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과거
익숙하고 지겨운 천장, 그리고 익숙한 손길. 고개를 돌리니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그가 있었다. 바늘의 따금함을 느끼면서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을 기절 시킨 그 머리통이 공중에 떠서 자신을 보고 있다. 그 옆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지나간다. 어디선가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 남들은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지옥.
“밤에 잠을 못 주무시는 거 같던데 안정제를 처방해드릴까요?”
자신의 주치의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에게 이 지옥을 말한 적도 있지만 그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자신이 일반 평민이었다면, 아버지가 재혼해서 다른 자식이 있었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정신병원에 들어갔을테지. 하지만 헛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신이 병든 것도 아니다. 아주 어릴적부터 본, 죽은 자들의 모습과 이야기들. 결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나마 자신의 주치의인 그는 대놓고 뭐라고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여 줄 뿐이지만 속으로는 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릴적에는 그래도 자신이 그런 이야기 하면 달래주며 웃어줬는데 그 모습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망할. 진찰 가방을 다 챙긴 그가 일어나면서 자신을 부른다. 화가 나려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 느껴져서 마음이 풀리는 자신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대답하였다.
자신이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을까.
하긴 차라리 무시하는 쪽이 더 낫겠지. 나랑 나란히 정신병원에 갈 거 아니라면 말이야!
“작은 어르신이 오셨습니다. 깨어났으면 응접실로 내려오라고 하셨어요.”
“아, 그래? 너도?”
“일개 주치의가 같이 가서 뭐 합니까?”
“내가 같이 있어달라고 해도?”
그의 얼굴을 가리며 장난치는 작은 것을 치우기 위해서 손을 들어 그의 얼굴 근처에 대고 손을 휘젓자 슬쩍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 잡아 달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잡아 준 것이 좋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그러고 싶다면 그러죠.”
그렇게 응접실로 내려가 문을 여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앉아 있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 뒤에 서 있는 것. 그것. 서 있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것보다 검은 여우의 꼬리가 길게 늘어져 그 아래 있는 사람의 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에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리는 손발이 그 사람의 몸에 들러 붙어 있는 기분 나쁜 형상.
“욱.”
“여전히 몸이 약하구나.”
“괜찮습니까?”
다들 저것이 보이지 않는다니. 욕이 입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검은 여우의 꼬리 사이에서 고개를 든 이가 자신을 보더니 뭔가 말한다. 낯선 언어로 말한 그의 말에 숙부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은 내가 일본에 장사하러 갔다가 만난 사람인데 그 지역에서 이런저런 의식을 하는 마법사야. 조카 녀석이 허약하니 좀 봐달라고 부탁했지. 지금 잠시 통역가 놈이 자리를 비웠는데 금방 올거야.”
“형님, 제 아들 놈한테 뭘 소개하는 겁니까?”
가만히 있던 낯선 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처음 듣는 언어를 듣고 여우가 배를 잡고 웃어댄다. 깔깔거리던 여우가 순식간에 사람의 형태로 모습이 바뀌더니 자신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봐. 내가 보이지? 내 목소리 들리지?
다소 어색하지만 여우가 고국의 언어로 속삭였다.
-좋아, 반응을 보니 들리는군. 뭐, 우리가 하는 일은 한가지 의식 밖에 없지만 바다 건너에 자기 조카가 이상한 거 본다고 한탄하니 궁금했거든.
웃을 때마다 검은 것이 뚝뚝 떨어지는 기분 나쁨이 느껴진다. 낯선 손님이 다시 뭔가 말하자 여우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 말을 번역해주었다.
-저 놈이 하는 말은 대충 전하자면 당신은 보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신경 쓰지마세요, 라고 하네. 내가 봐도 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아무것도.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고 살아.
그러면서 손을 뻗어서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머리통을 잡아 챈다. 기분 나쁜 소리와 냄새와 함께 그 머리통이 터지더니 검은 연기가 되어서 사라진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적어도 네가 거슬려하는 걸 치워 줄 순 있지.
순간 혹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저것을 받아들이면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젓는 자신을 두고 여우가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다가 눈을 깜박하는 순간-
“일어났어?”
익숙한 품에 안겨서 잠에서 깬 천룡은 빠르게 사라지는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천룡은 고요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휴, 부부는 전생의 원수라더니.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품에 기대었다. 꿈은 어차피 금방 사그라질 것이다. 긴 과거에서 깨어나 그는 연인의 품에 안겨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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