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히카] 같이 잠들 수 있는 사이
20.10.06 작업 완료
※ 공백미포함 2,343자.
※ 2020.10.06. 작업 완료
※ 드림요소가 다분하며, 특정 빛의 전사와 '그 사람'의 설정 묘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 에메트셀크와 '그 사람'이 연인임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 파이널판타지14 칠흑의 반역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설정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이 잠들 수 있는 사이
1.
피네는 오늘도 에메트셀크의 품 안에서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이는 것은 어느 실내, 그리고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폭신함…. 팬던트 거주관이다. …아, 나무 위가 아니네. 주변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이젠 저를 품에 가둔 자에게로 향한다. 그는 저보다 머리통이 하나 이상 더 컸지만, 마주 누워있으니 눈높이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나무 위였는데. 이곳으로 데려와줬나보다. 골몰히 생각해본다. 보나마나 나무 위에서 잠든 그에게 기댔다가 또 잠들었을 테지. 흔하디흔한 일상 중에 하나였다. 쿡쿡 웃은 피네가 에메트셀크의 얼굴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2.
그렇다면, 기억해라. 우리는 분명 살아있었다는 것을.
에메트셀크와의 결전을 치르고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곧 어둠의 전사 일행은 기절초풍할 만한 일을 겪게 된다. 분명 자신들의 손으로 쓰러트려 소멸을 목도했던 에메트셀크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으므로. 산크레드는 당장이라도 그를 공격할 기세였고, 그것은 알피노와 알리제도 마찬가지였다. 린과 위리앙제, 야슈톨라는 비교적 침착해보였으나 그들 역시 당황한 듯해보였다. 모두가 전투를 각오하고 있을 때, 피네는…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약간은 휘둥그레진 눈을 그저 깜박거릴 뿐이었다. 다시 나타난 에메트셀크에게서 제일 먼저 이상함을 눈치 챈 것은 린과 야슈톨라였다. 그의 에테르가 심하게 옅어져 있다고. 미처 사라지지 못한 잔재 같다고 했다.
그들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의 환영도시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그의 방대한 마력과 에테르는 완전하게 사라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어둠의 전사 일행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는 지켜보고 싶다고 했다. 판정에서 너희가 승리했고 더 이상 너희들에게 개입하지 않을 테니, 너희가 얼마나 이 세계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지 보이라고 했다.
한 차례 혼란이 지나가고 나서, 에메트셀크는 피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피네는 그에게 웃어보였다. 에메트셀크가 웃었던 것처럼, 오랜 친우를 반기는 것처럼 웃어보였다. 이 기묘한 생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3.
이후로는 ‘새벽’이 놀랄 일들 투성이였다. 상상해보라. 잠든 영웅을 깨우러 왔는데 아씨엔과 같이 잠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한 ‘새벽’의 심정을. 하지만 ‘새벽’은 곧 익숙해지고 만다.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고, 더 이상 적대심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야슈톨라에게도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처음 있던 일들이 아니었다. 생전의 에메트셀크-이걸 생전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상태인지 의구심이 들지만 넘어가기로 하자.-에게도 그랬지만, 피네는 유난히 에메트셀크에게 유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잘 웃고 말이 많아지는 것은 가벼운 수준이다. 에메트셀크를 졸졸 쫓아다니며 아이처럼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치곤했다. 어떤 때는 요즘처럼 같이 잠들기도 했다. 에메트셀크는 자꾸 자신에게 달라붙는 피네를 귀찮다, 귀찮다 하면서도 내치지는 않았다. 받아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같이 잠들 정도로 편한 상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그런 일들을 목격하는 경우는 적었다. 그 동안은 대죄식자를 토벌하러 여행하는 중이었고 에메트셀크가 내내 그들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빈도 수 자체가 압도적으로 적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대죄식자는 모두 토벌되었으며 피네에게 축척되어 있던 빛도 없어졌다. 더 얹어서 피네는 비로소 ‘피네’다워지고 있었다. 싸울 이유가 없는 에메트셀크로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가 ‘그’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한층 더 짙어진, 그립고도 그리운 혼의 색 앞에서. 또 눈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그의 경계도 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둘은 서로가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상대였고… 그 말인즉슨, 둘이 붙어있는 상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는 뜻이다. 주로 피네가 찾아가는 쪽이었지만 말이다.
4.
피네는 생각한다. 이 이유모를 편안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나’라서 그런 거라면, 또 에메트셀크 역시 내가 ‘나’라서 그런 거라면. 아, 나는 ‘나’가 맞구나. 그 사실은 놀라울 만큼 피네에게 안정감을 준다. 아직 정체성이 흐릿한 그였다. 그런 그는 자신에 대해서 알아갈 때마다 거대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내 상태를 보자마자 알아챈 것도 에메트셀크,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서 알려준 것도 에메트셀크…. 하지만… 하지만 조금 달라. 생각보다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끌렸던 걸까. 아니, 아니다. 나는 최근까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상태였어. 보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
…휘틀로다이우스가 말하길, ‘나’는 그와 각별한 사이라고 했지. 그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과 미련을 가졌듯이, 이것 역시 ‘나’의 일부인걸까. 영혼의 끌림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그와 잠자리를 가졌을 때, 그가 애타게 불렀던 ‘나’는 그와 연인이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피네는 ‘피네’가 아니었고, 그것은 둘 다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서로에게 가지는 감정도 크게 발전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싫어하지 않는다.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은 없다, 하지만 편안하다. 딱 그 정도. 그 정도였다.
5.
조심스레 뻗은 손은 순수 갈레안의 특징이라는 제3의 눈에 닿았다가, 천천히 내려와 잔뜩 일그러진 미간에서 멈췄다. 잘 때는 좀 피면 좋을 텐데. 조금은 힘을 담아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더니 잠들어있는 줄 알았던 그가 눈을 떴다. 옅은 노란색의 눈동자가 두어 번 깜박이더니 곧 한숨을 내쉬었다.
“더 자라….”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마법 같던지. 분명 말짱히 깨어있었음에도 잠의 수마가 밀려오는 것이다. 점점 감겨드는 눈꺼풀을 이기기 힘들었다. 피네는 더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항복하기로 했다. 꼬물거리며 더 안쪽으로 파고들자, 머리 위에서 허, 하고 기가 차단 소리가 들렸으나… 에메트셀크도 그를 더 밀어내진 않았다. 오늘 늦잠을 자면 다 당신 탓이야. 졸린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에메트셀크도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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