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젬] 여름을 채워넣어
3000일!!!!!!!
함께 하는 삶 내도록 봄이리라, 축복하는 꽃비 아래서 입 맞추던 순간 예언처럼 깨달았다. 앞으로 있을 저의 계절에 차가운 겨울은 없을 것이라. 당신이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나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도 한 잎 벚꽃을 찾을 수 있다고. 꽉 부여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이것이 개화하는 봄의 온도라 생각했다. 내 삶이 당신과 닿아 드디어 봄과 같이 개화했노라고,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며 그치지 않을 봄을 기대했다.
실로 그러했다. 눈을 뜨는 아침의 공기가 달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들기 아쉽고 아침이 반가웠다. 눈을 감을 적엔 함께 침대를 데워 잠들었으며 눈을 뜨고 있을 동안은 늘 서로를 눈에 담았다.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뺨에 키스하고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축복, 축복이로다. 삶의 지난한 고통과 고뇌마저 긍정하게 되는 날이 지속되었다.
그 축복이 양상을 달리 한 어느 날, 저는 깨달았다.
봄의 끝이 도래하였음을.
놀라 크게 벌어진 녹음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떨림이 가시지 않는 손으로 서로를 붙잡아 의지했다. 앞으로 다가올 격랑에 흔들리지 않으려 몇 번이고 시선을 마주했다. 봄이 너무 따뜻해서 그랬을까. 그리하여 씨앗을 품은 것인가. 기쁨과 걱정에 젖은 그의 뺨을 어루만져 닦아주고는 발꿈치를 들어 입 맞추었다.
괜찮아, 알지?
새 계절의 두려움은 잠시 밀어두고서 그저 속삭였다.
*
씨앗은 정말 작고 연악하여 발아하였음에도 홀로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는 제 어미로부터 듣지도 못했던 '우리도 부모는 처음이라' 같은 말을 혐오하였는데 이제 와 그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물론 그 문장의 쓰임이 다르겠으나, 어쨌든, 그들은 모든 일에 서툴렀고 또한 어설펐다. 감히 세아릴 수 없는 시간을 쌓은 아버지와 세계의 모든 지혜를 품은 어머니가 저들의 팔뚝만한 두 덩어리를 앞에 두고 안절부절못했다. 어미는 하루가 멀다하고 육아 책을 탐독하였으며 아비는 제 형제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서두르고 외치고 달려가고 끌어안았다. 핏기가 가시지도 않은 덩어리가 나름대로의 색을 자랑하는 터라 잠든 덩어리를 품에 안고서 어디가 당신을 닮았다느니 실없는 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덩어리는 빠르게 자랐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시간의 흐름을 그리 체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어다니지도 못하던 것들이 홀로 서고, 때로는 달리다 넘어졌다. 지나가는 비바람에도 뿌리 뽑힐 것 같아 초조했던 때가 무색하게 새싹은 훌륭한 묘목이 되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 위에 드리웠던 우산을 조금씩 치워내며, 그는 제 여름의 형태를 보았다.
작고, 아직 어리고, 부드럽고, 여리지만… 자신의 생을 가진 여름.
여름의 햇살이 푸르게 성긴 이파리 위로 쏟아진다. 채도 높은 녹색이 마구 이지러지며 하늘을 메운다. 피어나는 봄만을 기대하였던 순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흘러넘치는 생명력과 습윤하고 뜨거운 공기가 주는 어마어마한 박동감이 삶을 채워갔다. 이것은 분명 봄과는 다른 충만함이다. 어린 여름들을 품이 꽉 차도록 끌어안으며 그가 물방울 튀듯 웃었다. 연인을 대하는 것과 다른 사랑이 차올랐다. 그는 젖살이 말랑한 여름들의 뺨에 키스하고 다시 돌려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견 두렵기까지만 했던 여름의 충만함이었다. 풍요로운 계절이 그의 삶을 배불렸다.
*
"그럼, 이번엔 엄마가 술래 할까?"
제마가 허리춤에 감겨 팔랑거리는 천을 쭉 잡아당겼다. 따사로운 햇살과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흰 천이 바람에 휘날려 그의 손목을 감았다 떨어졌다. 마치 저도 그 놀이에 어울리게 해달라는 듯 천이 장난치는 모양새라, 한창 '천지만물 요정 놀이'에 꽂힌 에아가 까르르 웃었다. 엄마, 흰 천의 요정도 놀고 싶은가 봐! 제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락팔락 발버둥 치던 흰 천은 그의 손에 붙들려 흰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눈을 내려감고 그 위를 천으로 덮은 이가 뒤통수에 대고 매듭을 꽉 묶었다. 시야가 차단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 그는 눈을 뜬 이처럼 반듯하게 서서는 스물을 세었다.
하나, 둘, 수를 셀 때마다 사방에서 잔디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에아의 킥킥대는 숨과 제이 특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걸음소리가 다른 방향에서 들렸다. 제마는 그 자리에 서서 소리 없이 웃었다. 딛고 선 대지의 진동만으로도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니 눈을 가린 것만으로는 실로 큰 패널티가 되지 않지만, 그의 아이들의 세계에서 시야의 차단은 큰 패널티이니 그는 그 시야에 맞추어 어울렸다. 세아리는 숫자가 스물에 근접하자 아이들이 하나 같이 숨을 죽인다. 사부작, 사부작. 제마가 웃음을 꾹 참았다. 스물!
"누구를 먼저 잡아볼까나~."
제마가 성큼성큼 나아갔다. 양손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한 번 휘젓자 에아의 방향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옳거니, 제마는 부러 이제 눈치 챘다는 양 에아의 방향으로 휙 몸을 틀어 우다다 달렸다. 에아가 꺄악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도망쳤다. 엄마, 엄마아! 제이 오른쪽에 있어요! 에아, 너…! 제이가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제마는 발칙한 밀고자를 냉큼 끌어안고는 제이 방향으로 달렸다. 아이의 짧은 다리가 아닌 성인의 다리로 달려나가자 에아가 다리를 흔들며 소리 높였다. 더 왼쪽! 오른쪽! 에아가 장난기를 듬뿍 담아 부러 왕복 운동을 시키는 걸 알면서도 제마는 따라주었다. 도망치던 제이가 체력이 달려 자리에 멈춰 선 채헉헉댔다.
"엄마, 제이가 지쳤어!"
"에아, 이, 고자질쟁이…."
억울함 듬뿍 담긴 제이의 목소리에 제마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도망치길 포기한 제이의 앞에 서서 아들까지 끌어안은 그가 제이의 뺨에 꾹 입술도장을 찍어주었다. 헉! 엄마, 에아도! 제마의 옆구리에 매달린 딸이 칭얼댔으나 제마는 중세 기사들의 결투 심판관처럼 단호하고도 과장되게 고개를 저었다.
"동료를 밀고한 사람에게 뽀뽀는 줄 수 없다!"
"뭐어어?"
"에아 바보. 그러게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제이까지 그러기야?"
"그리고 제일 먼저 잡힌 에아가 다음 술래야."
제마가 눈을 가린 흰 천을 끌어내리며 덧붙이자 에아가 입술을 쭉 내밀고 삐죽거렸다. 심통난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가 흰 천을 에아의 손목에 칭칭 감아 묶어주자 금세 기분이 풀려 히죽히죽 웃어댔다. 제마의 품에서 벗어난 에아가 당당히 허리에 손을 얹고 외쳤다.
"그럼 이번엔 에아가 술래!"
"그 술래잡기에 아빠도 껴도 돼?"
땅에서 솟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지구가 에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언제 어디서나 불쑥불쑥 나타나는 부모님에게 적응한 쌍둥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반겼다. 어서 와! 어서 와요. 자신의 색채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환영인사에 지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손목에 흰 천을 감은 에아가 지구의 손을 잡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에아가 술래야. 아빠도 엄마랑 같이 도망쳐. 대신! 아빠는 엄마랑 한 몸 해. 떨어지기 없기! 삐이, 하는 입 소리를 내며 양 팔을 교차해 가위표를 만든 에아가 그의 손에 제마의 손을 쥐여주었다. 딸이 이어준 손을 꽉 맞잡은 부부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럼 그럴까?
까르르, 잔디밭 위로 맑은 웃음소리가 겹쳤다. 찬란하고 맑은 여름의 햇살이 대지 위의 작은 여름을 기쁘게 비추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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