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13

조화

탕 > 모나

변두리 by 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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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여자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법일세.

거나하게 취한 놈의 말이었다. 그 말을 남기고 까무룩 잠들어버려 그 말에 동의한다고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파티에 와서 사교고 뭐고 대뜸 술부터 마시더니 아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더니 밤낮할 것 없이 책상머리에 앉아있질 않나, 집안일은 뒷전이질 않나, 아주 죽겠다며 앓는 소리를 늘어두었다. 들을 가치라고는 한 톨도 없는 소리였지만 유일하게 쓸 만한 말이 있다면 유언같은 저 말 하나뿐이다. 글 쓰는 여자는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래서 글 쓰는 여자들은 무섭고 아름답다. 편면처럼 납작한 이 세계, 이 시대에서 입체적인 사람이라 한다면 응당 편면 위를 펜으로 노니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레몬은 지팡이를 짚고 중절모를 쓴 채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광장은 작은 가판대들이 줄지어 평소보다 소란했는데, 현수막으로 보건대 자선행사가 열린 모양이었다. 집에서 만든 비누나 인형, 목도리와 장신구를 팔아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레몬은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고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아닐지도 모르지만―사람과 함께 다시 오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시장 한 구석, 양철통에 담긴 꽃에 시선을 빼앗긴다. 토마토 소스 캔을 재활용한 것인지 색과 글씨가 화려한 통이었다.

‘페리윙클, 블루벨, 수선화에 프림로즈?’

죄다 영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봄꽃들이다. 작약이나 모란은 고사하고 장미도 없는 꽃집이라니. 꽃은 수수하고 통은 화려하군. 그 기묘함에 한참 가게를 쳐다보고 있자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여성. 베이지빛 앞치마를 꽉 맨 채 약간 피곤해보이는 안색을 한 여자. 마치 누군가처럼.

“봄이 한창이군요.”

“시간을 잘라 올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시적이군. 레몬은 더더욱 이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가 길고 피곤한 눈매에선 미처 다 지우지 못한 온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뺨이 통통해서 어린 느낌까지 주었다.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해 세월이나 연식이라고 불리는 손때 탄 총기는 부족했다. 그것이 좀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무례임을 자각하기엔 너무 짧은 상념이었다.

아, 그 차분한 눈이 감정으로 들끓을 때 간극이란. 붓기가 빠진지 얼마 안 된 자신의 뺨을 의식하며 레몬은 허리를 굽혀 블루벨을 살폈다. 아직 봉오리에 불과한 것들도 섞여 오히려 보기 좋았다. 말 그대로 숲 속 어딘가를 잘라온 것처럼 말이다.

“덜 핀 것과 섞은 꽃다발도 되나요? 아가씨.”

“물론이죠.”

봉오리가 섞인 꽃다발을 받은 뒤 거스름을 받지 않는 사치를 부리며 레몬은 광장을 떠났다. 덜 여문 녹색을 손 안에서 흔들며. 이 꽃다발은 어떻게 될까? 버려질까? 아니면 길러질까. 혹은 잊힌 채 천천히 죽어갈지도 모른다. 이 봉오리에서 꽃을 피워달라고 하면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할까. 한 대 더 맞아볼까.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려 할까. 그것만은 싫은데. 역시 꽃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해봐야지. 그 문장들을 써냈던 손으로. 물을 갈고 햇빛을 보여주면서. 수수하기 짝이 없는 봄꽃을 보며 이따금 내 생각을 해주면 참 좋겠는데. 어울리지 않아서 좋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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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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