔다. 

'고작 칼 따위에 이자하가 죽을 수도 있다고?'

사람은 칼에 찔리면 죽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자하는 마치 예전처럼 강하고 강해서 다치지도 죽지도 않을 거 같았다. 그건 환생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조금만 잘못되었더라면 몽랑이 이자하를 찾았을 때는 장례식장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칼은 장기를 모두 비껴갔으며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요란이가 너를 찾겠다고 나와 같이 강호를 엎고 다닌 것은 알고? 도대체 왜 그때 갑자기 사라져서 나를 이렇게도 미련스러운 남자로 만들어서 기어코 환생해서도 너를 만나겠다고 찾아다니게 만드느냐고 이것저것 말하고 싶었는데,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자하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고작 생각나는 게 이런 말밖에 없어서 몽랑이 입만 뻥긋거리는 사이에 이자하가 말했다.

"일단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기억이 없다."

"뭐?"

"내가 모르는 전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몇 번 찾아왔었다. 알려준 적도 없는데 내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자하라는 이름을 알거나, 하오문주라고도 부르더군.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기억이 없어. 나를 습격한 놈도 경찰에게 뭐라고 진술했는지 알아? '저 새끼가 전생에 나를 죽여서 복수했다'고 대답하더군. 참으로 기가 막히지? 나는 나도 모르게 전생의 업보를 받고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에 방화를 저지른 놈도 있었어. 그놈도 '전생에 너 때문에!'같은 말을 했었다. 이제 알겠어? 내가 전생에 무슨 악업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전생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운명이란 참으로 기구하다. 그놈의 불은 또 이자하를 괴롭힌다. 생각해보면 몽랑의 운명도 다시 찾아왔다. 이번 생에 아비란 놈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는데 순진한 어머니는 이를 모른 채 몽랑이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다시 전생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걸까? 그런 운명에 태어나 항상 비슷한 선택지에 놓이는 걸까? 왜 우리는 다시 만났지? 왜 하필이면 네가 떠올리지 못하지? 왜 나는 기억을 하지? 차라리 우리가 너를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어째서 세상은 이다지도 불합리하게 흘러갈 뿐인지. 그럼에도, 그 모든 걸 제치고도 그저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것이 그저 반가울 뿐인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이자하, 너랑 나는 훌륭한 악인이었다. 천하제일의 악인이었지. 우리 둘 말고도 악인형제가 더 있어. 그런데 그까짓 기억이 없다고 그렇게 홀라당 발을 빼버리면 섭섭하지. 우리가 어떤 악연인데." 

적당히 침대 구석에 걸터앉은 색마가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셋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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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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