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스

[나단] 출발점

1기

귤차 by 귤차
2
0
0

자캐 커뮤니티 <아마르스> 1기, 나단 던스트

15.06.26 작성 (추정)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의 무엇도 잊지 않았는데 그 방만은, 그 방이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듯, 그 방을 뿌옇게 메우고 있었던 먼지처럼 뜻밖으로 흐려져 있었다. 나단 던스트는 네 사람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으로만 넓었던 공간을 손끝으로 먼지를 흩어내듯 떠올려내 보려고 했지만, 좁았다는 것 이외에는 물안개처럼 희미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방 안은 분명히 책들로 북적거렸다. 초라해도. 그들 가족이 몸을 뉘고 있었던, 나단 던스트의 첫 기억의 지점. 그 방은, 집이라는 어휘로는 감각할 수 없는 초라한 곳이었지만, 낮이면 볕으로, 밤이면 별빛으로 어김없이 따스하고 황홀했다. 다른 가족들의 감상은 알지 못한다. 나단의 기억은 다소 꿈 같은 데가 있었고, 사실은 환상이었더라도 괜찮았다. 그 시절 나단은 창문이 없는 방 안에서 볕도 별도 볼 수 있었다. 뭘 보고 있니? 어떤 것이든지. 나단은 잠결처럼 환한 데 젖어 있곤 했다. 누렇게 변질된 종이들은 손안에서 종종 팔랑거렸고, 납작 엎드려 책을 읽고 있자면 등이 살살 어루만져졌다. 바다를 보고 있니? 어머니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가 무릎을 굽혀 앉으면 등에 살짝 내려앉던 머리카락. 나단과 똑 닮은 은색의. 나단 던스트는 말한다. 바다에 가고 싶어. 나단 던스트는, 생각한다.

그 말은 내가 한 게 아니었다, 고.

나단은 반짝 눈을 떴다. 아직은 환한 낮이어서 감겨 있던 눈은 갑작스러운 눈부심을 견디질 못했다. 나단은 눈을 꾹 감았다가 손차양을 만들어 그늘 아래서 다시 눈을 떴다. 얼마간은 머리가 멍해서 숨을 쉬고 있는지, 도 가물가물하게 느껴졌는데, 망연해지고 마는 때에도 호흡하는 일은 잊히지 않았다. 나단은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떴다가 몸을 일으켰다. 천을 깔고 누웠다고는 하지만 맨바닥에 드러누운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아서 몸이 뻐근했다. 나단은 몸이 부실해진 게 아닌지 생각하며 기지개를 키다가 그대로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야!”

 

반응은 보람 있게 곧바로 돌아왔다. 이샤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나단은 벌떡 일어나려던 이샤의 몸 위로 드러누워버렸다. 아니, 뭐, 무슨. 이샤는 말을 다 더듬었다. 나단은 태연하게 짓누르고만 있었다. 그조차 정확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샤는 내팽개치고 일어설 수도 있었겠지만, 입을 꾹 다물고 끙끙 앓기만 했다. 오늘도 지은 죄가 있었으니. 나단은 가련하게 생각하다가도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물러지는 데에도 한도가 있다. ……얼마나 더 이러고 있을 건데? 이샤는 연약하게 물었고, 나단은 말끔하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나도 깨웠어야지.”

“버리고 가려고 했다, 멍청아.”

 

또 못된 소리. 나단은 기지개를 켜며 위로 곧게 뻗었던 손으로 이샤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 소리만 요란하고 아프지는 않게. 야! 한 번 더 큰 소리가 나왔지만 한풀 꺾인 기세였다. 나단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잠투정 같은 걸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단은 이샤를 빤히 돌아보다가 일어섰다. 아직은 해가 뜨거운 날씨였다.

……짧은 꿈이었다. 꿈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짙게 내려앉았다. 꿈이 아니었던 것처럼. 나단은 잠잠히 꿈을 헤아린다. 몇 권 되지 않던 책들은, 실상 몹시도 귀한 것들이었고 누런 종이들마다 조심스럽게 매만져졌다. 막상 활자가 닳도록 하는 일 이상은 되지 못하더라도, 나단은 낱장마다 적혀 있던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대대륙의 기록들. 역사는 전설인 양 남겨졌다. 역사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전설이라는 의혹을 거두지 못한 이상 환영 같은 말소리 이상은 될 수 없었지만 나단은 그, 건널 수 없을 바다 너머를 귀하게 거머쥐어 두었다.

지나간 옛 시대 속에 어떤 순수하고 완벽한 광경이 있었으리라 여긴 것은 아니다. 그 신앙과 다르지 않은 믿음은 그러지 않았어도 된다, 는 확신 곁으로 밀려난다. 나단은 방 안에서 구겨진 채 말소리들을 듣곤 했다. 역사거나 전설인 모든 것들. 때로 뒤섞인 채 내어져 경계조차 흐릿해질 때면, 나단은 슬며시 웃었다. 어머니였거나 아버지였을 무릎. 누추하게 몸을 감싸고 있던 천 위를 손으로 덧그리며 물었었지. 지금이 전설처럼 여겨지게 될 순간도 언젠가는 찾아오느냐고. 어머니였든 아버지였든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나단은 한가롭게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나단이 다다를 수 없는, 나단의 시대가 전설이 되었을 어느 때를.

 

예를 들어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부모가 죽어 누워 있는 광경이 애석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던 참혹한 전설, 같이.

 

나단은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보면 안 돼, 테오. 나단은 동생의 발이 문턱에 이르기 전에 손으로 눈을 가려주었고, 동생은 나단 대신 부모님을 생김으로 추억했다. 우리 아빠도 엄마도 예뻤는데. 아빠는, 잘생긴 게 아니고? 나단은 그렇게 되묻지는 않았다. 그야, 좋음에 대한 수식은 조금 모호한 데가 있어도 괜찮은 법이니까.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나단은 테오가 풀어 놓는 기억들로 핏자국을 지워내곤 했다. 테오는 부모님의 행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피 냄새만은 그들 형제에게 동일하게 남겨져 있었을 것이므로. 왜 죽어야 했지? 대신, 나단은 홀로 종종 자문했고, 대답 역시 스스로 내곤 했다. 그런 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아.

나단은 엉망으로 헤집어져 있었던 방의 모습을 기록처럼, 머릿속 활자로만 읽어낸다. 강도로구만. 이 집에 뭐가 있다고. 어른들은 딱하게 그들 형제를 내려다봤다. 글쎄, 우리 부모님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는데. 왜. 나단의 의문은, 테오에게서도 나란하게 떠올랐겠지만, 어쨌든 인간에 대한 다정과 연민을 속삭이던 몸들은 축 늘어져버렸다. 나단은 부모님들에게서 마른 햇살 같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장면은 따듯한 감각을 덮어버렸다. 흉하게 번진 향은 이르게 무뎌졌다. 집, 이라고는 영영 말하지 않을, 그 방은, 나란히 포개어져 있던 시신이 수습된 뒤 나단의 손으로 직접 불태워졌다. 마법을 위한 도구 없이도 나단은 어떻게 불을 일으켜낼 수 있을지 당연하게 알 수 있었다. 부싯돌로 일으킨 듯이 희미한 불이었지만, 나단은 직접 불을 피워냈다. 네 불은 더 환해질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가 자랑처럼 속삭였듯이.

나무가 타들어가는 냄새는 생각보다 덜 아찔했고, 그 곁으로는 무던한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너는 불을 사용할 줄 아는구나. 영주의 수하는 피로한 눈으로 나단을 훑어보았다. 같이 가줘야겠다. 일종의 강제는 도리어 구원이라고 할 만했다. 나단은 부모님이 필사적으로 숨겼던 마법으로 안온한 구석을 얻어냈다. 네 사람이 몸을 누이고 있었어도 넉넉하게 남았을 새로운 공간은, 두 사람으로 헐겁게 채워졌다. 영주님이 아니었더라면 너희는 험한 꼴을 겪게 되었을 거야. 건네지는 말마다 옳은 소리들이었고, 나단은 기꺼이 예속에 놓였다. 그 부족하게 채워져 있는 공간을 움켜쥐기 위해서라면, 마른 햇살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 테오가 안온할 수 있다면 참혹은 나단의 몫으로 놓여도 좋았다. 나단은 영주를 위한 치장으로든 힘으로든 충실하게 수그러졌다.

너는 내 힘이 되겠구나. 영주는 만족스럽게 나단을 바라봤다. 나단은 몸에 똑같이 난폭하게 젖어들어 있는 피 냄새라든지, 재원을 거느린 권력자로서의 과시 같은 데 대체로 무심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나단은 단순하게 정리할 줄 알았다. 나단이 행한 일들은 온전히 나단이 선택한 바였고, 다른 이유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나단은 무엇으로도 당위를 가질 수 없는 폭력에 테오를 핑계로 대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서 한 일들이었어, 그건. 나단은 지금도 여전히 테오에게서 같은 말을 떠올리며, 끝내 입 밖으로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가 검게 누워 있었을 떄……. 나단은 구겨져 누웠던 방과 횅하니 넓었던 방을 겹쳐 보며 말조차 잊었다. 너는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왜 담 위로 훌쩍 올라섰을까. 너는 정말 네 스스로 헛디딘 것으로 아래로 향하게 됐나.

생각은 복잡하게 엉켰고 나단은, 이후를 잘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테오의 무덤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짚어낸다. 부모님을 묻었던 손, 테오와 이별했던 손.

그리고 불에 타들어가던 영지.

어떻게 불을 피워낼 수 있었지? 특이하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었고? 이안은 흥미가 생긴 얼굴로 물었다. 나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단의 양친은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분명히, 불만은 온전히 나단의 것이었다. 너 어떻게 한 거니? 나단은 양친 중 누군가의 놀라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영주의 젊은 전속 마법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더 해볼 생각은 없어? 아뇨. 이상하네. 마법사는 특히 본인의 재능에 집착하는 족속들인데. 이안은 양팔을 펼쳐 보였다. 다시, 환한 불빛. 너 정도면 세상을 환하게 할 수도 있을 거야. 이안은 품 안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을 틔워 보였다. 이안은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대로 쭉 말을 이어갔다. 너는 아직 불태우고 싶은 게 없는 모양이지. 이안은 여느 천재들이 그러하듯 도취된 채 속삭였다. 따라 와. 네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테니까.

나단은 지배자의 엄정한 방으로 이안의 발이, 마땅한 권리인 양 들어서는 과정을 지켜본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 재촉하는 말. 나단은 천천히, 두려움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느끼지 않고 이안의 뒤를 따른다. 이거 봐.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을, 책등 위를 굴곡으로 내달리던 손가락은 이내 낡은 책들을 찾아낸다. 얼마 전에 영주님께서 사들이신 거야. 아주 귀한 책들이라던데. 내 마법에도 도움이 될 거라시던가? 그거야 나는 모르겠지만. 나단은 뜻밖에 경악하지는 않았다. 떨지도, 조급해하지도. 이걸 어떻게. 물음은, 영주가 책을 사들인 행위보다는 정확히 나단을 겨누고 있는 의도 자체를 향해 내어졌다. 너도, 불태울 만한 게 필요할 거 같아서. 나단은 따듯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되찾을 수 없는 것. 이안은 다정으로 노래했다.

 

나는 영지에 가장 뜨거운 온도를 씌워보고 싶어.

 

반란은, 반란이라기보다도 소요에 가까웠지만, 붉은 색만은 선연했다. 영주가 소란을 잠재웠다는 소식과 이안 데코르의 처형 소식은 비슷한 시기에 전해졌다. 나단은 직접 확인하지는 않는다. 나단은 불에 타들어가던 성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더듬어 읽었던, 아끼며 사랑했던 책들은 차근차근 태워졌다. 왜 내가, 당신이 일을 벌였을 때 책을 가져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안은 표현을 고친다. 그건 훔치는 거라고 해야 할 텐데, 나단. 단순한이유야. 그냥 그럴 것 같았거든. 더구나 너 그 책 다 외우지 않았어? 네 기억력이면 다 외우고도 남았을 텐데. 뭐, 어쩌면 들고 가기 귀찮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을 수도 있고? 이안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나단은 이안의 말처럼, 거추장스러워서, 책을 다 외워서, 또는……. 더는 따듯할 수 없었으므로 책을 태웠다. 전해질 수 없는 말. 있잖아, 테오. 우리 그날, 방에 들어갔을 때, 책은 모조리 없어져 있었잖아. 나는 그게 참 의아했어. 폭력의 대척점에 서 있던 책들이, 가장 잔인한 폭력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는 게. 이건 여전히 우리의 추억이겠지. 너도 기억하고 있었던. 그러나 테오, 나는 더 이상 이 책들에서 마른 햇살을 읽어낼 수 없었어. 그 시절 내 손끝으로 긁어내지던 것들은 모두 먼지였지만 볕이 가루로 흩어진 듯이, 뭉쳐진 듯이 아름다웠는데, 그날을 지낸 뒤로는 더는 아름다울 수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단은 한 권만은 챙겨든다. 미쳐버린 마법사 이안 데코르와의 공조. 서재에 불씨를 틔워두었던, 당위 없는 강박의 결에서, 나단은 기억 속 다정을 꺼낸다. 지금도, 마른 햇살처럼 익숙하게 내려앉는 너의 목소리. 바다에 가고 싶어. 나단은 테오가 꿈꿨던 바다의 책을 감싸안았다. 전설 같은 역사에 대한 책. 나단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헤맸다. 본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숨을 쉬고 있다가, 바다가 보이는 벼랑에 서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주어져 있는 바다를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너는, 주어지지 않은 바다를 보고 싶어 했지. 나단은 비로소 테오의 말소리를 더듬어낸다. 형,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 아니, 음, 여기가 내륙이라서가 아니라, 대대륙의 바다가 어떨지 궁금해. 우리 예전에 그 책 좋아했잖아. 대대륙의 바다에 대해서 기록해두었던 책. 우리도 가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테오는 앙상하게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그들 형제가 이해하고 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나단에게 환영이었던 상상은, 테오에게서 미래로 맺혀 있었다. 번잡한 항구 도시에서의 푸른 바다. 넓은 해변의. 나단 던스트는 테오 던스트가 그러했듯, 호브의 바다를 원한다고는 말한 적이 없다. 원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이제는 나단 던스트의 말이 되었음을.

 

“영리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해도 해도.”

 

이샤는 못마땅하게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이었다. 드문 일이었지만 그럴 만하기도 했다. 용사 일행에 합류라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겠지. 나단은 이샤를 의아하게 보다가 조금 웃었다. 나단은 이샤가 간신히 숨기고 있는, 토라진 표정을 읽어낸다. 나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현명했다면 네 옆에 있지도 않았지.”

“…….”

“나랑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은 표정이네.”

“내 표정이 어때서?”

“많이 어때.”

“좀 넘어가는 법도 알고 그래라. 형이라면서.”

“까분다, 또.”

“신경도 안 쓰잖아.”

“그것도 그렇지.”

 

이샤는 불만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네 이름이 이샤던가?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나단은 떨떠름하게 올려다보던 시선을 겹쳐본다. 마을의 문제아를 수습해주면서 이루어졌던 정착은, 뜻밖에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단보다 꼭 일곱 살 어린 사고뭉치는 생각 이외로 가깝게 나단 안에 들여졌다. 저 자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어요. 이샤가 열여섯이었던, 첫 만남 당시, 나단은 당당하게 이샤를 단정했었다. 한숨 섞인 목소리였는지. 나단 던스트의 걸음은 순순히 길을 내어주는 사람들 사이로 순탄하게 내디뎌졌다. 나단은 사납게 따라붙는 시선들에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이샤의 앞으로 가 섰다. 정작 말과는 딴판으로 감싸려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단은 음,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샤 쪽으로 쭈그려 앉았다. 허름한 벽에 너부러져 있던 이샤의 주변으로는 얼핏 보기에도 수상한 물건들이 쏟아져 있었다. 또 무슨 못된 장난을 하려고. 이샤는 고개를 돌렸다. 이거 참, 혼내는 데 시선 피하면 안 되지. 이샤는 황당해서 고개를 홱 돌렸다. 혼내는 거라고? 네가? 날? 나단은 이샤에게 대답하는 대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샤를 뒤로 끼고서. 미안해요. 내가 잘 챙겼어야 했는데. 나단은 찬찬히 고개를 숙였다. 공손한 행동이었겠지만 나단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위압적으로. 나단은 손끝에서 작게 불을 일으켰다. 고작, 겨우 그것일 뿐인. 다음 말 뒤로, 나단은 쭉 이샤의 곁에 머물렀다.

그래도 너무 혼내지는 말아요.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이샤는 너부러져 있는 나단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곤 했다. 왜 그렇게 사는 거야? 나단은 어린 애의 통렬한 질문에 겸연쩍게 웃어만 보였다.

 

건실하게 살고 있잖아.

퍽이나 그렇겠다. 너 정도면 영주 밑에 들어갈 수도 있잖아. 그리고…….

 

이샤는 어쩐지, 눈치를 봤다. 그러나 다음의 용기는 딴판으로 단단했고.

 

나는 하늘이 붉어질 만큼 환한 불꽃을 보고 싶어.

 

이샤는 나단을 똑바로 바라본다.

 

너는, 반짝이는 걸로 만족할 거야?

 

나단은 움켜쥘 수 있는 불을 생각한다. 추억을 불태웠던 손. 공조했던 손.

……그러나 사랑하고 있는. 나단은 이해한다. 불만은, 늘 내 것이었지. 언제든. 내 죄로든 움켜쥘 수 있는 무엇으로든.

나단은 바닥에 깔아두었던 천을 챙기려다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뻔뻔하게 구는 것이다. 비싸게 주고 샀다느니 하는 약간의 양심을 곁들여서.

 

“너 가져.”

 

이샤는 뚱하게 바라봤다. 차라리 웃음으로.

 

“이런 것도 선물이야?”

“시시하면 어때. 내가 주는 건데.”

“그래, 고오맙다.”

“간다.”

“…….”

 

잠깐은 정적이 흘렀다. 나단은 천천히 이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별은 애매하게 예비되어 있다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쳤지만, 이샤는 당황하지는 않는다. 먹먹하게 볼 뿐.

 

“조심하고.”

“…….”

“사고 치지도 말고.”

“…….”

“잘 지내. 이샤.”

“……어디까지 갈 거야? 형.”

 

나단은 부르는 일이 작별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샤는 전에 없이 가라앉은 얼굴로 나단을 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말도 잘 듣고 얌전했는데. 내가 좋은 형이었나? 옆으로 새는 소리를 해도 이샤는 받아치지 않았다. 나단은 곤혹으로 웃어 보였다.

바다에 가면 뭘 하고 싶어? 물음. 테오는 쑥스럽게, 조금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생각해보지 않았어. 그냥, 바다가 보고 싶은 걸. 바다에 가면 그때부터 생각해봐야지. 그것은 테오의 꿈이어서, 나단에게는 고이지 않는 바람이었지만, 나단은 슬그머니 본인에게로 옮겨둔다. 기억해두어야만 하는 것으로. 앞으로 할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이해한다. 용사의 핏줄에 대한 이야기에 큰 기대는 가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선택인 것으로. 그러므로 나단 던스트의 선택에서 확고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소망이었다.

……들리지 않을 말을 한다. 테오, 나는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을 기억해두려고. 아득한 때에 남겨지게 될 전설을 기록해두기 위해서. 그리고, 내게서 환한 광경을 찾아낼 거야. 내가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나의 불. 단지 붉은 색으로.

나단은 슬며시 웃어보였다.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려고.”

 

네 꿈은 내 꿈이 되기도 했으니.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