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유 몽블랑] 의지의 증거
20.10.06 작업 완료
※ 공백미포함 2,343자.
※ 2020.10.06. 작업 완료
의지의 증거
1.
루리리의 진화 조건은 트레이너와의 친밀도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트레이너와 함께 한 시간이 길수록 진화하기가 쉬워진다. 하지만 츠유 몽블랑의 루리리는 아직도 진화를 하지 못했다. 둘이 친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다. 그의 루리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애초에 그가 부화할 수 있도록 보살핀 것도 츠유 몽블랑이었다. 즉 짧지만 길지 않은 루리리의 평생은 츠유 몽블랑과 함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루리리는 진화하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진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친밀하지 않거나, 혹은 진화를 할 만한 결정적인 다짐이 부재한다거나.
2.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그를 배경으로 리자몽이 날아가고 있었다. 참으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었으나, 정작 그 위에 앉아있는 츠유 몽블랑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가보다. 그가 리자몽 플라이트를 이용할 때면, 보통 그는 아래로 지나가는 풍경과 파도를 보면서 자신의 포켓몬으로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게 아닌가 보다. 그는 드물게 그러지 않았다. 멍하니 있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걸까.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축제에서 자신이 뽑은 얼음Z크리스탈의 모형이 만져진다. 라울레아 페스티벌에서 얻은 물건이다. 마릴 인형 등, 뽑은 물건들은 많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단언컨대 이 모형이었다. 가짜인지라 Z기술도 쓸 수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츠유 몽블랑에게 꽤나 큰 계기로 다가오게 되었다.
진짜 Z크리스탈도 얻어보고 싶다, Z기술은 어떤 느낌일까, 내 루리리도 얼음타입 기술을 배우고 있으면 얼음Z를 쓸 수 있다는 거지…. 손 안에서 굴릴수록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덕분에 하마터면 눈앞에서 집을 지나칠 뻔했다. 이런 점은 제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 상황을 보지 못하는 것. 아버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몽블랑!”
“…어. 어? 아빠?”
“집에 오는 거 아니었어? 또 어디 가니?”
“…아? 아…. 다른 생각 하느라고 그만. 다녀왔습니다.”
“그래. 축제는 즐거웠니?”
“응. 코디네이터 언니도 만나고, 유명한 사장님도 만나고, 같이 신오지방 출신인 친구도 만났어.”
“그래? 혼자 간대서 좀 걱정했는데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밥 먹을 거지?”
“응. 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엄마는?”
“논문 쓰는 중이지. 덕분에 후딘이 초-긴장 중이야. 사실 방금도 주전자에 물 올린 걸 잊었던 모양이더라.”
“엄마답다.”
“어쨌든 들어와. 오늘 온다고 그래서 방 청소해놨어. 짐 정리하고, 씻고 내려와.”
3.
“아이고~”
츠유 몽블랑이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즐길 때는 신나게 즐겼는데, 축제가 끝나고 나니 후폭풍이 몰아쳐 오는 모양이다. 온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옆에 루리리도 털썩 누운 걸 보니 얘도 지친 모양이다. 픽 웃고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얼음Z크리스탈을 꺼내본다. 빛에 비춰보니 한층 더 예쁘게 반짝인다. 그 빛에 매료된 듯 말없이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츠유- 하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만지작거리던 Z크리스탈 모형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부엌으로 내려간다.
1층으로 내려가 마주한 부엌의 식탁은 아주 풍요로웠다. 화려한 음식들에 걸맞게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곧 수저가 식기에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긴 맛있는데…. 몇 번 깨작거리던 츠유 몽블랑이 입을 연다.
“저기… 있잖아. 나… 여행해보고 싶어. 신화도… 연구해보고 싶은데….”
“…으응?”
부모님이 눈을 깜박였다. 아니, 반대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좀 해줄래? 부모님들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딸이 아닌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 건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하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아이가 갑자기 목표가 확고해져서는 돌아왔지 않은가. 부모된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이야기를 듣고 싶은 법이다. 츠유 몽블랑은 심호흡을 했다. 축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제일 먼저 주머니에서 모형 얼음Z크리스탈을 꺼냈다.
“어머, Z크리스탈 아니니?”
“진짜는 아니고 모형이야. 축제 때 뽑기 기계에서 뽑은 건데….”
4.
“루리리, 잠이 안 와?”
마당에서 제 꼬리를 타고 앉아있던 루리리가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제 트레이너다. 루리리가 방긋 웃으며 츠유 몽블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후후 웃으며 루리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선 현관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이 안 오는 건 루리리 혼자만이 아니었나보다.
“있지, 루리리. 난 며칠 후면 여행을 떠날 거야. 섬의 시련들도 받게 되겠지. 모든 시련들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Z크리스탈을 하나씩 얻어가는 거야…. 난 말이야, 내가 신화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지도 몰랐다?…”
츠유 몽블랑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형 얼음Z크리스탈을 얻었을 때의 느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앞으로의 계획,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한참을 그리 이야기했다.
“…그래서 모든 Z크리스탈도 모아보고 싶고, 여행하는 김에 메가스톤과 키스톤도 얻어보고 싶어. 아! 우리의 고향인 신오지방의 배지도 모두 모아보는 건 어떨까? 그곳은 신화가 가득한 곳이잖아. 연구원으로서의 시작을 끊기에도 아주 좋을 거 같지! …그래서 말인데, 루리리.”
루리리를 부르는 츠유 몽블랑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마냥. 그가 심호흡을 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던 아까와는 다르게 눈빛은 많이 진중했다. 이어져 나오는 말에서는 굳은 의지가 묻어져나왔다.
“앞으로의 내 여행에서, 내 ‘진짜’ 파트너가 되어줄래?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함께 여행하는 거야. 같이 수련을 통과하고, 같이 배지를 얻고, 같이 조사하러 다니는 거야. …어때?”
루리리가 눈을 깜빡였고 이내 활짝 웃으며 기쁜 울음소리를 냈다. 이내 한밤중에도 눈부신 빛이 나더니….
5.
“이, 이건…. …어서 와, 마릴…! 앞으로도 잘 부탁해…!”
6.
그럼에도 루리리는 진화하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혹은 진화를 할 만한 결정적인 다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딛는 그 한 걸음, 작은 발걸음이 부족해서. 수많은 고민 끝에 이를 이루어낸다면, 그는 기필코 진화하리, 의지의 증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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