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감정의 시간선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난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던전 브레이크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상황 속에서 홀로 남아버린 무력한 아이들은 넘쳐났으니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도 다 그런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가정사 같은 건 한탄할 거리조차 되지 않았
“통째로 빌릴게.” “오호, 드디어 결심했군?” “어차피 썩어나는 돈, 이럴 때 아낌없이 부어야지.”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손님 한 명이 나가자, 주점 안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제 둘 뿐이었다.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치우며 마감을 준비하는 주인장과, 바 근처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잔을 기울이는 마지막 손님 하나. 문을 닫을
변화하는 관계가 두렵다면 그건 나아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명이다. (*일부분 썰과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서로의 자존심을 이기지 못해 사귀기로 했던 그날 이후로 너와 나는 연인이었지만 연인이 아니었다. 말로는 사귄다, 남들에게는 그리 자랑하고 다녔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해서 사귀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저 거짓뿐인 관계였다. 쇼윈도 커플. 이게 무슨
변하지 않는 관계라는 건, 내가 그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일부분 썰과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야, 나 소개팅 나간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공유하듯 무심하게 툭 말을 내뱉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 말을 건네고는 미련 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딱히 네 반응이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의 통보가 적당했다. 네가
2023.12.31 톡. 톡. 톡... 뚝. 펜촉이 기어이 부러졌다. 쓰기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가 아닌, 단순한 의지와 용도와는 무관한 소리를 내는 물건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말로다. 까만 잉크가 종이 위로 점차 스며들면서, 줄줄 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뚱했다. 마치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고, 생각에 잠겨 부러진 펜촉 따
가을날이 청명하다. 에쉴은 나이 든 떡갈나무 아래에 서 등을 기대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투명한 시간. 언덕에는 들풀이 자라고, 청설모가 톡톡 뛰어다녔으며, 더 먼 곳을 보면 도시의 높은 건물이 굳건하다. 발뒤꿈치를 톡톡 차면 낙엽이 바스락댔다. 덩달아 곱게 포장한 안개꽃 다발도 함께 사각거렸다. 에쉴은 재킷 주머니에 빈손을 찔러넣고 초조하게 오솔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