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 충동
1기
15.07.07 작성(추정)
1.
어떻게 하고 싶었어? 아니지.
어떻게 하고 싶어?
2.
피곤해?
나단은 어깨 위에 손이 얹어지는 감각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도대체 기척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나단은 표정을 감출 생각도 않고 순순히 당황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안은 나단의 건방지다고 할 만한 행동을 종종 즐거워했다. 직속상관을 두고 취할 태도는 아니었겠지만, 나단의 무모함에는 이안 데코르의 너그러움도 어느 정도는 계산되어 있었다. 움츠러들며 고개를 조아렸더라면 도리어 화를 냈겠지. 아니었어도 상관이 없다. 나단은 이안의 변덕스러운 성질을 생각하며 떠올리며 잠잠히 말했다.
조금요.
이건 내가 편해서인 건지, 무모한 건지.
둘 다 아닙니다.
그러면 솔직한 걸로 하자. 나는 솔직한 건 좋아. 그래, 그래서 얼마나 진척되었지?
나단은 대답 대신 책을 내보였다. 잉크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종이 표면으로는 오늘의 일지가 빼곡하게 써내려져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쓰인 글자는 정갈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안은 나단의 필체를 확인했을 때 가장 먼저 서면 작업부터 맡겼다.
잉크는 아껴서 잘 쓰고 있어? 모든 걸 기록해둘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것만 기록해둬야 한다는 건 알지?
이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편한 일이지? 처음 펜대를 들이밀었을 당시의 이안의 말은 반 정도만 옳았다. 나단은 은유의 형태로 남겨지는 핏자국들이 어떻게 검은 잉크로 말라붙어 있는지를 이제는 안다. 어떤 것들은 나단 던스트 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으므로. 말린 사과의 꽃. 나단은 이안의 눈길이 멈춘 대목의 첫 문구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낸다. 이미 한참은 지난 일이었다. 영지 외곽의, 사과나무가 있는 허름한 집에서는 옛 카스토드 왕국 귀족들의 후손이 살고 있었다. 가문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허름한 꼴이었지만 영주는 이따금 쇠락한 흔적들조차 영 거슬려했다. 카스토드 시대가 무슨 의미가 있지? 찌꺼기는, 치워야 하지 않겠나. 영주가 세련된 양 고개를 한 번 옆으로 기울일 때, 영주의 손 아래서 그늘로 자리하고 있는 이들 모두는 영주의 뜻을 이해했다. 비쩍 마른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사실은 사과나무, 라고 할 수 없을 그 앙상한 몰골이 곁으로 서 있던 집에서 그들은 간신히 숨만 붙이고 있다가 사소하게 지워내졌다. 나단은 그때 그늘로 잠깐 심어져 있다가 다시 양지로 돌아왔다.
그 집에는 딸이 한 명 있었지? 아마.
이안은 농담처럼 가볍게 말을 건넸다.
그랬겠죠.
이안은 고개가 돌아가도록 나단의 뺨을 때린 후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감싸쥐어진 채로 고개를 도로 돌렸을 때 이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잘했어.
이안은 나단의 뺨을 두드리던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가, 아래서 손을 맞잡아주는 것으로 끝맺었다. 이안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문구를 읽는다. 말린 사과의 꽃. 이안은 다정인 양 나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태우는 건 어땠어? 나단.
나단은 무표정하게 이안을 봤다.
좋아할 수 있었어?
네 불을. 이안 데코르는 어린 애처럼 웃었다.
나단 던스트는 지난밤 사과나무가 서 있다, 고 표현되었던 집을 불태웠다. 낮에 누군가 죽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으므로 밤중에 사라진 사람들은, 잿더미로만 남겨졌다. 누가 살고 있었지? 글쎄, 사과나무가 있는 집이었는데. 희미하게 오가던 말소리들 속에서, 나단 던스트는 기억한다. 그들의 얼굴을. 말린 사과의 꽃. 그 집에 딸자식이 하나 있었지. 몸을 판다든가, 어떻다든가. 그런 거야 알 게 뭐야. 지우라고만 명하셨으니, 우리가 빼돌려도 상관없지 않겠어? 나는 나중에 시체에다 하는 것도 좋아하거든. 시시덕대던 소리들. 나단은 그늘이거나 야만이었던 순간에, 가장 먼저 불을 놓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누구죠?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를 잡아끌었을 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을 때 나단은 여자가 보았을 광경을 눈으로 기억해두었다.
버둥거리는 몸을 잡아끌고 바깥으로 어둠으로 내보냈을 때 나단은 밤으로도 여자의 시선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요, 제발. 나단은 여자의 일그러지던 얼굴이나 바스러질 듯이 휘청거리던 걸음, 밭게 나오던 숨소리를 기억한다. 나단의 얄팍한 충동은 누군가를 구한 일이 되지는 못한다. 여자를 내보낸 손으로 여자의 양친을 검게 만들었으니. 여자는, 어디 갔어? 나단은 죽어 있는 몸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벌써 도망쳤나 봐요. 나단은 한 번 걷어차여 넘어졌다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그게 뭐야? 계집년이 지 부모를 버리고 도망을 가, 가기를. 남자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고개를 저었고, 나단은 몸이 충분히 검어질 수 있도록 손을 다시 한 번 손을 더했다.
여전히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색이었지?
이안 데코르는 묻는다. 나단 던스트는, 조금 웃었다.
레베카. 말린 사과의 꽃. 그들의 딸은, 나단을 향했던 처참한 시선은 나단이 레베카의 발소리를 들었던 다음 날 강 위로 뿌옇게 떠올랐다. 저게 누구였지? 하여간 송장 치우게 됐군. 나단 던스트는 부족한 잉크를, 문자를 머릿속 기록으로 새겨둔다. 레베카 로즈. 명화 속의, 익사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 의 물에 떠다니는 몸을 치장하고 있었던 꽃은, 감히 나단 던스트에게서 바쳐질 수 없었다. 나단은 레베카의 창백한 죽음이 땅으로 구겨 넣어질 때까지 찬찬히 살펴두었다. 공조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나단. 네가 죄책감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이안 데코르의 목소리. 나단 던스트는 본인의 손으로 재로 만들었던 집터를 걸어서, 옹송그린 몸이 묻힌 땅 앞으로 나아가 선다. 묘비도 없는 땅, 기억될 수 없는, 그것으로 어느 날 내디디는 곳마다 모두 무덤이게 할 어느 자국. 마땅히 애도할 수 있는 이들만이 내려놓을 수 있는 꽃, 슬퍼할 권리가 주어진 이들만이 내려놓을 수 있는 꽃.
나단은 이안에게 순종으로 웃어 보였다.
네,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색이었죠.
나단 던스트는 꽃을 바칠 수 없다.
3.
테오는 손안의 허공을 움켜쥐는 버릇이 있었다. 물은 도무지 테오에게 맺혀주지 않았다. 형, 나는 안 될 것 같지? 테오는 오래도록 마법을 공부했지만 재능은 우연적인 것이었다. 나단에게는 주어지고 테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재능은, 테오에게 손을 움켜쥐는 감각만을 주었다. 테오는 슬그머니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여주곤 했다.
형, 내 손은 어떻게 생긴 것 같아?
네 손은, 그냥, 잘생겼지.
손에도 잘생겼다고 말해?
잘생긴 손은 잘생긴 손이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 있잖아, 형, 나는 내 손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 수 있어. 스태프를 잡아봤을 때도, 마법석을 써봤을 때도 결국은 내 손바닥을 보게 되더라고. 혹시 내가 뭘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나는 가끔, 내 마법을 내 손의 모양으로 떠올려보곤 해.
손 모양의 마법?
손 모양의 마법. 불이든, 전기든, 바람이든 다 똑같이 내 손 모양이야. 하지만.
테오는 얼핏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내 물만은 바다를 본 딴 것이었으면 좋겠어.
네 바다는 호브의 바다여야만 해? 소대륙에서도 바다는 볼 수 있잖아. 테오는 나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싱겁게 웃었다. 내가 보고 싶은 바다는 호브의 바다인 거지. 별다르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러면, 네가 언급할 때의 바다는 호브의 바다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거겠네? 테오는 주어지지 않은 바다를 환하게 일렀다. 응, 내 바다는 모두 호브의 바다겠지. 나단은 테오의 바람을 가볍게 흘러들어오던 이야기에 섞어본다. 용사의 출현. 나단은 그, 소문일 뿐인 이야기가 사실이 된다고 했을 때 테오에게 주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호브의 바다를 생각한다. 호브의 바다는 늘 찬연하고 맑았으며 풍요로웠다, 따위의, 흔한 수식들이 붙어 있던 문장.
형, 나는 호브의 바다에 가보고 싶어.
그리고 호브의 바다를 본 딴 물을 만들 거야. 나단은 가만히 웃어보였다. 그래, 되겠지. 그저 무른 말로 감싸주려던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전설은 나단의 시대에 이르러 갑자기 현실에 기워졌다. 누추한 믿음은, 이따금 타당한 불신으로 대체되었지만 믿을 수 있는지, 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믿기 힘들다고 해서 믿지 않기로 해버리면, 여지는 더는 주어지지 않게 되는 거니까, 꿈이라도 좋아. 테오는 용사의 이야기를 벌써 전설처럼 읊으며 웃었다. 형은 호브에 갔을 때, 뭘 보고 싶을 것 같아? 대대륙이 인간의 땅이었던 건 오랜 시절 전의 일이야. 우리가 읽었던 것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을 걸. 그래도, 한 가지 보고 싶은 게 있다면? 나는……. 도서관에 가보고 싶은데. 호브 북쪽 마을에 있다는, 호브의 가장 큰 도서관. 카스토드 시대의 마법은 너무 아름답잖아? 그 결을 읽어낼 수 있다면 행복할 거야. 테오는 웃는다. 그건 결국 호브가 아니어도 되는 거잖아. 나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응, 호브에 가고 싶어 하는 건 너니까. 테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형.
나랑 같이 가줄 거지? 우리의 바다에.
……그래서 너는 바다를 봤을까. 테오가 올라섰던 담 아래로는 강이 흘렀다. 여기 강으로는 부족해? 강은 강이고 바다는 바다인 거야. 농담처럼 주고받던 말들. 테오는 왜 거기에 있었죠? 그 애는, 내 동생은 높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 밤에, 굳이 담 위를 지나고 있었을 이유가 뭐죠? 물음은 입 밖으로 내어지지 않았다.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나단은, 숨을 멈추고, 하얗게 질린 시신 앞에서 한참을 안아 있었다. 그대로 옆에 붙어 있다간 시독이 옮을 거야. 장례는 알아서 치를 테니까, 까지, 이안의 말이 들려왔을 때 나단은 고개를 저었다. 허물어진 표정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제가 할게요. 제가 해야만 해요. 나단은 말끝이 분명하게 여며졌던지 알지 못한다. 말린 사과의 꽃이 치장되지 못했듯, 꽃도 없이 외롭게 떠내려 왔던 몸은, 나단의 손끝에서 하얗게 사그라졌다.
너는 물을, 네 바다를 가지고 싶어 했지. 네게 단 한 번도 너그럽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화풀이였겠지. 나단은 이후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조금 끌어내는 데 지나지 않았던 약한 재주라도 아주, 실감할 수 없도록 아득하게 앗아가져서, 나단은 차라리 안도한다. 너는 비도, 강도, 바다도, 모든 물을, 내 손에서 맺히던 초라한 자국조차도 사랑했지. 내게 불이 그러하듯. 네가 사랑한 흔적이므로, 너를 떠올리게 할 것이므로 최소한 내 안에서는 덜어두는 걸로 하자. 너를 사랑한 끝으로는 너를 잃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니. 나단은 무채색으로 남은 재를 귀하게 손으로 담았다가……. 언제였지, 떠돌다가, 바다에 흘려보냈을 것이다. 바다는 이어져 있으니 어느 날에는 호브에 닿을 거라고.
4.
그러니까, 네 뼛가루는 챙겨두는 게 좋았겠지. 나는 정말 호브에 와버렸으니.
5.
이안 데코르는 말했다. 그건 내가 한 짓은 아니야. 네게 결백해. 너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 너는 아직 어리고 뛰어나니까. 하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 해서 뭐가 달리지지? 너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나단은 이안의 말을 듣는다.
너에게 뭐가 남았지? 나단.
6.
메테오는 왜 생겨난 거라고 생각해?
이안이 묻는다. 나단은 대답 대신 이안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안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턱을 괴고 있다가 반짝 웃었다. 사실 말이야, 마법의 형태 자체는 그 강력함의 정도에 따른 문제일 뿐인 거지 카스토드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일개 마법사에게 군대를 막고, 세상을 누를 힘이 없듯이, 마법은 아주 보잘것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우리의 편의를 위한 마법들 정도만이 존재해도 상관은 없었을 거야. 물론, 원소 마법은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니 없을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나단, 왜 메테오의 형태까지 가야만 했지? 붉은 하늘과 황량한 땅 이외에 무엇도 남기지 않을 마법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지? 이안 데코르는 역에 몰입할 줄 알았다. 이안은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동작으로 팔을 휘저어 인사했다.
그건 우리 같은 미치광이들을 위한 거야, 나단.
너는 소대륙의 혼란을 싫어하잖아. 도끼로 내리쳐지는 목, 죽어서 축 나동그라져 있는 나신, 가장 약하고 연한 자들의 비명 소리, 시시하게 속삭여지는 폭력들, 너는 그런 걸 견디지 못해. 이미 찬란한 시절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단, 만약 대대륙의 영화가 돌아온다고 해도, 네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이 극단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해도 너는 그 평화로운 세상에서, 한 가지만은 같은 것을 욕망할 거야. 부수고 파괴하고, 그뿐이며 다른 어떤 목적도 없더라도 너는 갖고 싶을 거야. 그렇지? 네게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더라도. 네가 최후에도 소망할 것. 이안은 속삭였다.
네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불을.
7.
나단은 꾸벅, 졸면서 하늘을 봤다. 내보여져 있는 광경. 대대륙의 하늘은 소대륙과 같지 않아서, 밤이면 알지 못하는 별들이 보였다. 나는 별자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런 모양, 이라고 별을 이어두었어도, 내게는 단지 개개의 빛나는 별들로만 보이니까. 테오는 나단의 고민하는 말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그래도 대대륙의 별자리들은 잘 알 수 있을 걸? 형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나단은 그때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으로 읽은 것은 다만 활자로 남았을 따름이어서 그 형상을 짚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단은 대대륙의 하늘에서도 별자리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별자리를 그려낼 수 있었다면 더 환한 하늘이었을까. 누릴 수 없는 것이므로 그러면, 차선으로 별 자체로 만족하면서 나단은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은 채워졌던 것 같기도 하고, 단 한 번도 비워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취한 거지. 나단은 스스로의 상태를 이해하면서도 계속 술을 들이켰다. 괴로움을 잊고 싶다든지, 어떤 이유가 있어서 술을 마시는 건 아니었다. 본래 술은 센 편이었고 술이 들어간다고 해서 특별히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습관에 가까웠는데, 나단은 어느 순간 무심코, 술잔으로 손을 펼쳐본다. 테오가 말했던, 테오의 손 모양대로의 마법들. 그러나 물만은 바다를 닮았으면 좋았을 거라던 말에서, 나단은 테오의 손을 떠올려본다. 단단하고 앙상했던 손. 바다를 닮을 수 없었던 테오의 물은 나단에게서, 테오의 손으로 겹쳐지며 천천히 고였다. 나단은 눈을 깜빡, 느리게 떴다가 느리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을 되찾아버렸으니 어쩌지. 나단은 만들어낸 물을 달게 마시고 다시 술을 채웠다.
나단은 보석처럼 피워둔 불꽃 곁으로 물을 흩뿌려둔다. 허공에 뜬 채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광경. 물이 더는 밉거나 두렵지 않은지. 투명하게 내비쳐지는 색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빛을, 불을 반짝이게 하는 것으로써.
그리고 불도 물도 흩어지고, 잠이 들면.
8.
어떻게 하고 싶어? 이제.
나단 던스트는 물끄러미 질문을 움켜쥐었다가, 생각한다. 모르겠는데, 그건. 이안은 말했었다. 너는 충분히 영리해. 나단은 번번이 고개를 젓곤 했다. 나는 현명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부정은,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 폐하의 곁을 지킬 겁니다. 마야의 말. 나단은 마야가 바라보는 미래에서 글라디우스에게 향해졌던 본인의 재단을 떠올린다. 기억하고 계셨네요. 나단은 기억을 잃은 상대에게 던졌던, 날이 선 말을 생각한다. 글라디우스는 철저히 용사로 키워진 인물이었고, 그 이상은 아니었다. 뭘 짚어낼 수 있다는 양 굴었는지. 폐하, 라고.
나단은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글라디우스 본인이, 용사로서의 과제를 수행한 이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나단이 생각할 몫은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강제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들은 질 낮은 감상을 글라디우스에게 씌우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단했던 일 또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이안, 나는 놓치고 있는 게 이렇게 많잖아요. 사실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람들도, 내가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닌데. 겨우 내가 그들에게서 지켜내려는 안정 같은 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일 뿐인데. 나는 현명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르죠.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9.
……나단 던스트는 잠깐, 메테오의 감각을 손안으로 잡아낸다. 지극히 불안정한 충동. 온전히 다룰 수 없는 불은, 난폭하게 주변을 휩쌀 것이다. 누구도 가리지 않고. 대지가 부서질 거라는 예감, 불에 타들어갈 모든 것들의 광경이 선연하게 손에 잡혔을 때, 완전한 파괴에 대해서 욕망했을 때.
나단 던스트는 뜻밖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을 본다. 보았고.
부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10.
어떻게 하고 싶어? 지금. 나단 던스트는 대답을 찾아냈다. 이제.
이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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