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mesis

Nemesis (2)

For whom the revenge is

변두리 by 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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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깊고 아름다운 나의 네이디.

다소의 소란이 있고 난 후로부터 네멜린 힐은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시간이. 그러나 많은 시간이 딱히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역시 알았다. 단지 혼자 있을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을 뿐이지만 혼자 있을 때마다 네멜린 힐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견뎌야 했다.

장례식 대신 보고가 있었다. 네멜린 힐은 흑마법사와 긴밀한 사이였으므로 저택에 구금되었다. 그런 힐에게 수하들이 보고를 하러 왔다. 명목은 감시였지만 실상은 소식통 노릇이나 다름없었다. 거짓말 못하는 금발의 기사가 침울한 얼굴로 말을 전했고 거짓말 잘하는 적발의 기사는 종종 분통을 터트렸다. 힐은 멀건 낯으로 그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시체가 어디 갔느냐 묻지도 않았다. 어떻게 되었는지 이미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표정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수하들은 금세 털고 일어나겠거니, 그렇게 여겼다.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심문이 있었지만 자고 있던 힐을 사용인과 집사가 목격했고 급하게 현장에 도착한 그를 기사들이 목격했다. 잠옷에 로브 차림,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일관된 진술로 금방 혐의에서 벗어났지만 그가 다소 너그러운 수사를 받았음은 명확했다. 그 사실을 대부분 눈치채고 있었고 힐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왕이 혐의를 벗은 기사단장에게 잠정 휴직을 명했고 여론은 양분되기 시작했다.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대중에게 언제나 즐거운 가십거리였기에 또 다시 불이 붙었다. 귀족들이 이를 빌미로 어디까지 얻어먹을 수 있을지 각자의 주판을 두들기는 사이 왕은 기사단을 개편했다. 그것이 왕의 노림수였다. 논란 속에서 왕실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의 구분이 유명무실해졌다. 자연히 기사단장의 권한이 약해졌지만 힐은 여전히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세월. 시간은 사람을 두고 간다. 신에게는 시간이 의미 없다니 시간은 분명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인간을 초월한 최초의 발명품일 것이다. 피조물은 늘 조물주의 뜻 아래에 있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멀리 떠난다. 힐은 이제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후에 눈을 감기도 했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기도 했다. 눈을 떠서 해가 보이면 저것이 뜨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몰랐고 구태여 셈하고도 싶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그를 두고 아주 떠나버린 것 같았다. 시간마저 빼앗긴 것처럼 그는 거기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날 창문을 타고 온 왕의 밀언이 문득 떠올랐다. 추스르면 만나러 오라는 명령이 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추스른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실 힐은 크게 슬프지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무언가 종종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닮아 있었다. 물건을 던지고 창문을 깨부수고 나면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기나 했지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방을 치우겠다는 말이나 수하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하는 말들이 들렸다. 그러나 이제 대상이 자신인 말에는 도통 감흥이 일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지? 머리를 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힐은 자신의 머리를 똑 떼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아를 가졌음이 이토록 끔찍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또한 잠시의 감상에 불과했다. 힐은 식사를 거르지 않았고 자주 씻었다. 넉넉히 잠을 잤고 보이는 얼굴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추스른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 대체 내게 무엇이 더 필요해서? 힐은 이제 그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하자 시간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다시금 시간을 셈할 수 있었다. 생각은 시간의 초침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창틀로 여린 달빛이 흘러들었다.

힐이 몸을 들자 창 밖으로 밤바다가 보였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누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새 까무룩 잠든 모양이었다. 창을 열자 바람이 물씬 치고 들어왔다. 공기에서 여름밤 냄새가 났다. 꽃향기가 가고 바다짠내가 물큰했다. 페힌의 봄은 짧다지만 이렇게 가버릴 줄이야. 힐에게는 마치 하루만에 봄이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야속했다. 그러나 무엇이 서러운지 알지 못했다.

바다에 가야겠어. 그런 생각도 없이 힐은 몸을 움직였다. 며칠 만에 방 밖을 밟는지 몰랐다. 커튼이 바뀌었고 카펫의 색이 달라져 있었지만 힐은 그곳에 신경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삐걱이는 무릎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아니, 실은 달렸던가? 걸었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정신을 차리자 파도 소리가 들렸고 네멜린 힐은 맨발이었다.

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물이.

“아…….”

짧은 탄식. 이후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갔다. 밤바다의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분간하지 못했다. 첨벙첨벙 물소리가 아득하기만 했다. 높은 파도와 낮은 파도가 번갈아 쳤지만 여자는 굴하지 않았다. 이따금 버거운 듯 숨을 들이켰다. 헉, 허억. 입천장에 소금기가 달라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도가 바짝바짝 말랐다. 물이 허리까지 오자 잔잔한 파도만으로도 몸이 휘청거렸다. 힘을 주느라 밑바닥에 발이 푹푹 박혔다. 바다가 차오르는 것인지 자신이 물로 들어가는 것인지.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여기에 버린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수평선이 아직 까마득한데 얼굴까지 물이 튀었다. 아무리 걸어도 수평선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뺨을 타고 바닷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여자는 이곳이 들판인지 바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광막함. 어둠이 있고 달빛이 있고 파도가 있다. 손으로 파도를 헤쳤다. 그러지 않으면 걸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물갈퀴가 없으니까. 엉성하게 물살을 헤치는 손에서 반지가 달빛에 반짝였다. 검을 쥘 때마다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검사에겐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여자는 답지도 않게 불편함을 감수했다.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프로포즈를 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반지는 아무 죄책감도 없이 순진하게 거기 있었다.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그 사실이 여자의 울분을 터트렸다.

모든 일이 이 반지 탓이다.

그 생각이 일자마자 순식간에 반지를 빼서 멀리 내던졌다. 죄 없는 반지는 물에 빠지는 소리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손톱에 긁힌 상처가 쓰라렸다.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파도가 쳤고 여자는 휘청였다.

“왜! 왜 그랬어, 왜! 왜!”

이윽고 절규했다. 주먹으로 바다를 내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정이 전신에서 터져나왔다. 그 외침에는 메아리조차 없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여자는 휘청거리면서 계속 바다로 들어갔다. 해초가 다리를 감아 앞으로 넘어졌다. 유속에 휩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닷물을 코와 입으로 들이마셨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아무것도 없는 사방을 훑었다. 그렇게 볼썽사납게 넘어졌다가 켁켁거리며 침과 물을 뱉으면서도 여자는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외쳤다. 왜. 왜 그랬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고.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랬냐는 말과 너를 죽이고 싶다는 말이 함께 튀어나왔다. 두서 없는 말이 끝없이 흘렀다. 그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대답이었다. 참거짓,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말에 누군가는 반드시 대답해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고 여자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바다로 떠밀렸다. 절망과 분노, 설움과 간절함이라는 이름 아래.

“힐! 가지 마. 하지 마! 제발!”

몇 번 바다에 빠지고나서부터 여자는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더듬으면서 죽은 자를 입에 올렸다. 발을 딛는 것조차 이제 힘겨웠다. 그런데도 계속 나아갔다. 먼 바다를 꿈으로 삼은 아이처럼 무모하게. 모험을 떠나리라 신탁 받은 소년처럼. 마침내 어둠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다 내뱉지 못한 말이 바닷속에 잠겼다.

몸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곧장 정신이 흐려졌다.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물 아래는 고요하고 편안했다. 이대로 몸이 흐물흐물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삶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강하게 여자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목이 졸렸다. 싫어. 꺼내지 마.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억센 손아귀가 여자를 단단히 결박한 채 뭍으로 끌었다. 전신을 뒤틀자 곧장 내동댕이쳐졌다. 모래사장을 한바탕 구르자 중력이 온 몸을 짓눌렀다. 입에서는 계속 물을 토했다. 코가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바늘 한 쌈이 호흡기를 찌르는 것 같았다. 삶의 고통 속에서 여자는 한참 웅크려 있었다. 그 몸 위로 자비 없이 말이 떨어진다.

“운 좋은 줄 아시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쓸려 가버렸을 거요.”

뭍으로 짐승처럼 끌려나왔는데 내가 또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운이 좋다니, 누가? 그네들이? 혹은 내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의문이 소용돌이쳤다. 손발이 멀쩡했고 그 사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 깊은 물에 분명히 사라진 것만 같았는데. 그 사이 내가 또 무언가를 놓쳤을까?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떠오른 의문에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다.

“왜.”

다 쉰 목소리를 쥐어짰다. 탄식이 메아리처럼 옆에서 튀어나왔다. 귀족들이 고마운 줄 모른다지만 정도가 있지. 그런 중얼거림이 틀어박혔으나 여자는 아랑곳 않았다. 그 양을 가만 내려다 보던 이가 거친 손으로 웃옷을 덮어주었다. 뱃일을 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손톱이 짧았고 그물 잡는 굳은살이 있었다. 여자는 직감했다. 이 손이다. 이 손이 나를 끌고 왔다. 그물을 잡아 끌듯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살렸다. 나를 바다에서 건져올렸다.

“이 봐.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을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튕기듯 일어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네 개의 손이 뒤늦게 그녀를 붙잡았다. 여자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한평생 뱃일을 한 사람이 둘인데 여자 하나 붙잡는 것이 힘겨웠다. 발들이 그그극, 끌렸다.

“이런 씹, 무슨 힘이…….”

“작작 좀 하시오!”

호통을 치자 희미하게 여자가 흐느꼈다. 다 쉰 목소리는 저 깊은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반지를 잃어버렸어. 실수로 바다에 빠트려서. 내가 잘못한 거니 그것만 찾게 해주시오. 응?”

손이 허우적거렸다. 달빛으로도 왼손 약지에 남은 흔적이 선명히 보였다. 둘은 한참 침묵했다. 붙드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거절이었다. 여자의 몸짓이 조금 더 필사적으로 변했다.

“찾으면 바로 나오겠소. 당신들이 또 바다에 들어가지 않게 할 테니, 이것 좀 놓아주오, 제발…….”

바둥거림에 이를 갈아붙인 뱃사람이 버럭 소리쳤다.

“정신 좀 차려! 반지를 저 바다에서 대체 어떻게 찾을 건데?”

“밤바다를 우습게 보지 마쇼. 그거 찾다간 빠져죽거나 얼어죽거나 둘 중 하나요. 기껏 살린 목숨 버리려 드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소.”

“그래. 저 말이 맞아. 그러니까 이제 포기해. 못 찾아. 다시는.”

그 말에 여자의 몸부림이 뚝 그쳤다. 다시는 찾을 수 없다. 다시는. 그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인 사람 같았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거의 끌어안듯 붙잡고 있던 둘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몸을 놓았다. 여자는 버둥거림을 멈추고 꼿꼿이 선 채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거라도 됐나 보지. 검은 머리의 뱃사람이 눈짓하자 흰 머리의 뱃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해 뜨기 전 어둠 뿐인데 무엇을 지켜보는지 뱃사람들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갓 태어난 것처럼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을 알았다.

“고맙소.”

그러기를 한참. 여자는 웃옷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보기 짠할 정도였으므로 뱃사람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순순히 다시 옷을 걸쳤다. 여자는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 엉망인 낯이었지만 아주 침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그 눈빛에 흰 머리의 뱃사람이 몸을 흠칫 굳혔고 검은 머리의 뱃사람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잠시간의 침묵. 여자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뱃사람들이 먼저 떠났다. 흰 머리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네멜린 힐?”

흰 머리가 희미하게 중얼거리자 검은 머리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노망나셨어? 그 분이 여기 왜 있겠어? 그냥 미친 여자구만.”

따악! 억센 손이 놈의 뒤통수를 휘갈겼다. 버릇 없기는 어지간해야지. 혀를 쯧 차고는 검은 머리가 뒤통수를 문지르는 사이 성큼성큼 부둣가로 향했다. 이제 배를 몰고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야 했다. 물때를 보니 곧 해가 뜰 모양이었다.

빨리빨리 안 오냐! 선장이 역성을 내자 부선장이 노인네 괜히 성질이라고 투덜거리면서 따라갔다. 푹 젖은 머리를 억센 천으로 털었다. 바지를 쥐어짜고 젖은 신발을 벗어 모래며 자갈, 해초 따위를 털어내었다. 선장은 이미 부둣가에 널어놓았던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여튼 지독한 양반이야. 그 나이를 먹고 현역으로 일하는 게 보통이겠어? 노인네 기운이 대단한 거지. 그런 심통을 분명 속으로 생각한 것 같았는데 선장이 어느새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크. 빨리 해내지 않으면 불호령이 또 떨어지겠군. 꼭두새벽부터 무슨 지랄이람. 오늘 일진 한 번 더럽네. 어쩌다 미쳤길래 좋은 옷 입고 살면서도 그 모양인 거야? 미치려면 좀 곱게 미칠 것이지.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인 일 아닌가. 귀족들의 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어. 연이어 고개를 드는 생각에 그는 문득 여자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여자는 그곳에 없었다.

*

여자는 그 길로 왕성에 들어섰다. 기사단장이나 시녀장과 같은 왕의 최고 측근들과 왕족만이 알고 있는 뒷길을 통해서. 옷이 마르면서 소금기가 하얗게 올라 와 안 그래도 하얗던 잠옷이 이제 거의 창백하게까지 보였다. 그 넝마 같은 모습에 시녀장 에우로케스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밀언.”

그러나 여자의 말에 순식간에 표정을 고쳤다. 석상처럼 생기 없이 무미한 얼굴로 에우로케스는 여자를 안내했다. 좁고 긴 복도를 지나 아무 장식 없는 나무 문이 보였다. 에우로케스는 노크 다섯 번을 암호처럼 두들겼다. 시간이 흐르고 노크 한 번이 되돌아왔다. 충실하고 입 무거운 시녀장은 그제서야 문을 열었다.

저 안에 왕이 있었다. 그 역시 잠옷에 자수가 놓인 가디건을 걸친 상태였다. 여자는 왕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았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왕은 묵묵한 얼굴로 자신의 기사를 내려다 보았다.

“단장께서 급히 오시느라 수고가 많소.”

“…….”

“몸은 다 나았나.”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일어나게. 바닥이 차.”

“청이 있습니다.”

“일어나래도.”

여자가 일어서며 잠시 휘청거렸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왕은 이미 여자가 방에 들어올 때 대부분의 파악을 끝냈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굳었고 옷은 엉망이었으며 발과 종아리에는 긁힌 상처가 난무했다. 어디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지 입술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미친 것인지 미치지 못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꼴이었다.

그런데도 제 내밀한 침실로 들여온 이유가 있었다. 에우로케스가 그녀를 제정신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노크 다섯 번이 있었으니 품에 단도를 챙겼지만 그것을 티낼 만큼 왕은 어리지 않았다. 얼마 전 남편을 잃은 부인이자 유능한 기사단장이자 평민이었던 자신의 수하를 보는 왕의 시선은 차가웠고 그 수하의 시선은 무감했다.

하. 소문이란 건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방에 틀어 박혀 죽은 자처럼 지낸다면서 이 눈빛이라고? 차라리 완전히 미친 것이었으면 나았으련만 여자는 방바닥에 눌러붙은 폐인이 아니라 전장에서 막 귀환한 패잔병 같았다. 왕은 그것이 몹시 거슬렸다.

“일을 시키려고 불렀더니 청이 오는군. 그래. 친애하는 내 기사단장의 청이 무엇인가.”

“기사단장, 그만두겠습니다.”

“아직 바람이 찬데.”

“작위도 반환하겠습니다.”

“자작께서 가당찮은 소리를 하시는군.”

“페힌을 떠나겠습니다.”

왕은 식어가는 찻물을 조용히 머금었다. 침묵. 보다 확실한 거절에 여자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지리한 협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첨예한 말 끝으로 협박하고 달콤하게 구슬려도 보았으나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쩐지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단단한 입매에 권력의 첨점은 빠르게 주판을 튕겼다. 네멜린 힐을 죽일지 살릴지. 지하감옥에 처박을 것인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둘 것인지. 혹은 허우대만 멀쩡한 귀족에게 재혼을 시킬 것인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일지 젊은 왕의 뇌가 혹사하는 동안 그는 묵묵했다.

마침내 창 밖으로 동이 터오르고 두 사람의 얼굴이 절반씩 빛에 묻혔다.

“좋아. 떠나게 해주겠다. 감시자라는 뜻 깊은 자리로 향한다는데 말려서야 되겠나. 필요한 서류는 짐이 직접 챙겨주지.”

“…….”

“대신 명예를 대가로 받겠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작위 반납은 안 돼. 실종으로 처리한다.”

“그렇게 하십시오.”

짝. 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를 쳤다. 이 무뚝뚝한 기사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네멜린 힐이라는 이름 밑에 딸린 명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력. 그 무위는 놓치기 아쉬웠으나 상징만 못했다. 아무도 모르게 죽이는 것도 손해는 아니었지만 죽이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그것이 하수처럼 보였다. 왕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러니 차라리 보내준 뒤 그 명성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려면 네멜린 힐은 귀족이어야 했다. 이름뿐인 허울이지만 때론 그 허울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살펴가시게. 네멜린 힐.”

왔을 때처럼 여자가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말 없이. 에우로케스는 입을 다물 것이고 젊은 왕은 시치미를 뗼 것이다. 왕국의 누구도 여자의 행방을 알지 못하리라. 이런 식으로 네멜린 힐은 살아있는 사람답지 않게 홀연히 사라졌다. 걱정 많은 집사가 밤이 다 되도록 대답 없는 주인의 방에 불길함을 느꼈을 때 그는 검 한 자루와 함께 이미 국경을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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