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엔티 / 에이전트 AU] 에이전트들의 발렌타인
Happy Valentine Day, Agents.
에오우스는 어디선가 나는 달콤한 냄새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벌써 2월 14일인가? 재빨리 스마트폰을 켜 일정이 빼곡한 캘린더를 살핀 에오우스는 머리가 아픈 날이 왔음을 느꼈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냄새가 온 천지에 퍼지는 날이다. 범인(凡人)들의 애정공세가 하루를 뒤덮는 날.
에오우스 스키엔티아(Eóus sciéntĭa)는 천재였다. 에이전트 그리스 지부의 에이스라 봐도 무방했다. 어린 에이전트 교육생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강사이긴 했지만, 본 실력은 거의 괴물이라 불릴 정도로 미친 사격 실력과 두뇌회전력을 자랑했다. 그만큼 그는 에이전트계에서 괴물 신입이라 불렸고, 무슨 일이든 불평 없이 척척 제시간에, 일정에 딱 맞춰 끝내는 것을 보고 범인들은 ‘광기’ 라 칭했다. 에오우스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겐 시간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예의이기에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취미는 독서와 사색이었다. 마치 에이전트를 하지 않았다면 영국 학회에서 엄청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릴 것처럼.
그런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니,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에이전트 아카데미 동기인 헤일론 센티에르였다. 헤일론은 에이전트에 어울리지 않는 긴 연갈색 해파리 머리에, 항상 웃는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오우스가 그를 보기만 해도 정말 얄밉고, 보기도 싫게 눈꼴시려운 이유는- 에오우스가 천재이기에, 사람의 심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에 있었다.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헤일론 센티에르. 그리스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기업인 센티에르 기업의 애매한 셋째 아들. 장남도 차남도 막내아들도 아닌 셋째 아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한 탓에 병치레를 자주 했고, 그것으로 인해 에이전트 아카데미에 버려지듯 온 것이다. 그렇게 버려질 정도로 박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저렇게 삐뚤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나, 삐뚤어지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었기에 에오우스는 헤일론 센티에르를 정말 싫어했다. 그러나, 헤일론은 에오우스의 실력이 묻힐 정도로 에이전트 일에서는 천재였다. 그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천직이 무엇이겠는가. 사기꾼이 아니라면 이런 스파이 일이겠지 않겠는가.
사격 시험을 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엄청난 명중률, 98.4375%. 헤일론 센티에르의 평균 사격 명중률이다. 그리고, 실전에서는 그 명중률이 더 올라갔다. 미친놈인 거다, 이 일이 천직인.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자 동기인, 그것도 동성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면 믿겠는가?
에이전트들의 발렌타인
w. 아이스베어
헤일론 센티에르의 태도가 천천히 바뀌게 된 것은 에오우스가 에이전트 엔티아(éntĭa)로서, 헤일론이 에이전트 시데레우스(sidérĕus)로서 꽤 위험한 임무에 참여했을 때였다. 그때 에오우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하늘나라에 갈 뻔했다. 급소가 아닌 곳에 총을 맞은 것이었다. 헤일론은 그때부터 적이라면 닥치는 대로 죽여댔다. 로봇이든, 사람이든 간에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적으로 판단되는 순간 바로 총을 쐈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에오우스를 들어안고서,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려서 금방 투입된 의료헬기로 복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을 맞은 후의 기억은 흐리다. 그러나 헤일론이 눈이 돌아간 것쯤은 기억했다. 그 찬란한 백안을 드러낸 걸 어찌 잊겠는가.
에오우스는 긴급 수술로 거의 기사회생하다시피 살아났다. 에오우스도 그것은 인정했다. 그 때는 피를 많이 흘린 후라서, 옆에 헤일론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갖게 된 성애적 감정을 눈치챈 이후로부터 그가 더욱 싫어졌다. 살갑게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 역겹다.
“에이전트 엔티아.”
오늘도 뒤에서 등장한다. 평범한 범인들의 에로스적인 관계라면 목이 붉어졌을 법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자신이 제 연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구는 것이 싫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 그렇다고 헤일론이 악인은 아니니까. 에오우스는 뒤를 돌아보며 팔짱을 꼈다.
“에이전트 시데레우스(sidérĕus/별의, 성좌의). 무슨 일이지? 그 청승맞은 표정으로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깨 있는 걸 보니 오늘 휴가라도 냈나 보군.”
“잘 아시네요, 오늘 휴가를 냈거든요.”
저 무해하다는 듯 웃는 얼굴에 책을 던져 납작하게 만들어주고픈 충동이 올라왔지만, 에오우스는 간신히 참고 말을 이어갔다.
“그럼 가보도록.”
“으음-... 그럴게요. 근데 오늘까지 휴가를 안 쓰면 당신의 손해 아닌가요, 에이전트 엔티아?”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오늘까지 보상휴가를 쓰지 않으면 만료된다. 초콜릿 냄새가 가득한 날에 평범한 도서관 한 구석에 박혀서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에오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언짢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감사를 표하지, 에이전트 시데레우스. 보상휴가 만료일이 오늘까지라는 걸 잊고 있었군.”
오늘의 일정은 놀랍게도 거의 다 다른 부서로 넘어간 참이라, 어떻게 할 지 고민중이었던 그는 명쾌한 답을 얻었다. 그러나 그 답을 얻어낸 상대가 헤일론 센티에르였기에 짜증이 치밀었다. 저 자식이 나를 좋아한다니, 역겹고도 역겹다. 그러면서도 선은 넘지 않는다. 그러는 것이 참 봐줄만한 것도 짜증이 났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제안이 나왔다.
“괜찮다면… 에이전트 엔티아, 같이 도서관 갈래요?”
도서관을, 남자 둘이서? 범인들의 상식으로 미루어 분석했을 때, 그런 행동은 미친 짓이다. 대학생에 10년 이상 된 친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행동이다. 에오우스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않았다.
“허.”
“일반 도서관 말고, 에이전트 아카데미 도서관이요. 어때요, 에오우스? 저와 같이 추억 회상이라도 하는 건.”
기가 찼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고? 지금 모든 에이전트들이 자신과 헤일론을 쳐다보고 있다. 동기인 두 천재가, 같이, 에이전트 아카데미의 도서관을? 그것도 발렌타인 데이에 둘 다 휴가를 내고서? 범인들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저 둘 사귀나? 게이였어? 평소에 주변에서 평판이 좋은 헤일론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귀찮은 일만 늘어날 미래가 보였기에, 에오우스는 싫어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겠군. 옷을 갈아입고 여기로 나오도록. 오전 10시 10분까지.”
장소와 시간까지 정하니 제법 그럴듯한 약속이다. 짜증이 치민다. 저 자식과 같이 도서관이라니. 하지만 상관없다. 가서 책만 읽고 있으면 그만이니까.
도서관에 도착하니, 입학 첫날 안내받았던 숨겨진 익숙한 문장이 보였다. Vulpes sine sono vultúrĭus. 우리는 소리 없는 독수리다. 이곳은 평범한 대학교로 위장되어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헤일론은 웃으며 질문했다.
“오랜만에 오니까 어때요, 에오우스? 이 앞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죠?”
“기억나는군, 네가 온갖 음식물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이 앞에 조용히 앉아있었던 것이.”
“…그 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에오우스. 센티에르의 이름을 달고서 그런 모습이라니 예전엔 부끄럽기만 했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요. 전부 당신 덕이에요.”
“…들어가지. 시간이 다 가겠군.”
에오우스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자, 헤일론은 그 뒤를 따랐다. 새끼 오리가 어미 오리를 따라가듯이.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늙은 여성 사서가 반겼다. 지금은 에이전트계에서 은퇴한, 그들의 스승 페네트(풀네임은 페네트랄레이다.)였다.
“에오우스, 헤일론. 많이 컸구나.”
“…잘 지내셨습니까, 스승님.”
“페네트 스승님, 오랜만이에요.”
졸업 이후 공식적으로 지부에 소속되었을 때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에오우스는 조금 웃음이 났다. 자신을 질투하고 시기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많이 컸어-.. 훌륭한 에이전트가 되었구나. 추억이라도 회상하러 온 거니?”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지금 에이전트 아카데미는 방학 기간이란다. 괜찮다면 같이 차라도 마시자꾸나.”
오랜만에 만난 스승의 제안을 거절하기엔, 에오우스의 뇌는 이미 범인들의 상식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헤일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냅다 수락해버렸고, 에오우스는 둘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셋은 안쪽에 숨겨진 직원 전용 휴게실로 들어갔다.
“…저희는 직원이 아닌데, 이곳에 들어와도 괜찮은 겁니까?”
“너희는 이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이잖니. 이 정도는 유엔 총장이 와도 이해해줄 거란다. 티로피타(Tiropita/그리스의 전통 디저트) 먹겠니? 로쿰(Loukoumi/그리스의 전통 디저트, 차나 커피와 곁들여 먹는다.)도 있단다.”
“저는 로쿰 주세요.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실패하셨던 다 타버린 티로피타가 생각나네요.”
“헤일론..! 역시 짓궂은 건 여전하구나.”
“하하, 제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사람이 아니라서-”
에오우스는 잠자코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대화하는 비틀린 천재라니.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봤다면 소재로 써먹기 좋다며 군침을 흘렸을 정도의 매력적인 소재이지만, 현실에 있다면 그저 싫을 뿐이다. 에오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페네트가 직접 말을 걸기 전까진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으며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저 자식과 대화하며 스승님이 행복하시다면 그만이다.
“에오우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학생 때와 다를 바가 없구나. 도통 말도 없고…”
“저도 쉽게 바뀌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리고 잘 지냈습니다. 총도 몇 번 맞아보고, 몇 번 죽을 뻔도 했죠.”
“그래, 에이전트라면 자고로 그래야지…. 가끔은 말을 먼저 해주려무나. 조금 섭섭하단다. 네가 사색을 좋아한다는 건 잘 알지만..”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구나. 헤일론이 마지막 학년일 때 방 앞에 초콜릿이 가득했지-…”
“그때는 조금 난처했어요. 너무 많아서 어떻게 다 먹을까 고민했거든요. 그렇다고 버리자기엔 아깝고..”
“버렸잖나.”
“일부는 썩어 있었거든요. 글씨도 대부분의 여자애들 글씨체가 아니었고..”
그렇게 추억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지 모른다. 창문이 없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에오우스는 잠자코 듣다가도, 사색에 잠기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헤일론이 그 사색에서 부드럽게 깨워주었다. 페네트는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벌써 오후 5시구나. 이제 가야 하지 않니?”
“새벽 시간 휴가까지는 포함이 안 되어 있었으니까… 준비하려면 얼른 가야겠네요.”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그래, 가보렴. 한 7년 뒤쯤에 찾아오너라. 그 전에 찾아오면 부고 소식인 줄 알 테니..”
페네트는 짓궂은 농담을 하며 도서관 앞까지 둘을 배웅해 주었다. 둘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그동안 침묵이 유지되다가, 비가 툭, 툭, 내렸다.
‘비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헤일론이 우산을 펴며 옆으로 다가섰다. 비는 금방 쏟아졌다. 그리고 찬란한 백안과 에오우스의 눈동자가 마주보았다. 찬란한, 센티에르 가의 눈동자. 그 누구라도 홀리게 한다던, 그 눈동자.
“해피 발렌타인이에요, 에오우스.”
멍한 그의 손에, 초콜릿을 쥐여준 헤일론은 지그시 웃었다. 비가 내리는 발렌타인 데이. 에오우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헤일론 그 자체는 역겨웠으나, 그의 찬란한 백색 보석 같은 눈동자는-.. 싫어할 수가 없다. 붙잡히기 싫지만, 저 찬란한 다이아몬드 같은 눈동자를-.. 더 감상하고 싶었다.
“아, 그리고…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다크초콜릿으로 준비했어요.”
몸에 밴 배려, 싫어할 수 없는 요소다. 예전과 다르게, 헤일론은 상대가 더러운 부랑자이든, 도박꾼 아가씨든 자신의 편이자 아군이라면 늘 배려했다. 예전에 자신이 알던 겉과 속이 다른 헤일론 센티에르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를 순수한 아이처럼 사랑하는 선인 헤일론 센티에르가 남았을 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빗소리가 조용했다.
비 오는 발렌타인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싫지 않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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