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mesis (1)
For whom the revenge is
내가 그를 사랑하듯 그가 사랑하게 해주시고
사랑하게 해주시되 사랑받지 못하게 하소서
페힌은 대륙의 끝이었다. 저 바다를 건너면 또 다른 대륙이 나오는 곳. 갈대와 검을 숭상했고 마법에는 무지한 국가. 마법이 기술보다 기적에 가까운 곳에서 대륙에서도 유명한 기사단을 보유한 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왕은 바닷가에 기거했다. 갈매기가 울고 돌고래가 물장구 치는 광경이 하등 특별할 것 없는. 하얗고 웅장한 성이 수도의 땅과 저 바다마저 내려보고 있노라면 페힌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 수도로부터 산과 강을 하나씩 넘으면 나타나는 마을이 있다. 마을 유일의 수원지인 시냇물을 따라 짐마차를 서너시간쯤 끌면 수도와 바다가 보였다. 폭풍이 일 때에나 습습한 바람이 부는 땅이었고 밀보다 보리가 영글기 쉬웠다. 마을의 집집마다 저만의 맥주 담그는 법이 전승처럼 전해졌다. 청년들은 맥주와 보리를 싣고 수도로 향했고 장년들은 이따금 생선을 팔러 온 옆 동네 뱃사람들과 흥정을 했다. 노인들은 남겨진 아이들을 어르고 타이르며 별 탈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목가적인 곳에서도 비극은 있다. 삶이 있는 곳에 으레 그러하듯이. 아폴론의 왼손이 마을을 어루만졌고 다 익은 곡식처럼 목숨이 떨어졌다. 노인과 아이가 갔고 청년과 장년도 피할 수 없었다. 한 계절이 흐를 동안 마을의 삼분지 일이 병을 겪었고 오분지 일이 장례를 치뤘다. 수도의 기사가 혹시 모를 소란을 대비해 파견되었고 교단에서 온 사제들이 이 가엾은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렇게 1년. 돌림병의 기세가 죽고 남은 사제들도 슬슬 교단으로의 복귀를 꿈꿀 때쯤 그가 태어났다. 보리꽃이 안개처럼 무수하게 핀 날에.
네멜린. 비극이 지나간 땅에서 첫숨을 들이킨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의 모친은 네멜린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고 부친은 바닷가에 갔다 오겠노라는 말만을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맥주를 팔러 간 마을 청년들이 부친은 배를 탔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 것을 들었다 했지만, 평생 땅에서 산 사람이 어째서 바닷배에 올랐고 또 뱃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허락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을은 대체로 신앙생활에 시큰둥했고 그래서 언제나 죽음보다 삶이 중요했다.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것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마을은 간신히 질병에서 살아남았고 그래서 죽음에 지나치게 관대해졌다. 죽은 자를 향한 슬픔을 겉으로 드러냈다가는 다 굶어죽을 판이었다. 어른들은 슬픔을 마음에 묻었고 아이들은 그것을 배웠다. 네멜린은 단숨에 고아가 되었지만 그 사실과 무관하게 한여름 보리처럼 쑥쑥 컸다. 새파랗던 머리가 검푸르게 되고 레몬빛 같던 눈이 황금처럼 익어갔다. 사제와 기사가 두고 간 물건이 심심찮게 발견되었고, 어른들이 사제의 신성력과 기사의 검에 대해 한 마디씩 말을 얹기를 좋아했으므로 마을 아이들은 모두 기사나 사제가 되기를 한 번쯤 꿈꿨다. 남자 아이들은 기사. 여자 아이들은 사제. 이렇게 양분되었지만 네멜린은 기사가 되고 싶었다. 자수보다 검을 좋아했고 동화보다 영웅담에 눈을 빛내던 아이는 기사를 꿈꾸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들은 다름에 민감했다. 그런데도 네멜린이 쉽게 뜻을 굽히지 않자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여자 아이들이 늘었고 남자애들은 그것을 탐탁잖아했다.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다 머리카락에 엉켰다는 것따위로 울어댄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얕잡아보는 태도가 서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우는 아이 스스로마저 그렇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여자애들은 기사가 되겠다고 하는 여자애들을 격하게 비난했고, 또 어떤 남자애들은 그딴 걸로 싸우는 게 꼴보기 싫다며 닥치고 나무나 해가자 성을 냈다. 여자니 남자니, 네 편이니 내 편이니 하는 구분이 무용해질 쯤이 되어서야 지지부진한 편가르기에 싫증을 냈다. 농번기에 이리저리 불려다닌 탓에 기사니 사제니 하는 것들이 공염불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네멜린은 여전히 기사가 되고 싶었다. 한 번 눈 밖에 났기에 종종 시답잖은 것으로 시비가 걸렸고 네멜린은 그런 시비에 굴하지 않았다. 결과만 본다면 네멜린의 전승이었지만 맞기도 많이 맞았다. 조부모님께 들키지 않을 리 없었지만 네멜린이 무슨 말을 하든 온전히 믿었다. 아이들은 다 그렇게 크는 거라면서.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주셨고 네멜린은 그 손길이 좋았다. 하지만 걱정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싸움을 피했지만 또 어쩔 수 없는 날엔 바로 집에 들어가기보다 옷자락으로 피를 닦고 시간을 보냈다. 피가 나지 않으면 덜 다쳐 보인다는 것을 네멜린은 알고 있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다시 또 화해하고. 다툼과 사과, 용서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났다. 갈대철이 오면 다같이 강으로 놀러가 갈대를 꺾어 흔들어대기도 했다. 서로 찌르면서 놀다 보면 왜 싸웠는지조차 금세 잊혔고 네멜린의 꿈 역시 그랬다. 강가에 핀 갈대처럼 당연한 것. 마을 모두가 네멜린 꿈이 기사라면서? 라고 말할 무렵에도 딱 한 사람만이 그것으로 시비를 걸었다.
“왜 기사가 되겠다는 거야!”
“무슨 상관이야.”
“왜 기사냐고!”
“그러니까 그게 너랑 뭔 상관이냐고!”
결국 참다 못한 네멜린이 그 아이를 먼저 팼다. 말 그대로 쥐어팼다.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다. 보통 그쯤 얻어맞으면 엉엉 울며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다가 집으로 도망갔을 텐데, 그 애는 눈물이 고였을지언정 씩씩대며 쳐다보고 있었다. 네멜린은 그 눈빛에 찔린 기분이 들었다. 이기기 위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단지 분풀이였고 그래서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마저 때리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고 마운트를 풀자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맞지도 않았는데 그냥 완전히 지쳐있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온종일 걸은 기분이었다. 이 짓에 진력나는 것은 네멜린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네멜린은 간신히 옆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가든지 말든지.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자니 웬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어엉, 끅, 흐으어엉엉. 대충 그런 소리였다. 팔뚝을 눈두덩에 올린 채 서럽게도 울었다. 그제야 좀 얻어터진 놈 같았다. 그렇다고 때린 놈이 위로하는 것도 웃긴 짓이라 네멜린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 애의 하얀 머리가 눈물에 다 녹을 것 같았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울기를 한참. 눈물콧물을 줄줄 흘리던 애가 문득 표독스럽게 네멜린을 째려보았다.
“너, 너는 사람이, 허엉, 우는데 어? 위로도 안 하고!”
“안 들었을 거잖아.”
“해보긴 했냐? 니가 그걸, 끕, 어떻게 알아.”
“때려서 미안해.”
그 조용한 말에 끅끅대며 울음을 삼키던 애가 단숨에 울음을 그쳤다. 그 대신 입을 헤 벌리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정도로. 네멜린은 멋쩍어져서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까진 손등이 욱씬거렸다. 사람을 때리고나서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흔들리던 유치가 빠져봤고 서로 밀치며 싸우다 돌바닥에 갈비뼈가 부딪혀도 봤지만, 그런 일들보다 이게 훨씬 아팠다. 저항 않는 사람을 때리는 건 하면 안 되는 거구나. 그러면 안 되겠다. 그 깨달음이 문득 억울해져서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왜, 왜 미안한데.”
“내가 널 때렸잖아.”
“근데 사과 안 했잖아. 그동안엔!”
“넌 나 안 때렸으니까.”
창피했다. 가슴에서 치솟는 수치심에 네멜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까지 시끄럽게 굴던 애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네멜린은 눈만 굴렸다. 그 애는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얼굴 전체가 울긋불긋했고 벌써 입술이 팅팅 붓기 시작했지만 푸른 눈이 아주 선명했다. 그러니까 걘 좀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해한 것도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저렇게 감정이 다양하게 들쑥날쑥하지. 네멜린은 그것이 조금 신기했다.
“네멜린…….”
“응.”
“……너 진짜로 기사할 거야?”
네멜린의 눈이 뾰족해지자 걔가 흰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해서 모나려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네멜린은 차분한 마음으로 고민했다.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았고 또 그러고 싶었다. 악을 쓰고 우기는 일에 확실히 지쳐있었다.
기사할 거냐고. 기사가 될 거냐고. 처음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봐주는 건. 기사가 될 거라는 말에 왜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응원하거나, 비웃거나, 동경하거나, 질투하거나. 대충 이런 반응들 뿐이었다. 네멜린이 어째서 기사가 되고 싶었고 왜 검을 잡고 싶은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직 이 집요하고 고집스럽고 얄미운 백발의 소년만이 네멜린을 궁금해했다.
“할 거야. 검을 쥘 거야. 검을 쥐고 기사가 될 거야.”
첫 다짐이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에 희망사항일 뿐이었던 꿈이 형태를 갖췄다. 스스로를 설득할 말조차 부족했던 꿈이 소년을 향해 나아가면서 되돌릴 길 없는 마음이 되었다. 소년은 첫 다짐을 한 소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엎드려 훌쩍이기 시작했다.
“야. 왜……왜 또 우는데?”
“……안 울어! 이 바보야.”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기쁘면 기쁜 것. 슬프면 슬픈 것. 화나면 화나는 것인 네멜린의 기준으로서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우냐니까? 좀 조용히 좀 해! 소년이 버럭하자 네멜린은 입을 합하고 다물었다. 코를 먹으며 한참 울던 소년은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름 불러줘…….”
“응?”
“야, 너, 이런 거 말구. 이름 불러주면 다시는 안 놀리게 할게.”
“안 놀릴 거라고?”
“다른 애들이 안 놀리게 해주겠다고!”
방금까지 자신에게 줘 터진 놈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찌나 황당하던지. 저빼곤 이렇게 시비를 거는 애들도 이젠 없었다. 가만히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외에는 자신도 못한 일을 저 허여멀건한 애가 하겠댄다. 그것도 울면서. 황당함이 도를 넘으면 웃음이 터진다는 걸 네멜린은 그때 알았다. 하하, 아하하하! 활달하고 명랑한 소리. 보리가 바람결에 쏟아지는 듯, 그런 웃음소리. 함박웃음을 짓는 네멜린의 얼굴은 무구하기 그지없었다. 성내려던 소년이 일순 말을 잃을 만큼. 네멜린은 소년의 옆에 털썩 누웠다. 한바탕 웃으니 마음이 가벼웠다.
“알았어. 라르키힐.”
라르키힐. 그것이 소년의 이름이었다.
네멜린이 기사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라르키힐은 여전히 소년이었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마침내 견습기사시험에 합격한 날. 수도로 영영 떠난다는 말에 또 한바탕 울어제낀 라르키힐을 달래느라 네멜린은 반나절을 소모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라르키힐은 네멜린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붉어진 눈으로 애써 웃는 라르키힐을 그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수도로 떠난 네멜린에게서 보리냄새가 빠지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목검을 쥐고 기사가 되기까지도 그랬다. 딱 3년. 소위 말하는 천재가 그였다. 하지만 네멜린이 잘하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친화력이나 사교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맨몸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누가 맥주를 더 많이 팔았느냐로 경쟁하던 마을에서 자란 네멜린에게 수도는 생경한 것 투성이였다. 특히 굴절된 감정과 같은 것들이. 가시를 품은 혀 끝. 호의와 구분할 수 없는 악의. 그 널뛰기 속에서 네멜린은 천재기사였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촌것이었다가 흔해빠진 평민이 되기도 했다. 검이나 좀 잡는 촌구석 출신에서 검으로는 무시 못하는 녀석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말이 흘렀던가? 사교계발 소문까지도 종종 들렸으니 어련한 일이었다. 주로 치정과 관련된 사교계발 찌라시에 네멜린은 학을 떼었다. 유려한 말솜씨를 발휘하는 일과는 연이 없었기에 그는 아예 행동을 믿기로 했다. 나도는 말, 건네는 말, 들리는 말, 그 전부보다 행동을 중요하게 여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세상에는 말이 있었다.
말. 또 말이었다. 날카로운 말을 듣는 것은 네멜린은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동료나 친구와 상관없는 그 감정들은 홀로 그저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도 종종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럴 때면 이불 한 겹에 의존한 채 몸을 웅크려 울었다. 네멜린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상처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괴로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은 늘 괴로웠다. 조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처음으로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 저를 버렸음을 알았을 때. 앞에서 괜한 트집을 잡던 사수가 실은 저를 깊이 걱정하고 있었을 때. 좋아하던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웅크려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 정도면 울만한 일인지조차 가끔 헷갈렸지만, 어쨌든 기사 네멜린은 아직 어렸다. 어려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어려서 우는 자신을 꽤 미워했다.
그래도 독립의 시간을 감내했다. 웃자란 실력을 미성숙한 이성으로 애써 부여잡았다. 고향의 보리밭을 떠올리면서. 울면서 해질녘 바람에 나부끼던 강가의 갈대밭을 그렸다. 할머니의 품과 할아버지의 무릎 위를 떠올렸다. 붉은 물레방아가 돌던 집을. 작은 카우치에 담겨 있던 부모님의 유품을. 사무치는 서러움을 추억으로 달랬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검으로 달랬다. 그런 식으로 세월이 흘렀다.
자주, 혼자서, 소리 없이 또 많이 울며 네멜린은 사춘기를 보냈다. 그것이 방황이었다. 모포 한 겹짜리 방황을 보냈고 그 끝에서 날 선 말들이 결국 마을의 아이들이 제게 보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네멜린은 여전히 네멜린일 수 있었다.
“안녕. 네멜린.”
“라르키힐?”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에도 고향에의 애수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반갑고 기뻤으나 슬프지 않았다. 젖살이 다 빠져 완연한 청년의 모습을 한 라르키힐은 여전히 웃을 때 오른쪽 눈이 더 접히고 보조개가 패였다.
“나도 이제 수도에 살아.”
“마법사가 된 거야?”
“진작 마법사였지. 이제야 수도로 올 자격을 얻은 거고.”
“마탑이란 곳도 있다며.”
“응. 근데 수도에 오고 싶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네멜린의 손을 꼭 잡았다. 라르키힐은 여전히 많이 울고 많이 웃는 사람이었다. 꽃이 피는 걸 누구보다 먼저 알았고 해가 지는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볼 줄 알았다. 모가 얇은 백발은 햇살에 은식기처럼 반짝였다. 네멜린은 그 머리카락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눈물에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머리카락만으로도.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언가를 애틋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임을 어린 네멜린은 몰랐다. 라르키힐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사랑한다 고백할 때까지도. 힐은 제게서 깊은 물을 보았고 네멜린은 그에게서 연못을 보았다. 얕은 물. 손을 뻗는 것만으로도 그 아래가 다 잡힐 것 같은 그런 물 말이다. 보이는 것보다 깊다지만 사람을 삼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그런 맑은 연못이 그였다. 그는 자신과 정말 달랐고 네멜린은 그런 점이 기꺼웠다. 사랑을 하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르키힐의 사랑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제철맞은 과일처럼 풋내도 없이 달기만 했다. 그는 네멜린의 말을 경청했고 아무 이유 없이 꽃을 사다 주었으며 그렇게 세상 좋은 모든 것을 가져다 주고 싶어했다. 그 덕에 처음에는 무슨 맛인지도 몰랐던 케이크를 주말마다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다. 하늘이 맑거나 눈이 오면 라르키힐을 생각했다. 겨울을 그의 계절이라 여겼다. 한여름, 연못에 핀 수련조차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때마다 네멜린은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자주 울고 자주 웃는 그 사람이 좋았다. 좋아한 것이다. 그냥. 그렇게 이유도 없이.
사랑에 빠지듯 당연하게도 네멜린은 기사단장이 되었다. 현세대 최고의 기사라는 이명과 함께. 왕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데 네멜린을 썼다. 귀족과의 구분짓기로써 말미암아. 왕은 네멜린을 상징이자 도구로 썼고 귀족은 견제하는 동시에 끌어들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네멜린은 검을 쥘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페힌의 기사단장을 달았다는 것은 영원히 검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고 적어도 끼니를 걱정할 일은 이제 아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라르키힐. 결혼하자.”
그래서 그는 곧장 자신의 연인에게 프로포즈했다. 갓 스무살이 되었지만 네멜린은 죽을 때까지 그의 웃는 얼굴을 잊지 못하리라 여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충만했다.
라르키힐은 어쩐지 머뭇거렸지만 결국 네멜린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왕은 자신의 기사단장이 국가의 몇 없는 마법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왕이 기뻐하니 번갯불에 콩 볶듯 모든 일이 척척 이루어졌다. 차일피일 미루어지던 작위 수여까지도. 네멜린이 라르키힐의 끝 글자이자 애칭이던 힐을 성으로 달겠노라 선언했고 그것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후계가 없는 젊은 왕은 권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보리밭 마을의 소녀가 스무 살의 네멜린 힐 자작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자작이 정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명예는 기사로써 얻으면 그만이었고 영광은 누릴 만큼 누리고 있다 생각했다. 사교계에 적극적이지 않은 인사에게 빗발치던 관심이 수그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라르키힐이 중요한 사교행사에는 나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한 덕에 망신만 겨우 피한 수준이었다. 예법은 어려웠고 가식은 지루했다. 기사단장이라는 직위에 귀족 작위가 왜 필요한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네멜린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어찌저찌 해냈다.
결혼생활은 그린 듯이 뻔했다. 다소 지루했고 그래서 평화로웠다. 네멜린 힐은 성이 있는 자신의 이름에 금세 익숙해졌다. 라르키힐은 마법을 연구했고 네멜린은 검을 연구했다. 이따금 싸웠지만 대체로 안정적이었고 항상 사랑했다. 다시 오지 않을 시절들이 그렇게 흘렀다.
결혼한 후로부터 네 번째 봄이었다. 결혼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그때. 그를 닮은 계절이 가고 신록의 나날이 드리웠다. 매화가 지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다. 집사에게서 라르키힐이 일 때문에 늦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소 이르게 잠자리에 누웠다. 페힌의 봄은 매우 짧았다. 수도는 고향보다 한 발 앞서 여름이 왔기에 그는 봄이 오면 늘 창문을 반쯤 열어두었다. 아침에 맡는 새벽 공기가 시리도록 맑아야 기분이 좋았다. 밤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휘감았다. 이불을 끌어안자 그렇게 춥지도 않았다. 라르키힐이 오고 잠든 자신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침대에 들어오면 더 따듯해지겠지. 네멜린 힐은 문을 보고 돌아누운 채로 잠들었다.
네멜린 힐의 인생이 그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틀릴 줄도 모르고, 무구하게도. 잠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도 모르고. 그렇게 또 모르고 무지에 기대 편안하게 잠든 것이다.
별빛이 분분한 새벽. 소란에 눈을 떴다. 문 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켜 가운 한 장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 익숙한 얼굴이 둘. 수하 기사가 집사를 잡아먹을 듯 화를 내고 있었다.
“단장님 진짜 지금 가셔야 한다고요!”
“그렇다고 아무 설명도 없이 막무가내로 침실까지 밀고 들어오시면 어떡합니까?”
“벼락 맞을 소리 좀 그만하세요! 라르키힐 그 미친 마법사의 일이라고요. 단장님 외에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미친 마법사. 그 말이 콱 틀어박혔다. 마법사들은 검사가 보기에 대개 미쳐있었으므로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하든 미쳤다고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검사의 나라에서 미친 마법사는 오직 흑마법사만을 뜻했다. 흑마법사. 라르키힐이 흑마법사라고? 생명을 희생해서 힘을 탐하는 저열한 인간이라고? 저 새끼가 미쳤나? 아니면 내가?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안 좋은 예감이 들불처럼 몸을 타고 올랐다. 거짓말일까? 아니면 꿈? 희망처럼 의심이 반짝였다. 하지만 수하는 조급했고 또 그만큼 간절해 보였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발 밑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제 팔을 이끌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금발의 이 기사는 누구지? 피가 묻어 있잖아.
“단장님. 가셔야 해요.”
아. 동쪽에서 천을 떼다 와 판다는 비단집 딸이었다. 거짓말을 나보다 못해서 늘 동료에게 놀림받던. 근데 왜 저 애가 그런 말을 했지? 미친 마법사라니. 라르키힐이 미쳤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시간이 나면 호수에 뱃놀이를 가자던 사람이 어떻게 미칠 수가 있느냔 말이다. 밤이 어두워서 그런가 눈 앞이 캄캄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그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다.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낌새도 보이지 않고 흑마법에 손 댈 리 없었다. 그렇게 웃는 사람이 나를 완전히 속여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인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다음에 차차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속단해선 안 된다.
그런 마음이 들고 나서야 질질 끌리던 발이 제대로 움직였다. 간신히 말에 탔다. 찬바람이 뺨을 때렸다. 속이 서늘했다. 아니야. 잘못 안 것이다. 일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눈에 띌지도 모른다. 괜찮을 것이다. 그런 의미 없는 사념을 고삐처럼 붙들고 네멜린은 말을 몰았다. 왕성 외곽의 슬럼가였다. 말에서 뛰쳐내리자 기사들이 무장을 한 채로 모여 있었다. 도열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에 하면 되는 일이야. 부관한테 조금 혼나면 되니까.
볏짚 창고같이 생긴 건물 문 앞에 천이 덮여 있었다. 시체인가. 하얀 머리를 한 것치곤 꽤 젊군. 기사들이 일을 하다 보면 종종 보곤 했던 것이다. 비상이 터져서 단장을 부를 정도면 시체가 여러 구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 네멜린은 일별하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것 같았다. 창고 안은 비린내가 자욱했다. 여기저기 인신공양의 흔적이 있었다. 살점과 머리카락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 네멜린 힐. 제발 정신 좀 차려. 지금 이렇게 흔들릴 때가 아니다. 현장을 보존하고 마법사를 불러서 잔존 마력을 확인하면 더 확실해질 것이다. 라르키힐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 괜찮아. 괜찮다. 아, 그런데 왜…….
왜 여기에 아이들이 있어?
삐이이이익!
이명이 고막을 때렸다. 겁에 질린 눈. 젖살이 통통한 뺨. 철창. 헤진 옷. 맨발과 묶인 자국. 사슬 매듭. 아이들. 두려움. 그 미친 새끼가 아이들까지 이용하다 걸렸습니다. 다시 두려움. 굳은 뇌를 파고들며 수하의 보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단장님도 밖에 보셨겠지만 흑마법사는 원래 현장에서 즉결처분이 원칙이라서요. 매듭이 특이해서 잘 풀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통째로 잘랐습니다. 야, 이 자식아. 좀 천천히 해! 아니 단장님이 보고를 들어야 애들을 여기서 빼낼 수 있잖습니까. 이 씨발, 눈치도 없는 새끼야 그런 건 좀 유도리있게…….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들을 더 보기 힘들었다. 등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아이들을 본단 말인가? 수하들이 흑마법사를 처단하고 끔찍한 번제를 막을 동안 잠이나 주무시던 주제에. 뭘 바란 거야? 내가 대체 뭘 부정하고 있었던 거지? 그 매듭은 우리가 갈대나 보릿대를 엮을 때 쓰던 매듭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긴장으로 팽팽해진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발치에 시신이 걸렸다. 덮어둔 천을 자비없이 걷어젖혔다. 백발이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라르키힐이었다.
그는 내가 마련해 둔 잠자리를 마다하고 여기에 있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완전히 평화로워보였다. 깊게 잠든 사람처럼.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라르키힐의 목은 검붉게 젖어 원래 피부색이 뭔지 모를 지경이었다. 손을 뻗어 얼굴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밤바람에 몸이 식어간다.
“어으, 으…….”
눈 좀 떠 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정말 죽었어? 내가 기다렸는데. 오늘 아침에도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 입으로 저 아이들을 네가 꾀었어? 아니면 누가 시켰어? 힐, 내 사랑, 제발 한 번만 대답해 봐. 응? 감긴 눈을 더듬자 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내가 너무 세게 만졌나. 머리를 바로 해주려 뺨을 붙잡아 돌렸다. 그런데 머리가 불쑥 들렸다. 그러니까 머리가, 라르키힐의 머리가 내 손 안에 있었다. 머리만. 내 손에.
목이 베인 줄로만 알았는데 완전히 잘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땅이 이렇게 검었다. 죽은 후로도 흘러나온 피가 땅을 검게 적신 것이다. 꼭 이 자리만 새카만 이유가 단지 해뜨기 전 새벽이어서가 아니라. 이게 전부 다 그의 피였고…….
“…….”
네멜린 힐은 남편의 머리를 안은 채 석상처럼 굳어 있다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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