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mesis

Nemesis (3.5)

May or may not be for revenge

변두리 by 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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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그 기사단장이라고?’

지금이야 그 사람이 기사단장이든 나발이든 아무래도 좋지만, 그땐 그랬다. 그땐 그랬다는 말이 참 듣기 싫긴 하지만. 아니 사실 페힌의 기사단장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평민 출신 기사단장이 천재라니.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나라 최고의 기사가 되었다니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선 평민이 기사단장을 단 것은 기백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신기할 수 밖에. 나는 그 나이에 겨우 기사 서임을 받아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술병에 걸렸던 터라 그와 저를 비하는 것조차 머쓱할 지경이다. 당시 스물 셋이었던 나는 이 세상에 그런 인간도 있구나, 하고 여기는 한편 과장된 소문이라고도 여겼다.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썩 권장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스물 일곱을 먹고 두 계절쯤 지났을 때 옆 나라 기사단장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사단장이라는 자리는 도통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의아해했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였으니 다들 왜 그랬을는지 유추하며 너도나도 말을 얹었다. 사람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나왔는데 개중 미쳐버렸다는 추측이 그럴 듯 하다 생각했다. 보통 천재라는 사람들은 단명하거나 금세 이지를 잃거나 하지 않는가? 혹은 처음부터 미쳐있었거나. 미인은 박명이고 천재는 불운하다 했다. 어릴 적 들었던 구전설화나 신화를 봐도 온통 그런 천재들뿐이었다.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태어나 일찍이 영광을 누리다가 신의 질투를 받고 몰락하는 것. 성인이 되고 나니 그 기사단장의 소문이 마치 그런 이야기들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권태롭기까지 했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건대 그 무렵 나는 결혼을 목전에 두고 약혼이 엎어져 안쓰러운 취급을 받는 바람에 다소, 꽤, 염세적인 청년이었던 것 같다.

너도나도 말을 얹었다는 것의 뜻은 옆 나라 기사단장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과도 같았다. 식사자리에서 가볍게 떠들기 좋은 이야깃거리. 딱 그뿐이었을 텐데 어쩐지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그의 검이 파랑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언젠가 꼭 한 번 그 검을 보고 싶었던 터라 몹시 아쉽게 된 까닭이 컸으리라.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만큼이나 아름답다던데. 그런 군소리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상상해볼 만큼.

그리고 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애초에 기사를 썩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기사가 저와 잘 맞지도 않았다. 단지 유일하게 재능있는 일이 검 잡는 것이었고 그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직업이 기사였을 뿐이었다. 겸사겸사 사람들도 좀 도울 수 있는 일인 것 같았고. 그러나 막상 기사가 되고 나니 명예가 목숨보다 앞서는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명예는 목숨에 선행하는 것인가? 제아무리 기사도를 배우고 익혀도 그것에 쉽사리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살아있어야 뭐라도 하지 않나. 신의 품 속에 있는 것이 그토록 거룩한 일이라면 명예는 어느 정도 확보된 일이니 구태여 나서서 챙기려들지 않아도 된다. 죽음이 신의 품 속으로 가는 일이 아니고 단지 모든 일의 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명예보다 목숨. 이것이 내게 있어 명확한 진리였다. 나의 명예가 나의 목숨에 선행할 수 있다 한들 나의 명예가 타인의 목숨에 선행할 수 있는 일인가? 타인의 목숨만을 희생시켜 얻은 명예가 정녕 명예로운 것인지. 설령 그렇다면 어째서 나의 명예가 나의 목숨에 선행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일이 기사란 것인데…….

넌지시 이런 서두를 꺼내면 다들 기함하기만 하니 기사란 것과 자신이 애초부터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결심이 서자 단박에 기사를 때려치웠다. 하여튼 대책 없는 새끼. 그 앞뒤없는 행적에 가장 친한 동료가 남긴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놈이 기사로 더 있어봤자 그 일을 모욕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기사도를 내게 수용할 수는 없어도 존중하는 법은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하나였다.

“저 감시자 됐는데요.”

땡강. 양아버지가 나이프를 떨어트리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 제기랄. 단란한 저녁식사시간에 할 얘기는 아니었나 보군. 희망사항도 아닌 통보에 이윽고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잠깐 견학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거기서 눌러붙어 살 심산인 아들 놈을 보며 부모님은 거의 기절할 기세였지만, 장성한 양아들이 하겠다는—심지어 범국가적 평화를 위하는—일에 대뜸 어깃장을 놓을 수는 없을 뿐더러 이 불효막심한 놈은 한 번 결정한 일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기에 끝내 막아서진 못했다. 이런 장남을 둬서 참 피곤하시겠수. 농담이랍시고 티타임 때 이런 말을 했다가 티팟으로 얻어맞을 뻔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의 걱정을 마음 깊이 묻지는 않았더랜다.

“소냐 오라버니. 죽으러 갑니까?”

집안의 막내가 제 손을 꼭 잡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떠날 때까지 그랬을 텐데. 이 애가 아장아장 걸을 때쯤 저는 이미 집에 없다 못해 기사 노릇에 이골이 나 있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제게 별다른 정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피도 이어지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러나 이 막냇동생의 눈에는 걱정이 아롱아롱했다. 우스갯소리처럼 넘기려다가, 문득 이 다정한 아이에게 자신을 해명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다.

“죽을 수도 있지.”

“…….”

“하지만 그건 기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어. 오라비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가는 거다.”

“말레이냐 언니가 원래라면 오라버니가 가문을 물려받아야 한다구 했습니다. 가문 일이 많이 어렵다지만 그래도.”

“어유, 말도 마라. 이 대에서 가문을 끊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러겠니. 좋아하는 일이 아닌 일을 오래 할 수는 없는 법이야.”

“결국 위험한 일을 하시겠단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이것만은 닮지 말아다오. 우리 강아지는 말 잘 들을 거지요?”

얼러보려고 꺼낸 말인데, 그 말에 솜사탕 같이 퐁실하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러더니 곧장 ‘바보똥개멍청이! 내가 큰오라버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다 취소할 거여요 진짜 꼴뵈기 싫습니다 아낀다더니 내 말은 들은 체도 아니하는 이 몹쓸 오라버니! 바보! 진짜 바보!’ 하고 바락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성질머리를 보니 내 동생이 맞네,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옆에 있던 말레이냐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며 궁상맞은 변명을 했지만 떠나는 날에는 결국 딸 뻘인 막냇동생을 울린 놈이 되었다. 천하에 다시 없을 못된 놈팽이가 된 기분에 자주 편지하겠다는, 그로서는 드문 약속을 건네고 집을 나섰다. 그것이 서른의 일이다.

하여튼 간에 이런 곰살맞은 사건을 배경 삼아 감시자가 된 것이다. 감시자가 된 후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무리는 이상하게 신입들에게 너그러웠다. 적응도 못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살살 편의만 봐주는 것도 아니었다. 마법사가 많았고 칼잡이는 더 많았다. 기본적으로 뭘하든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인 것과 달리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수련과 대련에 매달리고 있었다. 본래 있던 곳에서 이런 분위기였다면 이틀 내로 팔할은 꽐라가 되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또 윗세대로 갈수록 어딘가 결여된 사람들만 있었는데 그들끼리의 신뢰는 두터웠다. 영혼까지 비쩍 마른 눈을 하고서도 저렇게 온정적이라니. 오, 정말 이상한 사람들 투성이군.

그러나 이러한 감상은 처음 마물을 죽일 때 박살났다. 아하. 당연하지. 이따위 것들을 상대하다 보면 다들 맛이 가기 마련이다. 아니. 맛이 가야 한다. 이런 것들만 마주하니 당연히 강해지고 싶지. 제기랄. 마법이 저런 식으로 전투에 쓰이는 걸 알았으면 나도 마법이나 배울걸. 검 세 자루만큼 거대한 송곳니를 가진 마물을 막상 마주하니 헛웃음이 터지지 뭔가. 이런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렵다기보단 황당했다. 그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건 내가 있던 세상이 연약해빠졌다는 어떤 사실이었다. 이런 마물이 자주 나옵니까? 라는 말에 종종, 이라고 대답하던 베테랑 선임의 낯. 이보다 못한 마물들이라도 일반 민가로 쏟아지는 순간 끝장나고 말겠지. 이백년 전이니 백년 전이니 하는 말들이 퇴색된 역사가 아니라 생생히 실재하는 위협이라니. 정말이지 개같은 세상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세번째 임무. 봉인을 살피러 중앙에 깊숙히 들어가는 임무가 아니라 주변부의 마물들을 적당히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감시자란 족속들은 들어온지 오년은 지나야 신입 딱지를 떼주는 극악한 연차제를 택하고 있어서 그 임무에는 꽤 신입이 많았다. 감시자가 된 지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낯선 얼굴이 있다니. 이러다 영영 말 한 번 못 터보겠다 싶어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서기 앞서 이리저리 인사를 건네고 다녔다. 그러다 마주한 것이다. 그 사람을.

“소르힘이에요.”

“그래.”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얼굴의 흉터였지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 목소리였다. 나직하고 낮고 부드러운. 밤바다를 닮은 머리카락과 속눈썹 아래 그림자 진 눈동자는 언뜻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표정이 굳어있었기에 그 이상을 알긴 어려웠다. 어지간히 무뚝뚝하고 어쩌면 침울할지도 모른다고 소르힘은 느꼈다.

“당신은요?”

“네멜린 힐.”

그가 네멜린 힐이라는 걸 알고서부터는 첫인상따위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제기랄. 어쩐지 머리카락이 검푸르더라니.

전투에 들어가기까지 소르힘은 내내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 이가 페힌의 그 기사단장이러니. 난무하는 가십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그 사람이라니. 어쨌든 지난 날 자신이 무엇을 상상했든지 간에 지금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었으리라. 소르힘은 저토록 검푸른 머리카락을 몰랐고, 저런 식으로 빛을 내는 눈을 몰랐고, 저렇게 짓는 표정도 있음을 몰랐다.

그러니까 그는 제게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죄다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말뿐이라 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벅벅 지워대며 이번 임무에서라면 그가 검을 쓸 테고 대단하신 실력을 보게 되겠거니. 그렇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토록 어리석은 일이 또 있었을까. 세상의 어떤 부분은 아는 순간 영영 돌이킬 길이 없다. 그의 검이 그런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검에 대해서 안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검은 파랑과 해일이라는 광대한 수식마저 모자랐다. 살육의 현장에서 피어난 검푸른 궤적에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는 단지 거기 있을 뿐이었는데 내가 나를 잊어버린 것이다. 단순한 임무였고 마물들이 강하지 않은 축에 속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때 죽었으리라. 그만큼 나는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전투를 끝마치고 검을 내렸고, 세상의 어느 부분이 다시 까무룩 잠든 것만 같았다. 이윽고 바다가 내게 걸어왔다.

그 이후로부터는 지지부진한 감정의 연속이었다. 네멜린 힐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수록 그녀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졌다. 단지 네멜린이 검을 들어 나를 상대할 때에만, 오로지 그때에만 그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뭔가 하나쯤 나아진 구석도 없이 대련을 신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자연히 수련에 매진했다. 이런 불순한 마음가짐이라니. 기사를 때려치우길 잘했지. 아니, 뭐, 오히려 감시자란 족속들이 기사보다 더 도덕적인 면도 있다만은. 아. 모르겠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감시자 놈들이 실은 죄다 지독한 연심을 품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시자는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 지독한 수련을 매일 해댈 수가 있는 건지. 정말 다 미친 게 틀림 없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치지 않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에서. 술김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밝혔더니 주변 녀석 셋이 눈이 벌게져서 달라붙었다. 제기랄. 입은 왜 언제나 방정이지. 결국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이고 검사라는 것까지 말해야만 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던 것이 마주할 때마다 내 눈빛이 달라진다는 후보가 총 셋이었는데—셋이나 되다니 내 눈빛에 무슨 문제가 있나—그 중 여자 검사는 네멜린 힐뿐이었기 때문이다. 와하하. 빌어먹을…….

그렇게 3년. 결국 지엄하신 마법사 어르신까지 붙들고 토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로 지엄하냐 하면은 백 년간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을 사람이라고나 할까. 눈만 봐도 그게 보였다. 뭐, 당신의 연애사야 어찌 됐건 남의 연애사는 무엇이든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상대를 붙잡고 혼자 넋두리를 죽어라 했다. 속엣말을 줄줄 털어놓다보니 결심이 섰고. 물론 답이 생겼다는 것은 아니다. 이건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지.

지지부진한 3년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무슨 일을 질질 끄는 건 처음이었다. 남들 앞에서 밝힌 이상 아무리 늦어도 네멜린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했고 무례한 일이 되는 것 역시 뻔했으므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본부 뒤편의 숲 중앙. 호수 옆 떡갈나무 밑에서 기다리겠다고. 그 말을 전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겨웠던지.

“소르힘. 무슨 일이지.”

숲을 헤치며 걸어오는 네멜린의 낯은 평소와 같았다. 그 낯을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한 번이라도 그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도. 소르힘은 잠시 침음하다가 잘 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내가 왜 당신을 여기로 불렀는지 알아요?”

“할 말이 있어서. 아닌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아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긍정도 부정도 아닌.

“좋아한다고요. 그거 말하려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뭐?”

자꾸만 처지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네멜린은 인상을 찌뿌린 채로 눈썹을 뒤틀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보이는 표정. ……설마. 아니. 진짜? 정말로 몰랐다고, 3년 동안? 3년 간 내가……내가 한 게 없나? 그럴 리가 없는데. 눈빛이 다르다고 했는데. 아니 눈빛이 문제가 아니라. 일부러 꽃을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정말 몰랐다고? 내, 내가 한 게 그냥 죄다 공갈협박이었다고?

몰아치는 충격에 소르힘은 넋이 나간 얼굴을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통을 터트렸다.

“제기랄!”

소르힘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폭풍우치는 숲의 가지처럼 생각이 엉키고 꼬이기라도 하는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뒤늦게 깨닫곤 화들짝 놀라 네멜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네멜린은 상처받거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의, 수심에 잠긴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시체처럼 무결한. 그 표정을 볼 때마다 소르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서리가 맺혔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영영 짓지 않았으면 했다. 또 그러면 좋겠다고 말할 자격을 내게 주었으면 했다. 어쩌면 이 마음의 전부가 그뿐일지도 몰랐다.

“알고,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죠. 네멜린.”

“……그래.”

“내 고백을 받아주지 않을 거고요.”

“응.”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을 거죠?”

소르힘의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고 네멜린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떤 선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답을 들은 것과도 같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네가 그런 마음을 접었으면 좋겠다.”

“……네멜린.”

“나는. ……아니. 무슨 말을 하든 변하지 않을 테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뜻이지.”

네멜린이 확언하자 소르힘의 낯에서 핏기가 가셨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 같은 사람처럼. 그는 입 안의 살을 깨물다가 오기에 젖은 청년처럼 중얼거렸다. 진심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

“입맞춰주면, 그럼 그렇게 할게요. 정말로.”

한 번의 입맞춤으로 마음을 청산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계약이기도 했고 부탁이기도 했다. 당신이 내게 입맞춰주기만 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이 답도 없는 마음을. 그래서 그는 그녀가 제게 입맞춰주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르힘은 드리운 침묵에 속절없이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고, 네멜린이 그러겠다 조용히 답한 것을 듣지 못했고, 그녀가 마침내 제게 입맞췄을 때에야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이 입맞춤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약속을 지켰으니 저 역시 그러할 테고, 또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서글퍼야 마땅할 텐데 남자의 속에선 섧음 대신 희열이 짜릿하게 스쳤다. 구걸해서 얻어낸 한 줌의 숨결에 남자는 매달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물리고 더운 숨이 교차하면서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남자도 못 박힌 채 서 있었다. 그러나 입맞춤은 짧지 않았다. 그들이 나눠 마실 숨이 부족할 때까지 이어졌으므로.

그리고 네멜린은 미련 없이 몸을 물렸다. 소매로 입가를 닦고 약속 지키라, 그 말만을 남긴 채 저를 일별했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왔을 때처럼 갔다. 소르힘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나무 등치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는 결코 네멜린처럼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숲을 나왔을 때는 3년의 짝사랑을 마무리지은 후였다. 소르힘은 네멜린 힐에게 여전히 먼저 말을 붙였고, 종종 대련 신청을 했고, 자주 밥을 같이 먹자 권했으나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생사를 넘는 순간에서조차 약속은 굳건했다.

소르힘이 8년차가 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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