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네트

불시착

春雪 by 현명

“이제는 밝힐 때가 되었군요…… 저는 사실 외계인입니다.”

새카만 하늘의 정중앙에서 번뜩이는 달빛 아래, 자욱하게 깔린 고요 속에서 그 녀석은 일말의 웃음기 없이 말했다. 오랜 장래희망이 대통령이었음을 밝히듯 표정도 목소리도 엄숙하고 진지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 역시 그 말에 일말의 웃음기 없이 답했다.

“어쩐지 하이파이브를 엉덩이로 하더니…….”

1. 야구와 전학생과 하이파이브

어느 날 갑자기 전학 온 그 녀석은 이름이 유시아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전학을 오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그 녀석은 한동안 우리 학년 전체에 화젯거리가 되어 주었다. 군대에서 온 사람처럼 존대를 하며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시아를 - 남녀 분반제 탓에 - 남학생들은 마주치기 어려웠다. 그러니 직접 본 사람은 소수였으며 소문만 무성했는데, 유난히 예쁘게 생겨서인지 이상한 얘기도 돌았다. 가령 시아는 방귀도 향기롭게 뀐다더라 같은. 나는 그런 헛소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간고사가 곧이었다.

야구를 그만둔 지 반 년이 지나고 있었다. 놀라울 만큼 미련이 남지 않았다. 주니어 시절부터 알았던 코치님은 지치지도 않고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같은 팀이었던 친구들은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며 비난했다. 나를 주목하던 구단의 인사들은 아직도 내 근황을 궁금해했다. 그들의 마음 같은 건 모르는 척하고 나는 공부에 매진했다. 이번 중간고사도 전체 1등을 차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수치는 판단의 근거가 되고, 우수한 성적이야말로 내 마음의 현주소를 가장 잘 드러낼 터이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구를 놓지 못한 채 반 년을 날린 나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나도 구태여 친구를 만들 뜻이 없었기에 늘 혼자 지냈다. 누군가는 주니어 야구 선수라는 경력에 주목하며 다가오기도 했지만 내가 야구를 더 이어갈 의향이 없음을 밝히면 실망하고 멀어졌다. 잘된 일이었다,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날도 나는 홀로 학교 뒤뜰을 지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기행을 벌이던 그 녀석을 만났다.

“뭐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그 녀석은 골프 치듯 야구공을 배트로 쳐내려 애쓰고 있었다. 야구를 하고 있습니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녀석이 진지하게 답했다. 얼마간의 가늠 후 대충 감을 잡은 녀석은 공을 힘껏 쳐냈다. 와중에 잘못 휘둘렀는지 공은 맥없이 굴러가다가 멈췄다. 스윙의 반동으로 녀석은 잠깐 비틀거렸다. 일련의 바보 같은 짓거리를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야구가 아니라 골프 같은데. 골프공도 골프채도 글러먹은.”

“…… 야구는 본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금관가야 시대부터 이어진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죠. 모르셨나요?”

“금시초문이고 알고 싶지도 않아.”

그 녀석은 묘한 표정을 했다. 금시초문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했다. 나는 굳이 그 녀석을 궁지에서 꺼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빤히 지켜보았다. 야구배트로 제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던 그 녀석은 잠깐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금시초문이 뭔지 제가 맞혀 보겠습니다. 어떤 문이라는 의미겠죠. 금시초……가 뭘까요?”

“네가 얼마 전에 왔다는 전학생이야?”

“네? 네. 이 학교는 좋은 곳입니다. 학생들도 선생님도 제게 친절하게 대해 줍니다. 그리고 식사가 아주 맛있더군요.”

우리 학교는 시 전체에서 급식이 가장 맛없기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이전 학교에서 얼마나 맛대가리 없는 급식을 먹다가 온 건지. 나는 잠깐 그 녀석을 가엾게 여길 뻔했다, 측은지심을 눌러 담고 나는 아무렇게나 멈춘 공을 집어 들었다. 이내 그것을 던졌다가 받았다가 하며 말했다.

“야구, 본 적 없어?”

“많이 봤는데요?”

(나는 금이 가려는 인내심을 붙들었다.) “그런데 왜 칠 줄을 몰라? 배트를 치켜들고 있다가 공이 날아오면 휘둘러야지.”

몇 번 시범을 보이니 그 녀석은 훌륭한 자세로 따라 했다. 배움이 어찌나 빠른지,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에는 얼추 공을 쳐낼 줄도 알게 되었다. 훌륭하게 공을 쳐내어 내 머리 위로 넘겼을 때는 그 녀석의 덤덤한 눈빛이 조금 반짝거리는 듯했다. 이내 내게 총총 달려온 그 녀석은 내 등 뒤를 향해서 갔다.

“이름 모를 남학생 님은 좋은 선생님이시군요. 덕분에 야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이파이브 합시다.”

(호칭이 이상해.) “하이파이브를 하자면서 왜 뒤로 가는 건데?”

“풍풍풍.”

  그 녀석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 엉덩이에 제 엉덩이를 부딪쳤다. 나는 또다시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물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 녀석은 하이파이브를 한 거라며 뻔뻔스럽게 응수했다. 내가 무어라 따지기도 전 그 녀석은 대뜸 '고개를 저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린 것이다. 다음에는 제가 남학생 님을 도와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은 눈을 반짝이며 그리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 와중에 야구배트만 가져가고 야구공은 바닥에 버려 두었기에 나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척 봐도 새것이니 학교 비품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돌려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나는 저 이상한 녀석을 어떻게든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워든 야구공에는 벚꽃잎 두어 장이 붙어 있었다. 봄이 한창이었다.

2. 가만히 좀 있어라

중간고사가 끝난 후 유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히 잦아들었다. 다들 전학생보다는 제 성적이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간간이 그 녀석이 저지르는 기행에 대한 소문이 돌긴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중간고사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학업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안 코치님은 더 이상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단념한 듯했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기대주였다 해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나를 잊게 되리라. 부디 그러기를 바랐다, 나는 야구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모든 일이 잘 풀려 갔으며 내 마음을 가볍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재킷 주머니에 든 야구공이었다. 나는 시험이 끝날 때까지 유시아를 만나지 못했다.

그 녀석을 다시 마주친 곳은 텅 빈 운동장 구석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통학하는 학생들은 일찌감치 귀가했기에 학교가 몹시 고요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무렵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운동장에 나선 나는 무작정 배트를 휘두르는 그 녀석을 만났다. 나는 야구공을 꺼내 그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때 이거 두고 갔더라. 그 녀석은 나를 올려다보며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몇 초 후 나를 알아봤는지 반갑게 답했다. 

“아, 이름 모를 남학생 님.”

“나는 찬이야. 최찬.”

“그렇습니까. 저를 기억하실 줄 몰랐습니다. 저를 기억하고 야구공까지 돌려주러 오다니 찬 님은 상냥하시네요. 인간의 기억 저장 용량은 생각보다 큰 모양입니다. 저는 보통 인간보다 용량이 작으니 착 님을 까먹어도 양해해 주십시오.”

듣자 하니 벌써 까먹은 듯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시험은 잘 봤어? 그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회말 카드라는 건 참 신기하더군요. 그것 위에 정성껏 야구 경기장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충 말아먹었다는 뜻인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하여간 화법이 특이한 녀석이었다, 그때까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용건이 없어진 내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그 녀석은 공을 치는 연습을 하고 싶다며 배트를 치켜들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으니 나는 선뜻 공을 던져 주었다. 몇 차례 실패하던 그 녀석은 점차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열 번 던지면 여덟 번 정도는 때릴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선수 출신이던 나와 수상쩍을 만큼 체력이 좋은 유시아는 지칠 줄 모르고 공을 주고받았다. 기숙사로 돌아갈 즈음이 되면 몇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오늘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촹 님은 저와 잘 놀아 주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그 녀석은 자신의 엉덩이를 기운차게 때렸다. 슬쩍 내 엉덩이까지 때리려 하기에 잽싸게 피한 나는 다소 황당한 기분으로 물었다.

“너, 혹시 외국에서 전학 왔어?”

“생각 안 해 봤는데 이제부터 그런 걸로 하겠습니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런 걸로 하겠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무튼 너는 정말 특이하네. 지내면서 적응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면 연락 줘. 실례되는 말인 건 알지만 좀 걱정스러울 정도라.”

감사합니다. 별로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그 녀석은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몇십 년 전에나 썼을 법한 폴더폰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공부하겠다며 폴더폰을 쓰는 경우가 있으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신에 반영되는 시험의 OMR 카드에 야구장이나 그리는 녀석이 공부를 해 봤자 얼마나 한단 말인가. 녀석의 휴대폰은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1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찍으면 대뜸 8이 나왔다. 010-8까지 찍다가 화딱지가 난 나는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거는 방식으로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너 키패드 고장 난 것 같다. 그 녀석에게 넌지시 말했지만 딱히 새겨듣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대신 녀석은 쩔쩔매고 있었다, 이미 고장 난 키패드에 적응했는지 정상적인 숫자 배열에 익숙지 않은 듯했다. 아주 어렵사리 번호를 주고받은 우리는 싱거운 인사(그 녀석은 이번에도 인사할 때 고개를 저었다)를 끝으로 헤어졌다. 그 녀석의 번호를 확인하니 354-16438-54357 이었다. 이런 번호는 난생처음 보았다. 외국에서 살다 왔으니 그럴 수도 있나, 의문을 스스로 해소하던 중 문자 알림이 떴다.

안녕하세요, 헛 님.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바로 연락을 드립니다. 저의 룸메이트들이 저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어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이걸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까요? 보통 인간들은 기쁠 때 웃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짬깍 선물을 받으면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들이 자고 있을 때 짬깍 선물로 간지럼을 태워 주면 어떨까요? 웃으면서 좋아할까요?

아니, 일단 그런 상황은 복수가 아니라 보답이라고 해. 그리고 짬깍이 아니라 깜짝이야. 아무도 안 좋아할 테니까 그냥 가만히 좀 있어라. 그리고 나는 헛이 아니고 찬이야. 원형이 하나도 안 남은 건 좀 심했다.

한 글자인 것만큼은 기억했습니다, 제게 있어 족장의 발전이죠. 모쪼록 앞으로는 외우겠습니다. 옆구리가 떨릴 만큼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데 옆구리가 왜 떨리지? 나는 좀 의아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3. 달이 차오른다, 가자

그 후, 유시아는 줄기차게 문자를 보내왔다. 시험이 끝나 조금 여유로워진 나는 녀석에게 한 가지 조언을 했다, ‘웬만하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결론 내리지 마라’. 그 덕분에 나는 녀석의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몇 번이고 막아냈다. 이번에도 녀석은 기행을 막은 내게 몇 번이고 고마워했다. 나는 녀석이 보낸 문자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외국 출신이라 해도 이 정도는 좀 이상하다, 세상 어느 나라 사람이 유감스럽다는 의미로 백덤블링을 한다는 말인가(많이 할수록 유감을 나타내는 정도가 커진다고 주장했다). 그리 생각하게 된 영문은 몰라도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녀석의 얼굴을 보고 접근한 놈들은 백이면 백 기행을 못 이겨 떨어져 나갔다. 또래 친구들에게는 귀여움을 받아 따돌림당하지 않는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대관절 그게 왜 나에게 다행인 일이겠는가. 나는 명백하게도 그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녀석과 알고 지낸 지 두 달이 넘은 후였다. 기말고사 기간에도 녀석은 공부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폴더폰으로 바꾼 의지 치고는 학구열이 너무나 빈약하지 않나. 앞으로 뭘 해 먹고 살 작정인 건지. 절로 걱정이 된 나는 녀석을 끼고 모든 과목을 가르쳤다. 녀석은 내 말을 잘 들었으나 그것이 성취도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녀석의 성적표를 펼쳐 본 나는 내가 강사로서 소질이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찬. 내 표정이 어두워지니 녀석이 진지하게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두어 달 봤다고 녀석은 이제 내 이름을 기억했다. 가끔 ‘착’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기말고사는 끝이 났고 방학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방학 특별학습을 신청했고 녀석은 열등생 대상의 보충 수업을 들어야 했다. 방학을 맞이한 학교는 거의 항상 고요했고 녀석과 나는 자연스럽게 자유 시간마다 붙어 다녔다. 착이라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 친구들은 모두 학교를 그만뒀거든요. 녀석이 음울하게 말했다. 그만둔 게 아니고 방학이라 집에 간 거야. 그리고 나는 찬이야. 내가 대꾸하자 그 녀석은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고.

그날은 유난히 적막한 밤이었다. 반달도 못 된 달빛이 환했다. 커튼을 쳐도 위용을 잃지 않는 달빛을 보고 있노라면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이쯤 되면 녀석에게 장문의 문자가 몇 번이고 왔어야 하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또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닐는지……. 연신 휴대폰을 힐끔거리던 나는 긴 갈등 후 액정을 두드렸다.

뭐해? 또 달 보고 있어?

네. 오늘의 달은 꼭 한입 먹은 만두 같습니다. 배가 고프군요. 만둣국에 떡을 넣어 먹고 싶어요. 그런 요리를 만들다니 이곳의 주방장님은 천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떡만둣국은 흔한 요리인데……. 적당히 보고 들어가. 아직 낮밤 기온 차이가 크더라. 겉옷이라도 입든가.

겉옷은 입었어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운동장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알았어. 지금 나갈게.

나는 적당히 채비하여 기숙사를 나섰다. 또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지 이제는 조금 기대가 되었다. 기숙사를 나서며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에는 오로지 달만이 기세 좋게 빛을 내뿜어 댔다. 별일이네. 짤막한 생각이 유성처럼 머릿속을 지나다가, 금세 사라졌다.

달빛 아래 그 녀석은 가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교복 위에 체육복 재킷을 걸친 녀석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와중에 겉옷을 뒤집어 입었기에 나는 녀석의 외투를 가져다가 다시금 제대로 뒤집어 놓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녀석은 팔 부분에 머리를 끼우려 애썼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녀석의 옷을 제대로 입혀 주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갔다. 머리가 잔뜩 북실북실해진 그 녀석이 문득 물었다.

“조만간 슈퍼문이 뜬다는 소식을 들으셨나요?”

“어. 기사로 알게 됐어. 몇십 년 만의 슈퍼문이라던데.”

“찬은 대단한 사람입니까? 소식을 알려 주는 충성스러운 기사도 있으시고.”

“마음대로 생각해.”

“슈퍼문이 뜨면 저는 떠납니다.”

맥락 없는 대화 끝에서 나는 조금 놀라 녀석을 보며 물었다. 어디로? 녀석은 대꾸도 않고 달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뭇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녀석의 태도를 마주하면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적은 점점 그 길이를 늘려 갔다. 막연한 불안감과 조바심이 한데 섞여 가슴을 두드려 댔으나 나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척했다. 한참 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녀석은 마침내 어떠한 결심을 하고 나를 보았다. 이내 말하기를,

“이제는 밝힐 때가 되었군요…… 저는 사실 외계인입니다.”

새카만 하늘의 정중앙에서 번뜩이는 달빛 아래, 자욱하게 깔린 고요 속에서 그 녀석은 일말의 웃음기 없이 말했다. 오랜 장래희망이 대통령이었음을 밝히듯 표정도 목소리도 엄숙하고 진지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 역시 그 말에 일말의 웃음기 없이 답했다.

“어쩐지 하이파이브를 엉덩이로 하더니…….”

4. 혼자가 될 준비

솔직히 말하건대 전혀 의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의문에 명쾌한 답을 찾아낸 것 같았다. 귀신이니 외계인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 녀석이 외계인이라 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구인이 이 녀석처럼 행동하며 살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길 터였다. 내 반응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그 녀석은 매우 진지하게 자신의 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녀석이 거주하는 은하계는 문명을 갖춘 별들끼리 연합하여 위대한 텔레포트 시스템을 개발했고, 수시로 행성과 행성을 오가며 자유로이 교류한다고 했다. 유시아는 '동동동' 행성에 가려다가 발음을 너무 세게 한 나머지 지구에 불시착했다고 했다. 뭐라고 발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녀석이 늘어놓는 얘기는 하나같이 너무나 비현실이었기에 오히려 굳이 의심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만 듣던 나는 문득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네가 외계인이면, 어떻게 신분을 증명하고 고등학교까지 들어올 수 있었어? 우리나라는 신분 관리에 까다로워서 웬만하면 의심을 받았을 텐데.”

“지구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의 어떤 이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외계에서는 이 현상을 '개연성 짜기 귀찮을 때 슬쩍 끼워 넣는 메타 발언'이라고 부릅니다.”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것 같은데?”

“그렇습니까? 외계의 언어인 만큼 발음이 같은 지구의 표현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녀석은 원래 지구로 올 계획이 없었던 듯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지구에 텔레포트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는 녀석이 조금 걱정되었다. 다분히 비이성적인 사고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녀석에게 나는 명백하게도 말려들고 있었다. 이 녀석과 함께하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물었다. 그럼 원래 네가 살던 별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어? 못 돌아가면 어떡해? 내 말을 듣고는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왜 끄덕였는지는 모르겠다) 폴더폰을 꺼내들었다. 제가 이 통신기로 텔레포트 관리국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러고는 설명하기를, 슈퍼문이 뜨는 날 달빛 아래서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면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황당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일단 가장 이상한 것부터 지적했다.

“외계인이 왜 지구의 위성인 달의 영향을 받는 거지?”

“모르십니까? 슈퍼문이 뜨는 날은 지구의 자기장이 강해집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 아무튼 자기장이 왜?”

“그래서 자기장 자기장장 노래를 부르면 같은 극끼리 밀어내기 때문에 제가 살던 별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 상식이 따라가든 말든 녀석의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녀석이 제 별로 돌아가는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자기장을 이용한다고 하니 보통 상상하는 텔레포트처럼 한순간 사라지는 건 아닌 듯하고, 별에 도달할 때까지 열심히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는 걸까.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 표정을 살피던 녀석은 내가 웃자 제 엉덩이를 툭 쳤다.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녀석은 외계인이라 그런지 원래 잠이 적었고 나는 잠이 다 달아났으니 우리는 야심한 밤 구령대 의자에 앉아 녀석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표정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지구인들과 달리 유시아의 동족들은 주로 엉덩이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했다. 꼭 자기 같은 별에서 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 보면 녀석은 늘 표정이 똑같았다, 매사에 덤덤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사실 우리 별의 사람들은 박수도 지구인들과 다르게 칩니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상상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보십시오. 이렇게 두 손을 엉덩이 위에 올린 후 마구 두드리는 겁니다.”

“궁금한데 혹시 너희 행성 사람들은 엉덩이에 원수졌어? 그리고 손끼리 부딪치는 게 아니면 '박수'라고 할 수 없잖아.”

“지구인들이 손을 혹사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우리들은 박수가 아니라 '박덩'이라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지구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것을 알기에 저도 자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구인들의 엉덩이가 배설 기관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인간들의 방귀는 끔찍하더군요.”

나는 녀석의 배설 기관이 어디인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을 만난 지 고작 두 달이 넘었던가. 녀석이 돌아가면 나는 다시 평온하고 조용한 일상을 되찾을 것이다. 대뜸 터무니없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내게 어쭙잖은 투수 역할을 부탁하는 이도 더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찬,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때 녀석이 대뜸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그 오묘한 색깔의 눈동자 안에 오롯이 내가 들어찼다.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으나 대신 조그만 손이 내 손 위로 얹어졌다.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 찬을 두고 갈 생각에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제가 떠나면 찬은 혼자가 될까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꽤 기특한 생각이었다. 지구에 몇 달 머무르더니 그래도 인간의 감정에 공감하는 방법은 익힌 듯했다(나는 어느새 녀석이 외계인이라는 명제에 일절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는 너 없이 지냈던 시절이 더 길었어. 네 별 사람들에게 더 걱정 끼치지 말고 돌아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말해야 했다. 다만 어째서인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녀석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슈퍼문이 뜨는 날, 나는 진실로 이 손을 망설임 없이 놓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될 준비가 되었을까. 묘한 기분은 돌멩이가 되어 가슴 안쪽에서 굴렀다.

“착도 우리 별로 오시겠어요? 박덩을 인상적으로 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됐거든.”

“알겠습니다.”

기껏 감정 잡았더니 다 망했다. 하여간 눈치 없는 녀석이었다.

5. 지구인들은 왜

“찬은 왜 야구를 그만두었나요?”

그날 이후로도 녀석과 나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텅 빈 운동장을 함께 걸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따금씩 공을 주고받다가, 각자 기숙사에 돌아가면 녀석의 돌발 행동을 문자로 막아내다가 잠들었다. 녀석은 허락도 없이 내 일상의 일부를 차지해 버렸다. 그런 중에도 녀석은 간혹 조금 당황스러울 법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야구를 그만둔 이유를 어느 누구에게도 구구절절 설명한 적이 없었다. 원래 지구인들은 마음이 쉽게 변해.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는 그 정도로 얼버무리려 했다. 착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실 수 있습니까? 녀석은 강속구를 던지며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옛일에 이름까지 걸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 비록 녀석은 내 이름을 틀리게 말했지만 -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하려 말을 골랐다.

“내가 야구를 시작한 건 동생과 어울리고 싶어서였어. 아주 어렸을 적, 동생과 나는 바로 지금처럼 공을 주고받았거든. 그 녀석을 상대해 주기 위해 공을 잡은 나는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동생보다 야구를 잘하게 되었지.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녀석은 야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어.”

“동생의 실력이 훌륭하지 못했나 보군요.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좀 심합니다. 그런데 동생이 뭔가요? 글자가 오밀조밀해서 귀엽습니다, 꼭 엉덩이 같아요.”

“신랄하네. 내가 비정상적으로 잘했던 거야. 그리고 동생이란 나보다 어린 형제를 말해. 말해두건대 형제가 뭔가요? 이런 질문은 안 받아.”

질문을 원천 차단당한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을 여니 술술 흘러나왔다.

“동생은 무척 노력했지만, 구단의 어른들과 또래들에게 구박을 심하게 받았어.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다지만 그 애에게는 유난히 박했지. 그럼에도 그 애는 견뎌 보려 했지만, 괴롭힘이 심해지고 반쯤 강제적으로 그만두고 말았어. 반대로 나는 연습하면 할수록 좋은 선수가 되었는데, 기계적으로 공을 쳐내다 보니 깨달았어. 그 애와 함께하지 않는 야구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만뒀어. 화낼 줄 모르는 것 같았던 동생은 그때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고, 아직까지도 좀 어색해…….”

녀석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시 내게 공을 던져 주었다. 공은 포물선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녀석도 심란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는 하나 보군. 지구인들은 원래 서로를 괴롭히고 헐뜯기를 좋아해. 나는 덤덤한 투로 말하며 녀석과 나 사이에 떨어진 공을 주웠다. 그제야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녀석이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야구를 더 할 기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찬도요. 그러고는 나를 잡아끌어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그 녀석 손에 이끌려 가며 나는 괜히 내 뺨을 문질러 보았다. 거리낌 없이 털어놓은 만큼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녀석은 어떤 생각에 골몰하여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나 또한 정적을 깨기 어려워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태양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어렴풋한 별빛이 슬슬 깨어나고 있었다. 게으른 별들의 잠을 깨우러 온 반달이 옅은 빛을 발했다. 녀석이 떠나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시기를 가늠해 보던 내게 녀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제 별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른 별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별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만 지구는 고위험 구역으로 지정하여 민간인의 여행을 금하고 있습니다. 지구인이 위험한 종족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태여 듣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물었다. 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은 예의 내가 익히 짐작한 이유들을 늘어놓았다.

“지구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표준 규격 생명체'를 정해 놓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으면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갖춘 생명체 치고 유난히 배타성과 폭력성이 강하지요. 여러 사례가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건, 생식기 모양이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사랑하면 박해의 대상이 되는 점이었습니다. 지구인들은 서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게 분명합니다, 혹은 성적인 이끌림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녀석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다만 단출한 질문을 내어 놓았다.) “너희의 별은 그렇게 하지 않아?”

“우리 별뿐만 아니라, 문명을 갖춘 지적 생명체들은 대개 그러합니다.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이 어떤 대단한 무기를 가지고 지구를 침공하는 창작물을 만들어내고는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건대, 지구인들이 외계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와 꼭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처럼 독특한 생활 양식을 가지고, 맞서 싸울 무기 - 우리에게는 '무기'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조차 없는 종족들이라면 필시 화를 입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구와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내 어깨에 기대 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팔에 닿아 간질거렸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희는 동족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비슷한 외모로 비슷한 생활 양상을 공유하는 종족이 이 드넓은 우주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좁디좁은 지구에는 인간이 너무 많았고, 그들을 모두 사랑하기에 지구인들의 마음은 썩 넓지 않았던 탓이다. 녀석은 손을 내 손등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지구인들은 왜 서로를 헐뜯고 싶어 하는 걸까요? 동족인데도 말이죠.”

역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지구인들은 우주가 넓은 줄 모르니까. 지구인의 우주라고는 창문 한 칸짜리 밤하늘이 전부니까. 우주 곳곳을 자유로이 누비는 외계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 또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져 나는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주홍빛 하늘에 별가루가 뿌려지기 시작하던 저녁이었다.

6. 저마다의 방식대로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야구를 다시 하지 않을 거야.

며칠을 고민해도 그 문장을 이어갈 만한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단념한 지 오 초도 되지 않아 메신저 알림이 왔다.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 바로 나가시죠. 어제 하루 종일 엉덩이가 근질거렸단 말입니다.] 나는 그걸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 별 사람들도 엉덩이가 근질거린다는 표현을 쓰는 모양이지. 하긴 그렇게나 엉덩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관용 표현이 많을 만도 했다. 그렇다 해도 어제부터 근질거렸다는 건 설레발이 심했다. 하여간 대책 없이 철없고 해맑은 녀석이었다.

나 역시 준비를 진즉 마쳤기에 선뜻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시계를 보면 약속 시간은 삼십 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줄곧 남자 기숙사를 기웃거린 듯한 녀석은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 범상찮은 속도로 달려왔다. 내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도착한 녀석은 내 손을 꽉 붙들고 말했다. 찬, 지금 바로 가시죠. 당장이라도 나를 끌고 갈 기세였기에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앞장 서려고? 그 말에 망아지 같던 녀석은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참 쉬운 녀석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거든 녀석의 손이 내 손안으로 가볍게 들어왔다. 감겨 오는 온기에 나는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외계인 손이라서 그럴 것이라 넘겨짚고 말았다.

정류장에서 오 분 정도를 기다려 바닷가 근처로 가는 버스를 탔다. 녀석은 줄곧 버스 창문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찬, 저 거대한 것들을 산이라고 한다더군요. 저희 별에는 평지밖에 없습니다. 녀석은 줄곧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으며 나는 고개를 느릿느릿 끄덕였다. 어차피 녀석은 창문에 얼굴을 한껏 붙이고 있었으니 뒤통수에 대고 끄덕이는 꼴밖에 안 되었음에도 그랬다.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산이 뭐 별거라고. 그리 생각하며 나는 조금 열린 창틈 사이로 녀석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미리 주의를 줘서 다행이었다. 녀석이 말하길 외계인은 그 정도 사고로 죽지 않는다고 했으나 그러면 외려 더 이상한 꼴이 될 것 같았다. 내내 활기찰 것 같았던 녀석은 버스에서 내린 후 잠시 머리를 짚었다.

“버스를 타면 조금 어지럽군요. 하루 종일 머리를 사방으로 흔든 기분입니다.”

“어지럽지. 고생했네. 네가 왜 그런 기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계인들이 논쟁을 벌일 땐 그렇게 머리를 흔들곤 합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더 격렬하게 흔든 쪽이 이깁니다. 그건 그렇고, 저기를 보십시오. 파란 물이 끝을 모르고 펼쳐져 있습니다.”

말을 마친 녀석은 다시 망아지처럼 달려가 물에 빠지려 했다. 물에 발이 닿기 직전, 내가 겨우 녀석을 붙들었다. 신발 벗고 들어가. 다 젖으면 돌아갈 때 막막하거든. 녀석은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얌전히 양말과 신발을 벗어 두었다. 이내 발목까지 물을 담그고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발이 파랗게 변하지 않는군요. 나는 유치원생과 대화하는 것 같다고 느끼며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 바닷물은 파랗지 않아. 그렇게 보일 뿐이지. 녀석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으나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녀석은 한참 동안 물장구를 치고, 철벅거리며 바닷가를 종횡무진 돌아다니고, 때때로 고개를 숙여 조개껍데기 같은 것을 주워들었다. 그 모든 것이 제법 즐거웠는지 녀석은 계속 제 엉덩이를 때리려 했다. 젖은 손으로 엉덩이 때리면 돌아가는 버스 못 탄다. 내 만류에 녀석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불만의 표시인 듯했다.

꼬박 한 시간을 놀고 난 후, 녀석은 조금 차분해져 내 곁에 앉았다. 철썩이며 뭍으로 다가오던 파도가 발치에서 하얗게 부서졌다. 돗자리를 뒤로 옮겨야겠다, 물살이 밀려올 테니까. 녀석은 내 말에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였다.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녀석의 신경은 온통 저 바다에 쏠려 있었다. 저게 물살이군요. 저렇게나 쉴 새 없이 움직일 수 있다니 신기해요. 자기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뭐가 신기하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녀석이 다시금 말했다.

“저희 별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물이라는 물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인들은 물이 없으면 생명체가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자신들의 기준으로 모든 생명을 이해하려는 지구인의 오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바다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입니다. 지구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 하군요. 녀석의 말은 그렇게 맺어졌다. 물 없이 살 수 있다니, 나도 지구인이라서 상상이 잘 안돼. 내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대화의 공백에 파도 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지 않았지만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제 별로 돌아간 후에도 녀석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봐 줄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녀석의 마음은 바다처럼 들어찰 게 많을 테니까. 갖은 상념이 기세 좋은 파도처럼 자꾸만 밀려왔다가 포말이 되어 부서졌다. 녀석은 제 별에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다시 제 일상을 살아갈까. 그러던 중 잠깐이라도 내 생각을 할까. 가끔은 내 곁이 좋을 때가 있었다고 추억할까…….

내 생각을 알 리 없이, 잠시간의 휴식을 마친 녀석은 다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바닷가로 향했다. 물에 발을 담그기 직전, 녀석은 문득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바닷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녀석에게 부딪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나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하마터면 녀석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뻔했다.

“우주에는 별의 숫자만큼의 생명이 있고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상상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녀석은 내게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는 저문 지 오래였다. 버스 창가에 걸린 달을 바라보던 나는 며칠째 완성하지 못한 문자의 뒷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적어 전송했다.

실망시킨 건 미안해. 그렇지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에게도 나만의 목표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거든.

7. 나의 멋진 우주여, 안녕

그날 이후로 또다시 며칠이 흘렀다. 보낸 문자의 답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시간이 야속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녀석은 날이 갈수록 내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떠나기 전 마지막 밤에는 남자 기숙사에 들어오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떠나는 날이 되어 녀석과 나는 언제나처럼 운동장에 나왔다. 구름 하나 뜨지 않은 밤하늘에 슈퍼문이 눈부시게 빛났다. 꼭 대낮 같군요. 인간들의 관용 표현에 제법 익숙해진 녀석이 말했다.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도 뒤통수에 대고 끄덕이는 꼴이었다. 며칠간 마음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별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달빛이 오늘따라 눈을 시리게 했다.

녀석이 돌아가면 나 또한 평소대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녀석이 있기 전의 일상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녀석은 내게 꽤나 커다란 존재가 된 듯했다, 그 크기를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녀석이 빠진 일상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어느 무엇도 녀석과 같지 않을 텐데.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녀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중력이 되어 녀석을 이곳에 붙들어 놓고 싶었다. 그렇게 붙잡을 수 없다면 나를 떠나는 녀석의 마음이 가볍지 않기를 바랐다. 중력처럼 녀석의 발치에 들러붙어 떼어낼 수 없게끔, 잊을 수 없게끔 만들고 싶었다. 나답지 않은, 졸렬한 마음이었다. 녀석의 일이라면 무엇이나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워졌다.

끝내 붙잡지 않은 것은 지구가 녀석에게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녀석이 이곳에서 오래 지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나는 녀석의 옷자락을 쥐고 입을 달싹거렸다. 네가 없으면 쓸쓸할 것 같아. 사실은 조금만 더 있다가 갔으면 좋겠어. 돌아간 후에도 연락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말 수십 마디를 마음에 묻고, 녀석에게서 손을 거둔 채 나는 물었다.

“지구는 어떤 곳이었어? 돌아가면 어떻게 추억할 생각이야?”

“지구는 이상한 곳입니다. 산은 높지만 바다는 넓고, 지구인들은 사납지만 찬과 친구들은 친절합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만큼 서로를 사랑하려는 사람 또한 많은 별입니다. 위험한 곳이라는 평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녀석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 놀랍게도 썩 우습지 않았다 - 그 주위로 달빛이 모여들었다. 끝까지 반신반의했지만 애석하게도, 외계인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눈부신 빛 속에서 녀석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이내 입을 연 녀석은 유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별을 사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찬, 당신이 있는 별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던가. 목이 메어 말문이 막힌 나는 변변한 작별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그걸 아주 오래도록 후회할 것 같았다. 한데 모였던 빛무리가 서서히 걷혀 갔다. 눈이 시렸다. 눈이 따끔거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나는 눌러 참았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조심해서 가. 그 말을 어렵사리 내어 놓으려던 차.

“그러니 조금 더 머무르려 하는데, 그때까지 신세를 질 수 있을까요?”

녀석이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얼떨떨한 낯을 한 내게 다가온 녀석이 내 손을 잡았다. 당분간 지구에 체류할 거라고 전했습니다. 제가 없으면 찬은 다시 혼자가 되잖아요. 녀석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녀석의 손은 언제나처럼 내 손 안에 꼭 감겨들었다. 대책 없는 기쁨이 나를 압도하기 전 나는 다급히 물었다.

“여기 있어도 돼? 다음 슈퍼문이 언제 뜰 줄 알고?”

“구태여 자연 현상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동네 슈퍼의 문을 들어 올리며 춤을 춰도 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 그것도 슈퍼문이 뜬 걸로 쳐 주는 거야?”

그게 뭐야, 정말 엉터리네!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은 천천히 표정을 바꾸었다. 잠시 후 지어낸 표정은 나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우리들은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따라 할 수는 있죠.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 녀석을 끌어당겼다. 녀석은 가볍게 내 품에 안겼다. 이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 허리에 녀석의 팔이 감겨 왔다.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다음에는 녀석의 방식대로 녀석을 사랑해 주고 싶다고. 그 방법을 가르쳐 달라 하겠다고. 지구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이라 해도 좋았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별에 불시착한 사람들이니 각자의 모양이 다른 게 당연했다.

전혀 다른 모양이라 해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가슴에 전해질 것이다.

그래, 형.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욕심 때문에 형을 몰아붙였던 것 같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형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행복해지기를. 언제나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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