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도 엘프하기 나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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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엘라스 헬더는 약초상이다. 정확히는 에일레흐 왕국 북쪽에 위치한 대공령에 자리한 상점가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약초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엘프 약초상이다. 그런 그는 지금 평소에 입던 초록빛이 도는 편한 작업복이 아니라 각이 잡힌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 조끼로 이루어진 집사복을 입고 대공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진짜 크네...큰만큼 사용인도 많을 테니까 괜찮겠지...."
거대한 대공저의 대문을 쳐다 본 아엘라스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열려있는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쩐지 시작이 좋은 걸? 아엘라스는 아주 살짝 몸의 긴장을 풀었다. 대문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한쪽 눈을 가린 집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라?"
"아, 안녕하세요."
"응, 그런가. 신입이구나! 내가 딱 한 눈에 알아봤지. 신입들은 꼭 가지고 다녀야하는 걸 안 가지고 다닌다니까~"
햇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금색으로, 산호색으로도 보이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집사복을 입은 인간 여성이 아엘라스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더니, 어떻게 저 작은 집사복 주머니에 들어있었을까 의심스러운 천가방을 하나 꺼내어 아엘라스에게 내밀었다.
상황파악은 하나도 되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그녀가 내민 가방을 받아든 아엘라스는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오른손으로 아엘라스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어디다 두고 다니지 말고 꼭 들고 다녀야해. 대공저 사용인이라면 그래야지.
"신입이니까 아직 저택 구조 잘 모르지? 그런 신입을 위해 노아씨가 좋은 걸 알려줄게. 자, 저기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복도로 끝까지 쭉 걸어가면 좋은 일이 생길거야. 알았지? 꼭 가야해!"
"네, 네. 감사합니다..."
"자, 자 얼른!!"
노아라고 이름을 밝힌 집사가 등을 떠밀자 아엘라스는 천천히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노아는 여전히 웃는 낯을 한 채, 어디선가 날아온 새에게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
어째서 아엘라스가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아엘라스가 대공령에 자리잡고 가게를 운영한지 꽤 시간이 되었지만, 이 땅의 주인인 대공 사쿠야 스칼렛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키가 자이언트보다 크다든가, 싸움광이라든가, 왕위경쟁에서 패배해 북부로 쫓겨난 지금도 여전히 왕좌를 노리고 있다든가, 하는 흉흉한 소문들이 가득했지만 세금을 많이 걷는 것도 아니고, 대공령의 치안유지에도 힘을 쓰고 있었기에, 대공령의 주민들은 막말로 이렇게만 유지된다면 대공전하가 포워르여도 상관없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아엘라스 거기에 섞어 함께 농담을 주고 받고 했다.
그에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썸남이 생기기 전까진.
아엘라스 헬더에게는 썸남이 있다. 야마다 겐이치라는, 이름조차 귀여운 청년은 대공저의 집사로 일하고 있었다. 가끔 마을에 내려와 아엘라스의 가게에 들려 약초를 사가며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 받으며 귀끝을 붉히는 걸 보고 있으면 언제 고백할까 조바심이 나서 아엘라스 자신이 먼저 고백을 할까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단꿈에 젖어있던 것도 잠시, 아엘라스는 깨닫고 만 것이다. 제 썸남이 근무하는 곳이 소문의 대공이 사는 저택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던 게 자기 일이 되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대공이 소문대로의 사람이면 어떻게 하지? 사용인들도 함부로 대하고 갈아치우는 거 아니야? 우리 겐군 크리스탈 재떨이같은 거 맞으면서 일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아엘라스 헬더는, 썸남의 근무환경을 직접 확인하고자 왕궁 공용 집사 의상까지 구해 대공저 잠입을 감행한 것이었다. 대공저 같은 큰 저택에 당연히 사용인도 많이 쓸테니, 하나 둘 모르는 얼굴이 있어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말이다.
사랑에 빠진 엘프는 무모하고, 용감했다.
***
무심코 노아가 알려준 곳으로 향하자,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무래도 주방인 모양이었다. 나 잠입하는 건데? 염탐하려고 온 건데? 여기서 누군가를 더 만나도 되나?라고 생각할 때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던 소리가 멈추고 누군가 빼꼼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서와~ 신입이지? 좋을 때 왔네. 마침 쿠키가 다 구워졌거든! 어서 들어와!"
하늘빛 머리카락을 가진 메이드가 아엘라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주방 안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안에 들어간 아엘라스는 눈 앞에 펼쳐진 디저트의 향연에 오감을 지배당했다. 달콤한 냄새, 윤기가 도는 때깔. 베어물면 바삭,하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쿠키들. 아엘라스가 쟁반 위에 놓인 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꺄르르 웃던 메이드가 아엘라스의 입가에 초코칩 쿠키를 하나 들이밀었다. 저도 모르게 와작, 한 입 베어문 아엘라스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맛있어요...!!"
"당연하지. 난 대공저 최고의 요리사라고! 5성 요리 아니면 취급을 안 해! 히히, 챙겨줄 테니까 들고 다니면서 먹어!"
"그래도 되나요?"
"대공저 사용인이라면 당연히 그래도 괜찮지! 마침 필수품인 가방도 들고 있네! 일레이시아씨의 애정이 듬뿍 담긴 쿠키세트야!"
아엘라스가 들고 있던 가방을 가져가 아마도 갓 구워 따끈따끈할 쿠키를 몇 개씩 넣어 포장해 넣어준, 일레이시아라는 이름의 메이드가 오른쪽 눈을 찡긋하며 다시 아엘라스에게 가방을 돌려주었다.
"아마 유미오빠가 일손이 부족했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신입씨는 복도를 쭉 따라가다 보이는 갈색 커다란 문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해. 거기가 장서관이야. 가면 아마 좋은 일이 생길 걸!"
자자, 그럼 장서관을 향해 출발! 하고 아엘라스가 정신차릴 틈도 없이 등을 떠밀어 주방 밖으로 내보낸 일레이시아는 자신이 알려준 방향으로 가는 아엘라스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만나서 반가웠어!하고 중얼거리면서.
***
장서관에 자리하고 있는 집사는 엘프였다. 울라대륙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동족이었으나, 이래서야 급할 때 하이드도 간파당하겠는 걸,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온화함을 내뿜는 아마도 '유미오빠'일 집사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급한 일은 오전 중에 다 끝내서 말이에요. 신입씨가 할 일은 없어요. 아니다, 도와줄 일은 있겠네요."
"네, 네 뭔가요?"
"이거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 읽고 감상 좀 부탁드릴게요. 다른 사용인들은 취향이 안 맞는 건지, 읽어주질 않아요."
그렇게 유미-라고 부르기로 아엘라스는 결정했다-가 건넨 책은 시집이었다. 사랑의 말들, 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탈 것이 분명했다. 오늘 잠시 염탐 온 거라 영영 감상을 전해줄 일은 생기지 않을 텐데...지금까지 만난 사용인들이 다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는 아엘라스였으나,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는 아엘라스의 가방에 시집을 넣어주었다.
"천천히 읽고, 여유로울 때 감상을 줘도 좋으니까요. 신입씨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도움이...될까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면 좋은 낭만적인 말들에 대해서도 제법 많이 적혀있답니다."
느긋하게 함께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온실 쪽에 일손이 부족할 것 같다며 유미는 아엘라스에게 온실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아엘라스는 뭔가 계속 반복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기왕 대공저를 염탐하기로 한 거 온실도 가봐야겠지!하는 마음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큰 저택에 있을 온실이 궁금하기도 했다.
***
그리고 그렇게 온실에 도착한 아엘라스는, 새하얀 미인을 만났다.
"이야기 들었어요. 일은 다 끝나버렸는데, 아쉬울 테니 이걸 줄게요."
긴 백발이 찰랑이는 가운데, 머리 위로 쫑긋 솟은 여우귀가 잘 어울려서 귀여운 남자. 지금까지 만났던 사용인들과 달리 흰색과 푸른색이 어울어진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있다. 아무리 아엘라스가 눈치가 없어도, 이 저택에서 그런 옷을 입고 있을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소문의 대공이다.
그 대공이 아엘라스에게 장미꽃을 줬다.
"당신의 머리색보단 덜하지만, 제법 곱죠? 제가 좋아하는 꽃이랍니다. 제 반려에게 어울리는 꽃이거든요."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대공저 사용인이라면 당연히 받을 수 있답니다. 자, 그럼 마지막이겠군요. 저쪽으로 쭉 걸어가세요. 좋은 일이 생길거랍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엘라스가 다칠 새라, 가시를 손수 정리해서 쥐어준 장미꽃은 붉고 생생하여 참으로 예뻤다. 안경 너머의 눈웃음이 다정하여 인상적인 대공은 흉흉한 소문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진 않았기에, 아엘라스는 꽃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가 가르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대공저 사용인들을 당연히 해도 되는 일들이 많고 복지도 좋구나. 겐군 걱정 안 해도 되겠다.
***
그리고, 대공의 말대로 그 길의 끝에서는 그날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이, 아엘라스를 찾아왔다.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 소개를 듣지 않아도 이 저택에서 만난 사람 중 유일하게 아엘라스가 이름을 알고 있는 사용인이 아엘라스의 이름을 부르면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엘라스씨."
"솔직히, 중간부터 눈치채긴 했는데 말이야..."
"선배님들이랑 전하께서 양해해주셔서 망정이지, 무모한 일이셨습니다."
대공저의 막내집사는, 조금 엄한 표정으로 아엘라스에게 주의를 준 후에,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에스코트 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알아들은 아엘라스는, 긴장을 풀고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래서 어떠셨나요, 대공저는?"
"겐군은 굉장히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구나 싶었지! 오늘 하루종일 좋은 일 밖에 없었어!"
"그렇죠. 다들 좋은 분들이죠. 소문 때문에 걱정하셨군요?"
"어떻게 알았어?"
"아엘라스씨는 가끔 생각하는 게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예? 뭐가 말입니까?"
생각이 보인다면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는구나? 한 손에 천가방, 다른 한 손에는 썸남의 손을 잡고서, 문득 행복을 느낀 아엘라스가 꺄르르 웃었다.
"나중에 같이 살기! 대공저 사용인 가족이라면, 대공저에서 같이 살지?"
"....저라고 평생 여기서 일할 건 아닌데 말이죠...."
"그럼 잠시라도! 히히!"
"그나저나 고백도 안 했는데 뭡니까 그거. 가족이 되어주실거예요?"
"겐군이 안 하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게 오늘이 되었다고 생각해."
"아닙니다. 제가 먼저 할거예요. 무효처리 해주십시오!!"
글쎄, 날 잡으면 무효처리 해줄까? 라는 말과 함께 겐이치의 손을 홱 놓은 아엘라스가 천가방을 흔들며 저 멀리 달려나갔다. 겐이치가 뒤에서 인간이 어떻게 엘프 속도를 따라잡는다고! 너무하십니다!하는 불평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먼저 고백하는 게 임자지. 다음부턴 민첩하게 굴도록 하세요, 겐군!
대공령의, 대공저의 막내집사와 그의 연인의 하루는 오늘도 평화롭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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