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찰나의 존재

FF14 고대인 AU

春雪 by 현명

믐이님 커미션

해: 테티스

사월: 오케아노스

01.

미트론 학술원의 유망한 학자인 나, 테티스의 ‘평생’을 바친 연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검증을 마쳤고, 다양한 개체에게 적용 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기만 하면 수생 생물학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을 텝니다.

나는 편안한 의자에 기대 앉아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위업을 이루고 나면 별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찌감치 죽고자 하는 열망은 없었지만 - 물론 고대 세계에서 ‘죽는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만 - 별달리 더 살아갈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 별에서 해야 할 일은 완수했으니 돌아가는 게 순리에 맞을 것입니다. 참으로 정석적이고 지극히 일반적인 생애였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만족했습니다. …… 지금 생각해 보거든 어쩌면 체념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02.

며칠 후 나는 엘피스로 향했습니다.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론을 검증하는 데에는 그만한 장소가 없잖아요.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흰 로브를 입은 자를 마주쳤습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엘피스라지만 얼굴을 훤히 드러낸 채로 거닐고 있기에 거의 평생을 아모로트에서 지내 온 저는 조금 놀랐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은 할마루트 학술원에서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난 학자였다던 ‘오케아노스’였습니다. 한때 차기 할마루트로 거론될 만큼 그는 식물 창조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아름답고 우수한 식물 품종들을 무척 많이 창조해 냈기도 하고, 실패작으로 꼽히던 식물들도 오케아노스의 손길을 거치면 뛰어난 품종으로 개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14인 위원회에는 전혀 뜻이 없어 거절했고 학술원을 떠난 이후에도 흰 로브를 입은 채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점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업을 달성하면 만족한 채 별바다로 돌아가길 택하니까요. 세상이 무어라 수군거리든, 그는 매우 오랜 세월을 이 세계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좌우지간 제가 그런 유명인사를 못 알아볼 리 없죠. 그 사람은 자신이 창조하여 엘피스에서 두루 길러지는 꽃들을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기척을 눈치챈 그 사람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

- 옆에 앉겠니?

나는 얼결에 그 사람의 곁에 앉았습니다. 저는 테티스라고 합니다. 그리 소개하니 그 사람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테티스, 이걸 보렴. 이 꽃들은 내가 창조해 냈단다. 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별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벅차는지 몰라. 그 사람의 노래하는 듯한 음성에 나는 절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첫만남부터 나는 그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인은 외모 같은 걸 평가하는 일이 없으니 그 사람의 모든 면모에서 어떤 반짝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서로의 곁에 앉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고, 자연스럽게 헤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하루가 가 버린 줄 알았습니다.

03.

연구가 길어져 나는 엘피스에 제법 오래 머물러야 했고 학식이 뛰어난 오케아노스는 기꺼이 나를 도왔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연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쉬울 정도로요. 나는 문득 그 사람이 왜 별바다로 돌아가지 않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에둘러서 넌지시 물어도 그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빙긋 웃기 일쑤였습니다. 비겁한 짓이라는 건 알았지만 저는 엘피스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행보에 대해 종종 캐묻곤 했습니다.

- 글쎄요. 그분의 속내를 아는 사람이 세상 어디 있을까요? 그분은 뭐랄까…… 섬세하시잖아요. 대부분의 인류는 그를 이해할 수 없겠죠.

- 전대 아젬인 베네스 님께서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별에 남으셨지만, 오케아노스 님은 저희도 그분의 의중을 알 수 없어요……, 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명 말고도 살아갈 이유 같은 게 있으신 걸까요?

- 잘은 모르지만 오케아노스 님께서는 종종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계세요. 뭐랄까, ‘쓸쓸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다는 표정 말입니다. 저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죠. 엘피스와 아이테리스는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차 있잖아요.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진심을 털어놓지 않은 듯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그 사람은 정작 자신에 대한 것만큼은 도통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걸까요, 혹은 체념해 버린 걸까요? 마치 저처럼요.

04.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지만, 정작 서로의 내면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케아노스는 늘 가면을 벗고 지냈지만 나는 그 사람 앞에서 한번도 가면을 벗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없으면 몹시 허전해지곤 했습니다,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하루는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 이 별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아. 별바다로 돌아갔다 오면 잊어버리고 말겠지, 내가 이 많은 것들을 사랑했다는 사실조차도……

- 음, 그게 왜요?

- ‘그게 왜요’? 너는 너무 냉정해.

그 사람은 토라져서 나를 두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는 쩔쩔매며 그 사람을 달랬지만, 그때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연구가 마무리되던 날, 그 사람이 문득 내게 물었습니다.

- 이 연구를 보고하고 나면 별바다로 돌아갈 생각이니?

- 그러겠지요. 별에 기여할 만한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할 일이 끝나고 나면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 ‘다들’ 그렇게 하지. 그렇지만 ‘너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아? 별에 기여하는 존재가 아닌 그저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건 어떠니?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 이곳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별을 만들고 싶어하면서 정작 별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하지는 않아.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래서 발길을 붙잡혀서…… 계속 살아가고 싶은 곳이야말로 완벽한 별이 아닐까? 다들 무엇에 부족함을 느끼는 거지?

평소와 다르게 그 사람은 조급하고 불안해 보였습니다. 나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별을 떠난다 해도 우리의 영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별바다에 흘러들어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겠지요. 그 순환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것인가, 나름의 이해를 해 보려던 차.

- 다들 왜…… 변해 버리고 싶어하는 걸까?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사람은 변화가 두려운 겁니다. 누군가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 버리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겁니다.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별바다에 녹아들며 느낄 외로움에 겁이 났던 겁니다. 그 마음을 깨우치기 무섭게 오케아노스는 이상한 말을 했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05.

나는 그 사람을 겨우 뒤쫓았습니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제가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타입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노오란 꽃밭 앞에 멈춘 후에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보다 커다란 꽃을 올려다보며 꽃잎을 어루만졌습니다. 오케아노스가 창조했다는, 해를 향해 고개를 드는 꽃이었습니다.

- 제가 떠나지 않았으면 하나요?

- 그렇다고 하면 떠나지 않을 거니?

-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나중에 판단을 내릴 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죠.

그 사람은 내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 사람을 뒤쫓느라 가면이 벗겨져 버렸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와서 얼굴을 가리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나는 가리는 것 없이 그 사람의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연한 파란색이었습니다, 사시사철 푸르르고 아름다운 엘피스의 하늘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 …… 떠나지 않으면 안 되니?

- 왜 그러기를 바라나요? 저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 아니, 네가 떠나면 분명 내가 외로워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론상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우리가 서로와 마주친 건 그저 찰나의 순간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찰나의 존재인 나에게 마음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맑은 하늘을 닮은 눈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수런거렸습니다.

06.

나는 아모로트로 돌아가 연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예상대로 나의 연구는 유의미했고 그 성과는 널리 칭송받았습니다. 드디어 검은색 로브를 벗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별바다로 돌아갈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나는 삶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 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흰 로브를 입고 다시 엘피스를 찾았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꽃밭 앞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사람의 어깨를 감쌌습니다. 그 사람의 놀란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말한 걸 모두 이해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렇기에 떠나려고 했습니다. 괜한 시선을 감내할 만큼 삶에 대한 열망이 큰 것도 아니고, 무언가 미련이 남았던 것도 아니거든요…….

- 그러면, 왜……?

- 그럼에도 당신을 다시 보고 싶었고, 당신과 함께이고 싶었습니다. 그뿐이에요.

그리하여 우리는 흰 로브를 입고 줄곧 함께였습니다. 시간과 운명이 허락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별에서 함께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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