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대공저

지향색을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

슈리아님과 연성교환

집 떠나면 고생이다. 선조의 지혜가 담긴 격언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다.

겐이치는 저를 향해 쇄도해오는 나뭇가지를 간신히 피하며 가쁜 숨을 헉헉 내쉬었다. 등판을 흠뻑 적신 땀은 금세 식어 서늘하게마저 느껴졌다. 겐이치에게 아주 잠깐의 숨을 돌릴 여유를 준 상태는 다시금 손에 든 나뭇가지를 겐이치에게 휘둘러댔다. 겐이치는 필사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읽으려고 애를 쓰는 동시에 바닥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격하는 쪽을 골랐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거나 저거나 상황은 비슷했으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상대가 저 사람이어서야 그랬겠지.

나뭇가지가 톡 소리를 내며 가볍게 왼쪽 어깨를 스쳤지만, 통증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까워서라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일 분 일 초가 천년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냥 집사 면접을 보러 온 것 뿐인데,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 * *

소문의 대공저의 사용인 모집 공고를 본 겐이치는 약간의 고민은 했지만, 곧장 지원서를 작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없었으니까.

에일레흐 왕국의 수도, 타라의 나름 귀한 집 도련님인 그가 세상을 돌아보고 오겠다고 집을 떠나온 지 석 달째, 겐이치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사치를 부리면서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해서야 돈이 떨어지는 것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일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은행에 가서 가문의 계좌에서 돈을 꺼내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었지만, 세상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왔으면 자급자족을 하는 게 본이 사는 일이 아닌가, 하는 알량한 생각이 들었다.

일용직도 나쁘진 않았지만 막 영지에 온 외지인에게 일을 줄 만큼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다가, 대공령에 장기 체류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겐이치로서는 고정적이고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몸이 좀 덜 고된 일이면 더 좋았다. 그런 겐이치의 앞에 대공저의 사용인 모집 공고가 나타난 것은 운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귀족 자제로서 몸에 갖추고 있는 교양이나 예의 범절,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무력과 확실한 신원.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합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 자신만만한 마음을 가지고 겐이치는 대공저로 향했다.

***

...그랬는데, 면접을 보는 집사라는 사람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봤지?

겐이치에게 기시감이 들게 만든, 언뜻 봐선 금발인지 은발인지 모를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하얀꽃 장식이 달린 검은색 안대로 한 쪽 눈을 가리고 있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집사가 겐이치의 생각을 끊어놓듯이 질문했다.

"좋아요, 지향색은 뭔가요?"

면접 질문 치고는 좀 많이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면접보는 입장에서 겐이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검은색하고 파란색 좋아합니다."

"겹치는 사람 없어서 좋네요. 종교는요?"

"라이미라크교 믿습니다..."

"아, 염려 말아요. 이 저택에선 그렇게 중요한 사안 아니니까. 나만 해도 절대신을 믿고, 비전하는 하이미라크를 믿으시거든요."

라이미라크교가 지배적인 수도 타라에서는 귀족 가문의 사용인을 뽑을 때 종교도 신경쓰곤 했으므로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유롭고 친근감 있는 면접 분위기에 겐이치는 긴장을 좀 내려놓았다.....머지 않아, 그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고.

"싸움은 좀 잘 해요?"

"보통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하거든요. 대공전하 저택이니까. 짐작가는 구석은 있죠?"

"예."

"자, 그럼 밖으로 가죠."

"예?"

왜요? 라는 질문이 교양 없이 튀어나왔지만 겐이치의 등을 떠미는 집사는 방긋 웃기만 했다.

* * *

그렇게 저택 뒤 공터로 겐이치를 데려온 집사는 겐이치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다.

"둘 중에 하나 골라요. 시간 제한 없이 열심히 공격을 피하는 나를 한 대라도 치는 것과, 내 공격을 피하면서 한 번도 쓰러지지 않고 20분 동안 버티는 것. 이것만 통과하면 합격이랍니다. 아, 후자일 경우 무기는 이거 쓸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들어보였다.

"쓰러지는지 판정은 어떻게 하나요?"

"이거 주머니에 넣고 있어요. 넘어지면 깨지는 거 알죠?"

후자를 선택하며 겐이치는 그녀에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달걀을 받았다. 그렇다. 달걀이란 이상하게 세게 쥐는 걸로는 깨지지 않지만 가지고 있다 넘어지면 깨져버리는 미지의 물질인 것이다.

"저도 공격해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무기도 써도 괜찮아요. 자, 정각까지 딱 20분 남았으니까, 정각을 울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싸움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할 정도니까 상대도 어느 정도 무력은 있을 것이다. 그리 판단한 겐이치는 듀얼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보통 귀족 저택에 사람이 들어올 때는, 무기의 소지 여부를 확인하고 보관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경비가 엉터리인 저택이거나 혹은, 방문자가 무기를 들고 있어도 그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뭇가지가 겐이치의 왼뺨을 스쳐지나가자 통증과 함께 액체방울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시작했어요."

여전히 여유롭게 웃는 얼굴을 보며, 겐이치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왜 낯이 익었는지 생각났다.

현 국왕의 왕위계승다툼 당시, 단신으로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전설적인 공신이 있다. 국왕 즉위 후에 행방이 묘연해져서 존재도 그냥 허상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지만 적어도 유력 귀족들은 그 존재여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공...?"

"어머, 내 얼굴을 다 아네?"

노아 라인하르트. 이 사람이 왜 대공의 저택에 사용인으로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 사람의 손에 들린 물건은 그게 돌맹이라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겐이치의 목숨이 걸린 20분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

그리고 현재, 겐이치가 더는 못 하겠다 싶어 포기하려던 차에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 것이, 그에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고생했어요. 합격~ 이야, 보통은 한다더니 대단해라."

"...그거 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비틀거리며 노아의 손에 황금달걀을 돌려준 겐이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합격이라니 다행이긴 한데 나 이 저택에서 일해도 괜찮나? 그렇게 겐이치가 숨을 고르고 있는 와중에,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 됐어~?"

"아, 합격! 날 상대로 20분이나 버텼어. 대단하지!"

"그야 노아 네가 봐줬겠지."

"적당히 하지 그랬어. 피나는 거 좀 봐, 치료부터 해야겠다."

머리에 푸른 리본을 달고 있는 하늘빛 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과, 뾰족한 귀가 인상적인 안경을 낀 금발의 남성. 겐이치가 힘없이 멍하게 둘을 바라보고 있자 노아가 두 사람의 소개를 시작했다.

"자, 이쪽은 이 저택에서 세번째로 높은 분인 메이드 일레이시아."

"안녕 반가워, 일레이시아야!"

"가장 잘 보여두면 좋아. 주방 담당이거든."

주저 앉아있는 겐이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힘차게 흔든 일레이시아가 찡긋 윙크해보였다.

"그리고 이 저택에서 세번째로 높은 분인 집사 유미너리. 서고 관리를 담당하고 있어. 사용인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니까 찾는 책이 있으면 유미오빠한테 물어보면 돼."

"잘 부탁해요."

어느새 말을 편하게 하고 있는 노아에게 딴지 걸 기운도 없었던 겐이치가 고개만 끄덕였다.

"노아 선배도....세번째로 높은 분이십니까?"

"눈치가 빠르네~"

첫번째야 대공일거고, 두번째야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앞서 노아가 언급한 적이 있는 대공비일 것이다.

"그럼 저도 세 번째로 높은 사람이 됩니까?"

"아니, 겐이치군은 막내니까 네번째로 높은 사람."

이것으로 겐이치는, 대충 저택의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진짜 이상한 저택이구나. 대체 이 사람들을 사용인으로 거느리고 있는 대공은 어떤 사람일까? 소문은 믿지 않지만, 소문 그 이상의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겐이치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사용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겐이치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저택에 온 걸 환영해요, 겐이치군."

"앞으로 잘 부탁해!"

하지만 분명 좋은 곳이기도 하겠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딘가의 신시엘라크 공자만큼은 아니어도, 겐이치도 감이 나쁘진 않았다. 앞날이 걱정되긴 했지만, 느낌만은 좋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소개 받지 못한 사용인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겐이치는 저 멀리 창문으로 저를 힐끗 보고는 무관심하게 몸을 돌려 사라지는 흑발을 미남을 목격했는데, 겐이치가 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겐이치군."

"예?"

"모집공고, 메이드 모집 공고인 건 알고 지원 한 거 맞지?"

".......예?????"

정말, 앞날이 걱정되는 걸 뛰어넘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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