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인사쿠] 말 한마디에 아튼시미니께서 굽어보신다
하윤님이 신청하신 골드커미션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느끼며 소파에 눕듯이 앉아-누군가는 척추 수술 1800만원을 외칠지 모르는 일이지만 밀레시안은 환생을 하면 되는 일이다-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사쿠야 스칼렛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잔소리를 들을까 허리를 세워 고쳐앉았다.
"그대."
"오래 걸렸네~ 어디 새 옷 입은 것 좀 보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휙 돌아본 사쿠야 스칼렛은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대공저에서 함께 살게 된 이상, 그 무거운 갑주나 남사스러운 '그 복장'을 입게 할 수는 없었기에 사용인에게 베인에게 어울리는 새 옷 좀 골라 입히라고 부탁하고 기다리기를 한나절.
"그대는 어디서 저런 자들을 모았나? 그렘린 떼도 저보다는 덜 시끄럽겠어."
하얀 셔츠에 검은색과 붉은 색이 어우러진 조끼에, 목을 감싸는 광택이 나는 검은 리본과 그 가운데를 장식하는 붉은 장미 모양의 코사주,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 긴 바지-통칭 '야수의 수트'로 불리는 그 옷은 베인을 위해 만들어진 옷인양,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려서, 사쿠야 스칼렛은 꿀꺽 목 뒤로 침을 삼켰다.
다들 진짜 열심히 골랐구나.
사쿠야 스칼렛은 마음 속으로 사용인들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
사쿠야 스칼렛의 생각대로, 옷을 고르는 내내 베임네크를 둘러싸고 있던 사용인 세 사람은 그 이상으로 진심일 수가 없었다. 처음 서큐버스 퀸을 만나러 갔을 때도 그 정도로 열의에 불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밀레시안이라는 종족은, 본디 의장에 진심인 법이다. 사용인이라서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티가 안 날 뿐이지, 노아도 일레이시아도 유미너리도 사복을 입을 때는 제 지향색을 뽐내며-좀 과장을 보태서- 휘황찬란하게 입고 다니는 밀레시안이었다.
거슬리고 치워버리고 싶다는 듯한 베임네크의 표정이나 사나운 말 따윈 '그치만 대공전하께서 부탁하셨는 걸요!'라는 말로 봉인해버리고는 이런 저런 옷을 대보고, 입어봐라, 벗고 다른 걸 입어봐라, 이건 안 어울린다 이걸로 다시 입어봐라...하는 번잡스러운 짓을 시키기를 한나절. 겨우 옷 한 벌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골라서는, 색이 중요하다며 염...뭐라고 하는 작은 물건을 이걸 댔다 저걸 댔다 반복했다.
푸르딩딩한 머리카락을 가진 자가 원래 입고 있던 의복 색이 가장 어울리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어 고르는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도록 옷의 염색을 끝마쳤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지체되었으면 사랑하는 나의 그대의 사용인들이고 뭐고 베임네크는 다 엎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했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다듬고 꾸민 자신들의 대공비 전하를 보며 만족했다.
***
그런 사용인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제게 꼭 어울리는 옷을 입게 된 베인은,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사쿠야 스칼렛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옷 잘 어울리는데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사쿠야 스칼렛의 물음에 뭔가 말하려던 베인은 주저 하듯 입을 다물었다. 또 저런다. 사쿠야 스칼렛은 마음 속으로 혀를 찼다. 세상 모든 존재, 아마 절대신인 아튼시미니에게 조차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게 분명한 전직 파괴자는 오직 사쿠야 스칼렛의 앞에만 망설이고, 머뭇거리곤 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사쿠야 스칼렛은 말하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베인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본디 남을 재촉하는 성정도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법이다.
"베인,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말해봐. 너의 그대인데, 그거 하나 못 들어줄까."
오른손을 들어 베인의 뺨을 쓰다듬으면, 베인은 그 손에 매달리듯, 제 왼손으로 겹쳐잡는다. 눈을 마주하고, 이름을 부르고, 천천히 기다리면 그제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쿠야 스칼렛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듯이 진심을 토해내는 것이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래? 원래 입고 다니던 의복이랑 비슷한 색이니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대의 색으로 물들고 싶었거든."
백색과 푸른색. 베인의 사쿠야 스칼렛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가지 색. 시덥잖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새로운 의복을 입는다면 기왕이면 그 색으로 물들고 싶다고 베인은 생각했다. 그러면, 이미 자신은 사쿠야 스칼렛의 것이었지만, 누가봐도 그의 것이라고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맹랑한 그대의 사용인들이, 절대 안 어울린다며 반대하더군."
"네가 좀 이해해...원래 색이라는 게 우리한테는 좀 민감한 부분이라서."
"혹은 과한 바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색으로 물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대에겐 안 어울리는 색이라며 아주 학을 떼더군. 누가 주인인지."
웃음소리를 내며 농담인양 흘려보내려고 하지만, 그것이 십분 진심이라는 것을 사쿠야 스칼렛은 알고 있다. 언젠가 함께 꿈결같은 생을 살고 싶다고 말하던 그는, 함께 살아가기로 했으면서도 단어 그대로 꿈결같아서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증거를 갈구 하곤 한다. 그것이 한편으론 애달프게 느껴져서, 사쿠야 스칼렛은 두 팔을 뻗어 베인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우리의 색이 다르니까, 네 곁의 내가 돋보이고 내 곁의 네가 돋보이잖아.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하지만 나는, 감히 그대가 나에게만 특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하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웃음소리를 흘리며 베인을 안고 있던 팔을 푼 사쿠야 스칼렛이 겉옷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게, 그 답이 되면 좋을 텐데.
"옷은 어울리는 걸 입고 다니자, 그 대신에."
툭, 하고 상자를 열면 그 안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각각 붉은 색과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 한 쌍이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건네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때는 없을 것 같았다.
"서로의 색을 품고 있는 건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꼭 누군가 알아야봐야할 필요는 없잖아. 너에겐 내가 있고, 나에겐 네가 있다는 걸. 우리 서로만 알고 간직하면 되는데. 이미 너는 나에게 더 없이 특별하고, 네가 말하듯, 나는 네게 하나 뿐인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그대인 걸.
제 반려가 네번째 손가락에 끼워준, 사쿠야 스칼렛의 눈동자의 색과 같은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보고 베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그를 마주보고 있던 사쿠야 스칼렛만의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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