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mesis(3)
For whom the revenge is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
누군가에게 허락되지 못한
감정은 자라나는 법일까? 만일 그렇다 한들 무엇이든 키우는 순간 의무와 책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릇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고 그 또한 책임의 일환이다. 갈대밭 마을의 골목대장이 네멜린 힐이 되었고 네멜린 힐은 계속해서 네멜린 힐이어야 했듯이. 네멜린 힐은 어쨌든 책임지고자 했으나 도저히 이름 붙이지 못했고 결국 책임지지 못한 채 감정은 자라났다. 한여름 양달에서 핀 꽃이나 응달에서 소리없이 퍼진 이끼처럼. 이름 없이도 어떤 것들은 자라났다. 온 마음을 다 덮어버린 놀라운 성장을 네멜린 힐은 방기했다. 과하게 자라 바위를 파괴하고 주변을 죽이고 물을 썩힌다한들 다듬거나 붙잡는 손은 없었다. 정신에 무엇이 깃들거나 새어나가도 행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고 그럼 그것으로 된 일이었다. 아무래도 좋진 않았다. 그에게는 분명히 바라는 것이 있었고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바람이 무척 난해함을 알았다. 사람은 너무 쉽게 죽으니까.
자신이 도망친 것인지 향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소문보다 그가 빨랐고 그래서 국경을 넘고 나서부터는 말 섞을 일도 없었을 뿐이다. 그가 일부러 인적 드문 길을 선택한 까닭도 있지만 이방인에게 끈질기게 말을 붙여오는 종자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무르익은 여름은 낮이 길었고 그만큼 사람들의 일거리도 많았다. 남루한 행색에 무장까지 한 여자를 오랫동안 따라다닐 만큼 한가하고 넋빠진 놈들은 없었고, 설령 있다 한들 귀가 잡혀 밭일로 끌려 갈 따름이었다. 의도된 무관심에 편승하여 헛간 한 켠을 빌려 잠을 청했고 우마차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발을 쉬었다. 어둠 한 쪽을 떼 와 모포처럼 둘렀다. 그는 상념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으며 따라서 말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언제 한 번은 말하는 법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기도 했다. 아니. 그때는 실제로 말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을 보내자 언어는 돌아왔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지 못했다. 고작 한 계절, 여름의 품 속에서 네멜린 힐은 빠르게 닳아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누구에게 다행인지 모를 나날이 흘렀다.
어디로 가시오? 북동쪽. 어디서 오셨길래? 페힌. 에잉. 길을 잘못 드셨구만. 여긴 페힌의 동쪽이요, 동쪽. 여기서부터는 북쪽으로 쭉 올라가셔야겠는데. 그러면 그는 고작 말 한 마디로 그렇게 했다.
방향을 잡는 것이 숨 쉬는 것만큼 자동적인 행위가 되었을 무렵. 그렇게 되기까지 길을 몇 번 잃었는지 셀 수 없다.
페힌에서 멀어질수록 계절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분명 초여름에 출발했는데 그는 아직도 초여름에 있었다. 계절이 찾아오는 것보다 사람이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을 텐데. 북쪽으로 이동할 수록 점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숲이 아니라 고향으로 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는 아직 그 침실에 틀어박혀 상상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고국을 떠나는 상상을. 그나저나 동쪽이라니. 숲을 향해 갔을 텐데, 갈대밭 넘은 동쪽이라니…….
어째서 인간은 툭하면 길을 벗어나는가. 왜 정도는 주어지지 않는가? 인간에게 나침반은 내재되지 않은 까닭은 또.
어디로든 가기 위해선 몇 번이고 길을 잃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는 것인지 또 다시 길을 잃은 것인지 똑똑히 구분하는 일은 방향을 잡는 능력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 사실이 네멜린 힐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흘을 꼬박 샌 것은 그래서였다. 잠에 드는 순간 기껏 옳게 잡은 방향을 다시 놓칠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것을 세지 않았는데도 불안이 귓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다녔다. 여름이 지나기 전에 숲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강박에 단단히 사로잡혀 그는 쉬지 않고 걸었다. 답이 없어서 끝나지 않는 질문에 천착했듯이. 산적이나 들짐승, 심지어 피로조차 그를 멈추지 못했다. 장애물은 그의 아집 앞에서 생래적으로 아예 기능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닌 피를 개울에 씻을 때에만 눈을 감을 뿐이었다.
소문이 무성한 것과 달리 숲은 제법 고요했다. 그러나 그 평온을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감시자들이 전부 송곳같지는 않았지만 각자가 각자의 날붙이를 쥐고 있음은 명확했다. 네멜린 힐은 신규 감시자로서 한번씩 눈도장을 찍으러 다녔고 이 정도면 따라붙는 시선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래된 마법사의 무정한 여상스러움. 나이든 감시자의 차가운 넉살. 묘지기 감시자의 음울한 태도. 무엇이든 그에게 가닿는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눈들이 고깃값을 잰다 여겼고, 그것이 딱히 틀렸다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고깃값을 하기로 했다. 그들이 실제로 값을 매겼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살아라. 살아남으라. 결국 그런 말들. 세계의 끝이자 맹점이자 역린인 이 숲에서도 결국 언제나 삶이 문제였던 것이다. 생존을, 그 억척스러움을 요구받았지만 네멜린 힐은 살의를 다듬었다. 대신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처음 마물을 보면 겁에 질리거나 뒷걸음질친다던데 그는 그들이 못내 반가웠다. 살아남는 것이 그의 순위에서 다소 밀려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 분명하게. 그래서 그는 그 스스로를 서슴없이 휘둘렀다.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면, 그건 분명히 죽이는 일이었다. 죽이는 일이 결국 살리는 일이 되었다. 이 일이 그런 형태였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죽였다. 결국 살리는 일이 된다한들 그가 사람을 구한 적 없음은 이때문이다. 우연, 혹은 필연으로 그가 살의를 품은 대상이 마물이었기에 벌어진 일로써 구명은 부산물에 불과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살해에만 몰두했다. 모든 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필사적으로.
그는 줄곧 피륙을 가르고 혈관을 터트렸다. 심장에 칼을 꽂고 눈알에 단도를 던지고 화살을 뽑아 입천장에 쑤셔넣었다. 여린 점막에 꽂힌 날붙이로 괴로워하는 마물을 보며 네멜린 힐은 해방감을 느꼈다. 아. 그 기이한 해방감.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애초에 그를 붙잡는 것이 있긴 했던가. 끌어내던 그 손들은 자신을 미련 없이 놓아주지 않았던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그즈음 네멜린 힐은 더이상 왜를 묻지 않았다. 단지 떠올릴 뿐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로써 그는 편안해졌다. 살육은 불편의 조건이 아니었다. 아닐 수 있었다. 네멜린 힐은 이렇게 한 발짝씩 죽음으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아아아악!”
얼굴 반 쪽의 상실. 네멜린 힐은 그렇게 안락한 살해로부터 뜯겨 나갔다. 그는 분명히 한 자루 검이 되고자 했다. 칼날로 살다가 부러지면 그만이라 여겼다. 양심도 도덕도 없이 뻔뻔스럽게 그것을 바랐다.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소유마저 태워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러진 것은 검이었고 사람이 남았다.
감시자들은 필사적으로 네멜린 힐을 살렸다. 네멜린 힐조차 살렸다. 그만이나 제발. 혹은 싫다는 애원에도 그들은 치료를 멈추지 않았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력은 그에게 곧 고통이었다. 그릇이 없어 힘은 그의 몸을 통과했고, 예외의 사태에 마법사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무수한 힘은 티끌처럼 미약해졌고 오로지 그 힘 아래 수반된 것만이 그에게 남는 것 같았다. 순수한 고통은 정신을 표백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떤 것들이 변해 있었다. 또, 라고 말해야 할 만큼.
나이 든 감시자가 죽었고 오래된 마법사는 더욱 침잠했다. 가릴 것 없이 많이도 죽었다. 네멜린 힐은 또다시 비극이 지나간 땅에서 숨을 들이켰다. 여자는 생각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 힐에게 책임이 있다. 기회는 가버렸고 그는 여기 남았다. 가라앉는 일이 앞에 놓였으므로 남은 눈으로 숲을 응시했다. 숲의 그림자와 그 땅 아래 있을 것까지 남김 없이.
그러니까 네멜린 힐은 죽을 수 없었다.
아직은.
그가 붕대를 전부 풀 때쯤 신규 감시자들이 들어왔다. 감시자로서 신입이라는 것이지, 사회생활 그 자체가 처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종종 그런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딘가에 있다가 왔다. 지역도 나이도 천차만별이었지만 감시자가 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면접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사령부에 대한 믿음으로 모두가 신규 감시자들을 공평하게 대했다. 그 중에서도 손발에 갑과 사슬을 찬 사람이 눈에 띄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그는 하관이 겨우 보였지만 가끔 빛이 들 때면 수풀 사이의 유리처럼 눈이 반짝였다.
죄수 같은 모습을 한 그는 레녹스라고 했다. 숲에 들어 온 이래 정보가가 아닌 일화로서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빈 자리를 채우듯 신입이 줄지어 들어왔고, 그 가운데 수족갑을 찬 이가 있었고, 자신은 그에게 다가가 자기소개를 했다는 그 간단한 사건 나열을 네멜린 힐이 드디어 기억했다는 뜻이다. 상당 부분 잊어버릴 테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기억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자신을 네멜린 힐이라고 소개한 그 순간 어쩐지 등골이 선득했고, 그날 밤이 되어서야 힐은 자신이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신입이나 다름 없는 상태라는 것 또한.
그런 까닭에 네멜린 힐은 잠들지 못했다. 동도 트기 전에 본부 주위를 거닐고 숲 경계를 살피다가 우연찮게 레녹스를 만났다. 둘 다 숲이 몹시 낯설었기 때문에 우연한 산책은 그대로 습관으로 굳었다. 이따금 순찰을 돌다가 그와 대련을 하기도 했다. 본디 대련이라는 것이 다치는 게 예삿일이라 마법사들에게 상처를 보여주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그와의 대련은 마법으로 인한 통증에 적응하는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영구한 비밀은 없다. 결국 피를 본 날, 그릇이 없다는 걸 들켰고 신성력은 엿 바꿔 먹었냐는 쓴소리를 들었다. 왜 네멜린이 신성력 소유자를 눈 앞에 버젓이 두고도 자꾸 1년차가 안 된 마법사만 찾아다녔는지 레녹스가 알게 된 까닭에 한동안은 그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레녹스는 숲에 익숙해졌고 그 역시 비슷한 정도로 익숙해졌다. 적어도 네멜린 힐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숲 한 구석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가 사령부와 의무반에게 동시에 혼나는 일도 있었다. 혼내는 사람으로 둘러싸이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그것은 레녹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부턴 신경쓰지.”
“안한다는 말씀은 왜 안 하십니까?”
“…….”
“아. 장담을 못하시겠다? 댁들이 부뚜막 오르는 얌전한 고양입니까? 제기랄. 얌전한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아니 왜 자꾸 사고를 치는 거냔 말입니다!”
솜털도 안 빠질 정도로 어린 사령부원이 빽 소리를 쳤고, 레녹스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네멜린 힐은 웃음을 터트렸다. 숲에 들어오고 2년이 지나서야 처음 터트린 웃음이었다.
“웃어?”
물론 그것이 면피가 되어주진 못했다. 웃음의 대가로 그는 장장 2시간을 더 시달려야 했다.
**
네멜린 힐이 깜빡할 때쯤 임무가 찾아왔다. 단련과 대련을 반복하고 서류와 행정처리에 일손을 살짝 거들 때쯤과 비슷했다. 숲은 주기적으로 불안정해졌다. 그 주기가 언제 찾아오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어쨌든 근미래 안에 반드시 한 번씩은 그렇다고 했다. 숲은 누군가의 목숨을 거둬가지 않고서는 유지되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기색이 탐지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색대가 꾸려졌다.
“소란스러운 바람이군…….”
나무를 닮은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결계 아래 보호받는 처지인 모두가 그 말을 들었을 터였다. 네멜린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숲에 들어왔으니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돌릴 만한 것이 마땅히 없었다. 저 마법사는 짐승처럼 시선에 예민했다. 마법사가 검을 쓰는 것도 우스운 모양이지만 막상 검과 지팡이를 쥔 그를 앞에 두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여튼 네멜린은 그런 그와의 접점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한 세기는 족히 살았을 거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네멜린 힐은 모든 마법사에게 미비한 유감을 가졌으나 강한 마법사에게는 특히 그랬다. 문제가 있다면 오래된 마법사는 지나치게 강했다는 점이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툭 튀어나온 사감이었고 힐은 그것이 아주 불쾌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듯 곤두서야 한다는 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어느덧 그가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데 선수였다는 것이고, 운이 좋은 점은 마법사는 네멜린 힐의 상태 아닌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 정도. 그래서 그 누구도 네멜린이 그런 불순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 이렇게 종종 그와 임무를 나올 때마다 그의 마법을 목격했고, 그 싯푸른 기적은 삿됨을 멸했기에 네멜린 힐의 사감을 억누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백 년 묵은 마법사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몰랐다.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마법들을 실은 숨쉬듯 행할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게 있어 힘을 실은 마법이란 감히 마법불능자가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저 끝 모를 나무만치 높이 솟은 마물이 진영을 유린했고, 검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무릎 꿇릴 수 없었고, 일반 마법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산은 짧았고 명은 하달되었다. 진영이 갖춰지자 오래 된 마법사가 전력을 쏟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네멜린은 저 마법사에 대해서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 자인지 눈 앞에 두고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네멜린 힐은 검을 꽉 붙잡아야 했다. 단신으로 펼치는 저 황홀한, 규격 외의 마법진 앞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서. 잡거나 느끼거나 읽을 수조차 없었지만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일그러지는 공기의 흐름. 마침내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선 그 순간.
“내리꽂히라.”
말맺음과 함께 빛이 화살비처럼 마물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 화살 하나하나가 창처럼 커다랬다. 신의 심판이 현재하는 풍경. 세상이 번쩍였고 거대한 마물이 몸을 비틀며 스러졌다. 마치 동산 하나가 우르르 무너진 것만 같았다. 빛이 있었으므로 모두가 홀린 듯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단 한 명, 네멜린 만큼은 그를 직시했다. 호전적으로 웃으며 전력을 쏟아붓는 무방비 상태의 마법사를 죽이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 네멜린 힐은 온 힘을 다해 살의를 억제하고 있었다. 그는 마법사가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을 처음 보았고 그 사실이 자신의 이성을 압도하려 들었다. 그가 마물을 죽였음에도, 아니, 죽였기 때문에 바다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빠드득. 검 손잡이가 힐의 악력을 못 이기고 헛돌기 시작했다.
그래. 이 숲.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었고 그는 무덤 속에서 100년을 살아 숨쉬었다. 이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겠나. 그리고 실제로 그는 지축을 뒤흔들었다. 빛이 번쩍였고 대지 위에서 태양을 지워버렸다. 그런 자가 자신과 같은 사람일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그만한 힘을 가져선 안 됐다. 세상의 법칙은 냉엄하여 정도 이상의 힘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했다. 하여 흑마법은 인간에게서 인간을 박탈하는 무엇이었고 그럼 결국 저 자 또한…….
아직 기회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뛰어든다면 오 초 안에 그의 목을 베어낼 수 있다. 무리한다면 삼 초 내도 될 듯 싶었다. 적이 격파된 지금, 모두가 넋이 빠져 버린 바로 지금. 거대한 마법의 희열에 휩쓸린 그는 그 어떤 순간보다 방심하고 있을지 모른다. 뇌의 명령을 기다리는 육체가 긴장으로 팽팽히 당겨졌다. 딱 한 번. 결심하기만 하면 돼. 단 한 번이면.
그러나 결심하기 전에 먼저 눈이 마주쳤다. 저 녹음. 아득한 그림자. 켜켜이 쌓인 세월의 깊이. 힘이 다한 마법사는 주저앉았고 지켜보던 검사는 그대로 못 박혀 버렸다. 꼬리 긴 시선에 발등이 찍혔다. 검 끝이 힘 없이 내려앉았고 네멜린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케드라스.”
그 조용한 연호에 마법사가 지쳐버렸다. 꼭 그런 듯이 보였다.
그래서 결국 네멜린 힐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 뒤로 네멜린은 그를 피하지 않았다. 앞선 날들에서도 그랬지만 이젠 거리낄 것조차 없어졌다. 굳이 피하지도 또 굳이 마주하려 들지도 않는 순간들 속에서 네멜린은 그를 주시했다. 놓쳐버린 기회를 다시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판단이 서면 이제는 망설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으리라는. 그런 각오.
그러나 불운하게도―누구에게?―케드라스는 사람이었다. 주시와 관찰 속에서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멜린 힐은 맹목적일지언정 어리석지 않았다. 어떤 믿음은 반드시 의심을 선행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그를 의심했던 만큼 네멜린 힐은 이제 그를 누구보다 사람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어떤 희망이나 소원 따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조차 아닌, 단지 그냥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소린이 자네를 기다려.
그 말. 그 아홉 음절은 하나의 구결이었다. 어쩌면 계시였다. 그만큼 선명한 사람의 증명도 없을 것이다. 드물게 이성이 빗나간 마법사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고, 네멜린 힐은 그 목소리에 곧장 결심했고, 이번에는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더운 피가 왈칵왈칵 쏟아지는 가운데 발톱 사이에 걸린 뜻 모를 물건만이 그들을 반길 뿐이었다.
아, 제기랄. 사람이라니. 그가 사람이었다니.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부터 줄곧 그러했다니. 네멜린 힐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늘 그렇듯 변하는 것은 없었겠지만, 그는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는 사람과 똑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면서 한 세기 동안이나 여전히 사람이었다고. 그러지 않았든 그러지 못했든 그럴 수 없었든 간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니.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가 외친 것이겠지. 본인만 알고 있는 이름을. 정말 어쩔 수 없이.
네멜린 힐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납검하지 않고 마물의 시체를 들여다 보았다. 무언가를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 같기도 했지만, 그저 거기에 원래부터 있었던 사람 같기도 했다. 피와 살점을 밟고 선 채 태어난 여자처럼. 그러나 그곳에 의미는 없다. 으레 있는 살육일 뿐이다. 관절도 없이 땅을 기어다니는 오염체의 명줄을 끊는 일. 단지 그뿐이었다. 그 마법사가 이 명확한 사실을 헷갈릴 일은 없으니 그저 그는 헷갈리고 싶었던 것이다. 네멜린 힐이 그러하듯이.
그러니까, 빌어먹을, 사람이라고.
단지 그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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