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 바론
1기
15.07.04 작성(추정)
처음, 소리는 가파른 곳에서 들려왔다. 산짐승의 기척이려니 했으므로 본래는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쳤을 일이었다. 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아, 으. 누가, 좀. 나단은 비좁게 씩씩 새어나오는 짐승의 난폭 곁으로 작은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향했다. 부유 마법은 허공에서 얼마간 계단 노릇을 해주었다. 그리 높지 않은 벼랑 아래로는 멧돼지의 등허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멧돼지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는데, 곧 동굴 안쪽으로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나단은 대강의 정황을 이해해냈고,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마나볼은 간편하게 멧돼지를 떨어트려냈다. 모양 좋지 않게 너부러진 멧돼지의 시체를 뒤로 하고 섰을 때, 나단은 붉게 헝클어진 살을 봤다. 바론은 숨을 몇 번, 몰아쉬다가 겨우 나단을 올려다봤다. 입구도 안도 좁은 동굴은 바론을 멧돼지에게서 어느 정도 격리시킬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물러설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단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왜 여기 있어요? 바론.”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겠지만, 필요한 말이었다. 나단은 저편으로 밀려나 있는 멧돼지의 시체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동굴 안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바론은 움츠러든 채로 숨을 몰아쉬다가 별안간 단정한 표정으로 여며졌다. 바론의 손안에서는 힐링이 희미하게 생겨났다가 잦아들었다.
“나는 성직자잖아요. 다 치료했어요.”
“그런데 마력을 다 쓴 것 같고.”
“……별로 안 다쳤어요.”
“아닌 것 같은데.”
나단은 무표정하게 바론을 내려다봤다. 바론이 입고 있던 사제복은 엉망으로 더러워져 있었는데, 무릎걸음을 했든지 뒹굴었든지 어떤 형태로든 짐작해낼 수 있는 자국들이었다. 바론은 옷을 탈탈 털고 몸을 일으켰고, 입구를 막아서듯 서 있던 나단은 나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걸음은 오래지 않아 끊어졌다. 바론은 일어나자마자 무너질 듯이 비틀거리다가 끝내는 세 걸음 째에 앞으로 넘어졌다. 아야. 아픔은, 마른 바닥에 무릎이 부딪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단은 보고 서 있다가 다시 바론의 앞으로 가 섰다. 그대로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마주했을 쯤에는, 벌써 풀린 표정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화랄 게 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
“뭐,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랬네요.”
“그러니까, 다친 곳은?”
“……다리를 다쳤죠. 보다시피.”
바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단은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다음으로 이어진 동작은 등을 가깝게 내보이는 일이었다.
“……? 뭐하는 겁니까.”
“업혀요.”
“뭘……. 당신보다 내가 체력이 좋을 걸요.”
“그건 맞고.”
“그리고 부유 마법 쓰면 되잖아요.”
“조금 전에 힐링 써봐서 알잖아요? 마력은 끝없이 샘솟는 게 아니라는 걸.”
“그런 것 치고, 여태까지 마력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거야, 불을 다루는 건 내가 요령이 좋아서. 방법이 다 있죠.”
“무슨 방법요?”
“말해도 모르잖아요~ 업히시죠.”
“……못 데리고 갈 텐데? 진짜로.”
나단은 뒤에서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 바론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부유 마법보다는 경량화 마법이 마력이 덜 들어서요.”
“……아.”
“당신은 이미 마법에 걸려 있었죠!”
“거……. 소리 소문 없이 하십니다, 참.”
“네, 이제 기척도 확인했으니 업혀요.”
뒤에서는 헛웃음을 내는 소리가 조금 들려오다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로 이어졌다. 어, 하고 생경한 감각에 대한 감상도. 바론은 비척거리다 나단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다리를 생각하면, 사제복은 업혀지기에 좋은 복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옷이 헤쳐진 게 다행이었다. 그런대로 용이할 수 있었으니. 나단은 바론의 팔이 단단히 둘러지자 몸을 일으켰다. 나단은 얼핏 바론의 손등을 봤다. 긁힌 흔적들이 있었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나단은 마지막 부유 마법으로 위로 올라섰다가, 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다른 곳도 많이 다쳤겠지만, 계속 치유한 결과겠죠.”
“직업 덕분에 무사했네요.”
“결국 치유하지 못한 곳도 있었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잖아요.”
바론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단은 묵묵히 걷는다. 바람의 보드라운 결. 나단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투로,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무서웠을 거잖아요.”
이내 어깨에는 바론의 이마가 닿았다. 눈꺼풀이 깜빡, 천에 쓸리는 감촉. 바론은 바람 빠진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가, 심드렁한 양 대답했다. 배는 점점 가까이 좁혀졌고, 슬슬 해가 기울어져가는 시간이었으므로 햇살은 느슨하게 내려앉았다. 대답은 슬그머니 잠긴 목소리로 돌아왔다.
“……아니거든요.”
“그래요, 부상자는 푹 주무시길. 내 등은 안정적이니까.”
그래서, 잠이 들었던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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