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우리의 파랑

春雪 by 현명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하루 종일 새카맸다. 푸름 한 점 없는 하루의 끝에서 나는 그 사람을 생각했다.

장마철도 아닌데 날씨가 몹시 궂어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길부터 길이 꽉 막혀 늦을 뻔했고 연습실에 당도하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젯밤 창문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연습실로 비가 온통 들이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악기는 습기를 잔뜩 먹어 축축 처지는 소리가 났다. 평소 실수가 잦았던 단원들은 오늘따라 더욱 부진하여 연신 사과를 해 왔다. 악장님, 정말 죄송해요! 공연이 얼마나 남은 줄 알기나 하느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꾹 삼킨 채 나는 평소처럼 답했다. 괜찮습니다. 못된 마음을 잘 접어두고 나는 종종 창밖을 내다보았다. 적당히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져 갔다. 연습 시간은 점점 늘어지고 나는 점차 조급해졌다. 평소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독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마음이 수런거렸다, 나는 짜증을 짓눌러 참으며 강박의 원인을 생각했다. 엉망으로 놓인 생각 더미들 사이에서도 어렵잖게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카페는 열 시에 닫지 않던가, 지금 당장 전속력으로 밟아도 늦겠는걸……

단원들은 끝마칠 때쯤 나에게 시간이 지체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차에 올라탔다. 시간이 몹시 늦었으므로 길은 막히지 않았다. 거센 빗줄기가 차창을 때려 댔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했어요. 오늘만큼은 이불 안에서 푹 쉬도록 해요. 대충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에서 DJ가 느긋한 소리를 해 댔다. 그걸 거슬리게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나는 정말이지 가공할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나를 막아세우는 적색 신호를 가만 노려보고 있노라면 한가로운 목소리의 라디오 DJ가 한소리를 해 왔다.

오늘은 비가 정말 많이 왔지요? 내일은 무지개가 뜰지도 몰라요.

  하루유키에 도착하면 아슬아슬하게 열 시를 못 넘긴 시간이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시간에 들이닥치면 분명 폐가 되리라. 마감 시간이 임박했는데 구태여 복잡한 메뉴를 시키는 진상을 험담하는 글을 수없이 접한 나는 문화 시민의 소양을 발휘하여 집에 돌아가려 했다. 그때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우리 애기가 오늘은 조금 늦었구나…….

연습이 조금 지체되어서요…… 그것보다, 애기라고요? 내가 당황한 투로 되물어도 그 사람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늘은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웃음을 마주하고 있으면 무가치한 의문은 자연히 퇴색되었다. 어서 들어오렴, 따뜻한 코코아라도 타 줄게. 매끄러운 목소리에 홀린 듯 나는 그 사람의 뒤를 따랐다. 어쩐지 그 사람의 말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종종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티스푼으로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를 쿡쿡 찔렀다. 이런 디테일은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나는 가르친 적 없는데…… 배가 아주 뚱뚱한 마시멜로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자면 사월이 웃으며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단다,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음료를 팔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지.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평범하게 카페에서 파는 맛이 났다. 처음 맛보았던, 도저히 못 먹어줄 맛이었던 코코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의 전개라면 몇 번의 시행착오를 더 거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벌써 쓸모를 다한 건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나에게 사월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주 맛있네요, 괜히 요식업에 종사하시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군요. 나름의 칭찬(최선이다)을 건네거든 사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평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피곤하시면 들어가 보세요, 제가 괜히 붙잡고 있는 건가 싶어서요……

왜? 내가 평소와 다르니?

오늘따라 말수가 적으셔서요. 평소 같으면 일취월장한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셔야 할 텐데요.

그 말에도 사월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평소보다 확연히 차분해 보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다던데 사월 씨도 그런 부류인 걸까. 나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도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맥없이 끊겼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걱정일지 참견일지 모를 잡담을 늘어놓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어려웠다. 그럼에도 말이나 붙여 보고 싶은 건 역시 사월과 제멋대로 가까워졌다고 느끼기 때문일 터였다. 나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나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렴…….

그러죠 뭐.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긴 채 덤덤한 투로 답했다. 눈을 슬쩍 굴리면 진한 블랙 커피가 시선에 닿았다. 밤인데 이렇게 진한 커피를 마셔요? 이러시면 잠 못 자요. 내가 타박하면 그 사람은 웃는 낯으로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투로 답변하기를, 오늘은 어쩐지 잠들고 싶지 않아서……. 이내 눈까지 접어 웃어 보였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그 감정만큼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외로움이었다, 그것도 무척 오래된.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네요.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켜 그 사람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 사람은 종이 울리듯 맑은 웃음소리를 흘려낸 후 말했다.

네가 없는 동안 네 생각을 했단다.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고.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이지만, 네 생각을 벗삼아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의무가 막중하네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세요. 웬만한 건 다 알고 계시니까, 그리 재미있는 대답은 못 해 드리겠지만요.

나는 스물 중반이고 바이올린을 조금 켤 줄 안다. 일본에는 어느 악단의 객원 연주자로서 들렀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사월에게 알려준 바 있는 사실들이었다. 어떤 비밀이 있긴 하지만, 거의 처음 만난 것과 다름없는 사람에게 대뜸 털어놓고 믿어 달라 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애석함을 느꼈다. 내가 말주변도 좋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을 덜 외롭게 해 주었을 텐데…… 그때쯤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사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있지, 너는 무슨 색을 좋아하니?

아,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다. 이제껏 나에게 좋아하는 색 따위를 물어본 사람은 없었고 나 역시 생각하지 않았었다. 수많은 색이 존재한다 한들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세상은 그저 단조로운 무채색일 뿐이다. 비 내리는 밤, 어두컴컴한 하늘을 뒤로한 채 나는 문득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하늘의 색채가 그 사람의 눈 속에서 반짝 빛을 냈다. 그 색을 마주하고서야 깨닫는 것이다, 유채색의 세상에는 저마다의 색깔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고. 그 푸른 눈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답했다.

파란색을 좋아해요.

우연이구나, 나도 파란색을 좋아해.

그 말을 하며 사월은 나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나의 눈동자 역시 푸르렀다.

…… 그것뿐 아니라 분홍색도 좋고, 노란색도 좋아해. 장마철이 지나면 나의 정원에는 노랗고 탐스러운 해바라기가 핀단다. 사월은 제법 명랑한 목소리가 되어 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하루유키의 정원을 슬쩍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웬 커다랗고 억세 보이는 풀이 자란다 싶더니 그게 해바라기였던 모양이었다(나는 식물에 대해서 정말이지 조금도 모른다). 그 사람이 밝게 늘어놓는 이야기들이 오늘따라 더욱 달가웠다. 사월은 역시 활짝 웃고 해맑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차분하고 우울한 사월과 지금의 사월, 둘 중 어느 것이 진면목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바라기가 피면 정원에 놀러 오렴. 예쁜 사진을 찍어 줄게.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사월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의 눈을 응시했다. 놀러 오라니…… 여기서 문만 열고 나가도 정원인데요, 뭐. 나는 멋쩍은 투로 답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푸른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조금 간질거렸던 탓이다. 확실히 오늘의 사월은 평소보다 조금 별났다. 어쩐지 갈증이 나서 자꾸 목을 축이다 보니 코코아는 금세 동이 났다. 애꿎은 코코아 잔이나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자니 사월이 또다시 무언가 물어 왔다.

너는 어떻게 살아왔니,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말해줄 수 있겠니?

그 말에 나는 순간 어떤 비밀을 털어놓을지 고민했다. 그 비밀을 빼놓은 옛날 이야기는 다소 공허할 테다. 그럼에도 나는 괜히 사월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사월 씨는 조금 특이하지만 상냥하고 의지가 돼서, 오래 함께할 수 있었으면 했고…… 내가 상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월은 조금 저자세로 덧붙여 왔다. 나쁜 뜻으로 물어보는 건 아니란다. 주제넘었다면…… 나는 고개를 젓고 이내 입을 열었다. 결국 비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못 말해 드릴 건 없죠. 대신 다음에는 사월 씨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저는 좋아하던 애를 따라서 바이올린을 시작했어요.

어머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니? 시작이 낭만적이네.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시작이네요. 음, 저랑 닮았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다른 애였어요. 그 애가 바이올린을 그만뒀을 때, 저라도 그 연주를 이어가고 싶어서 더 악착같이 이어갔어요. 그 애는 바이올린을 정말 잘 켰거든요. 연주 기술로만 따지면 제가 더 우수하지만, 그 애가 선율에 감정을 담아내는 것만큼은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어서……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슬쩍 사월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식물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듯 이 사람은 바이올린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별얘기도 안 했는데도 그랬다. 몰두한 그 사람의 눈동자에 용기를 얻어 나는 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지만 따라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제 연주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더 많이 연주하고 더욱 인정받아 뛰어난 연주자가 되고 싶어, 나만큼은 절대로 바이올린에 소홀해지지 말아야지. 그 생각만으로 바이올린을 켰어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바이올린 연주가 전혀 기쁘지 않게 된 거예요.

내 안의 기쁨을 잊은 채 타인의 끊긴 자취를 좇아 살다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랬구나…….

그래요, 그래서…… 지난겨울은 외롭게 보냈어요. 홀로 달려나가다 보니 곁에 머무르는 사람은 전혀 없었거든요. 괜히 담배도 한번 피워 보고 정처 없이 걸어도 보고, 그럼에도 외로움을 밀어내지 못한 채 긴 겨울을 견뎠습니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일본에 온 건 다른 사람과 함께 연주를 하고 싶어서였어요, 이왕이면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요.

다른 사람과 연주하는 건 어땠어? 도움이 조금 되었니?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그렇진 않아요. 여전히 바이올린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거든요. 쉼없이 켜야 할 이유가 생기니 나태해지지 않을 뿐입니다. 일본에 와서 가장 도움이 된 건 바로 사월 씨예요. 사월 씨를 만나서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네요. 외로움도 덜하고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건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목이 슬슬 탄 내가 괜히 빈 컵을 쳐다보고 있으니 사월이 우유를 따라 주었다. 아주 옅게 코코아 맛이 나는 우유를 마시며 나는 사월을 슬쩍 보았다. 사월은 기뻐하는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슬픈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월은 특유의 천성으로 너무나 진지하게 들어 버린 듯했다. 구태여 말하지 않으려 했던 약점이나 비밀 따위도 저 사람 앞에서는 술술 털어놓게 된다. 저렇게까지 자기 일처럼 생각해 주니까.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내 모든 이야기를 꺼내 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싫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외로운 걸 정말 싫어하거든. 네가 외로웠다니,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아서…….

그 말을 끝으로 잠깐, 사월과 나는 말이 없었다. 세찬 빗소리가 우리의 정적을 가득 메웠다.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 참,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내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며 사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픈 마음을 감추고 싶어한다는 걸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도 지독하게 외로웠나 보구나,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의 외로움에 쉬이 감화되어 버릴 만큼. 나는 얼떨결에 그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미미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카페의 문이 열리면 서늘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옷을 조금 적셨다. 그 사람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나는 사월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이 말을 하지 않고서 돌려보내면 이 사람이 또다시 외로운 밤을 보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외롭지 않았다면 구태여 일본까지 와서 사월 씨를 만날 일도 없었을 거예요. 비가 많이 내려 우중충한 하루를 보냈대도 다음날 무지개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저에게는 사월 씨가 그래요.

사월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말간 웃음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머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나는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능청스럽게 답했다. 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급하게 배웠죠. 사월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숨을 들이쉬면 보드라운 꽃향기가 났다. 거센 빗소리보다도 그 사람의 조그마한 숨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다음에 오면 약속한 대로 내 이야기를 해 줄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그 사람과 눈을 맞추면 영롱한 파랑으로 세상이 물들어 갔다. 어쩌면 무지개가 뜨지 않아도 괜찮을지 몰라, 밤의 장막을 걷어내면 이 눈처럼 파아란 하늘이 펼쳐질 테니까…….

비가 많이 오는구나. 조심해서 가렴. 그리고 꼭 다시 와야 해.

그럼요. … … 있잖아요, 저도 당신 생각을 많이 했어요. 밤이 너무 길면 연락 주세요.

응,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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