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월은향] 썰 01
나중에 또 이어서 써야지... 얘네들이 벌써 1000일이 넘었다니 믿기지가 않네
백은향 약간 조선의 신녀 느낌일 것 같음...
" 아이야, 내 너의 나라에 신녀를 내려보낼 것이다. 나라를 잘 보살피거라. "
라는 말과 함께 잠에서 깬 조선의 왕... 그리고 신녀를 찾아나설 것을 명함. 여기저기서 신녀를 찾아다니는데... 왕이 신녀를 3달간 찾지 못하자 신이 힌트를 줌.
" 신녀 그 아이는 머리카락이 눈처럼 고운 색이란다. 그리고 용을 기다리고 있을 게야. "
조선시대에 용은 왕의 상징이었음. 그래서 왕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지만 실상은 2년 동안 집을 비운 야장월을 기다리는 것이었음.
"여기 눈처럼 흰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산다 하던데."
"아, 그 여인 말씀이십니까? 그 여인은 저 멀리 해룡산 아래에 기거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가까이한 산인지라 그 산에서 자란 나무의 품질이 좋습죠."
"...알겠네."
조사를 마친 조선의 군인들은 해룡산 아래로 향했음. 겨울인지라 해룡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음. 해룡산 바로 아래의 꽤 으리으리한 집. 그곳에서는 백은향이 제 부군인 동해의 용 야장월을 기다리며 집을 청소하고 있었음. 군인들이 다가오자 기척을 느낀 백은향은 천천히 문을 열고 나왔음. 아리따우며 고운, 가히 절세미인이라 불릴 정도의 미모와 더불어 눈과 같이 희고 긴 머리카락. 군인들은 천천히 집 마당에 들어와 백은향 앞에 무릎꿇으며 말했음.
"신녀이시여, 왕께서 신녀님을 찾고 계십니다. 함께 가시지요."
"ㅇ, 안...안 됩니다, 저는...부군을 기다려야 합니다..."
백은향은 떨며 말했음. 자신이 사랑해 머지않는 부군 야장월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신녀라며 자신을 데려가려는 군인들이라니. 게다가 시각을 잃은 상태의 장님 여인을 이 겨울에 데려간다니. 백은향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음.
"전,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입니다...어찌 저를 신녀라 칭하시며 존칭을 쓰시는지..."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백은향은 결국 왕명을 받아 수도 한성으로 향하게 되었음. 군인들은 온갖 털옷을 입혀주며 저를 깍듯이 대했지만, 백은향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음. 따뜻하긴 했지만, 야장월의 품보다 못했음.
결국 수도 한성에 도착하고 경복궁에 입성함. 으리으리한 궁궐. 하지만 백은향은... 별로 와닿지 않았음.
"신녀이시여, 오셨나이까."
"...저는....신녀가 아닙니다. 어찌....한 나라의 왕이 저같은 장님에게, 그런 존칭을...."
눈이 보이지 않는 백은향은 그저 이 상황이 너무나 공포일 뿐이었음. 자신을 이용해 용인 야장월을 노리는 수작질이라고 생각한 백은향은 일단 최대한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하고 경복궁에 마련된 신녀전에서 지내기 시작했음. 장월님께서 얼른 돌아오셔야 할 텐데. 그래야.... 장월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장님인 백은향을 모시는 시녀들은 꽤 많았음. 왕은 백은향에게 전속 궁녀를 하나 들이라고 했고, 백은향은 그 말을 들어주었음. 이 궁에서 장님인 자신이 돌아다니다간 누군가와 부딪치거나 호수에 빠질 게 분명했음. 궁녀를 한 명 뽑았는데, 자기랑 비슷한 또래의 궁녀였음. 지금 신녀로 취급되는 자신을 그렇게 깔보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뽑았음. 이름은 유예담. 순수하고 착해보이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변한 사람이기도 했음. 백은향이 자신을 선택한 것에 대해 장님이지만 사람의 목소리와 분위기로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구나, 라고 평가함.
예담은 신녀를 모시는 자로서 백은향을 정성을 다해 모셨음. 여기저기 길도 알려주고, 손을 잡고 천천히 같이 걸어줬지. 백은향은 예담이 그럴 때마다 부군 야장월이 그리워졌어. 장월님의 방을 청소해야 할 텐데. 먼지가 많이 쌓였을 텐데. 백은향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음. 예담은 그럴 때마다 백은향에게 괜찮으시냐 물었지만 백은향은 대답하지 않고 호수의 소리를 들을 뿐이었음. 여름에 야장월이 자신을 데리고 갔던 바다가 생각났음. 코를 타고 실려 오는 짠내와 약한 비린내, 그리고... 뜨겁게 쏟아지던 햇살을 가려주던 무언가. 백은향은 소리를 듣고 그게 야장월의 소매라는 걸 알았지. 그 때 야장월은 어떤 소리를 내며 웃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백은향은 더 슬퍼졌음. 백은향은 그저 자신을 감싸주던 온기와 그 따뜻한 목소리가 그리웠음. 그리고 그 약재 향기도.
"...그리워하시는 분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네.."
하지만 백은향은 그렇게만 답할 뿐 야장월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음. 왕이 야장월을 잡아 뭔가를 해보려는 것 같아서. 백은향은 이곳에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음.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어야 할 지 모르는 일. 게다가... 자신은 그저 그런 인간, 야장월의 삶에서 한 번 스쳐지나간 생명일 뿐이라 야장월이 찾으러 올지도 의문이었음. 백은향은 늘 잠에 들 때마다 악몽을 꾸기 시작함. 야장월의 손이 제 손을 떠나는 그런 감각, 그런 꿈을. 그리고 야장월이 "너는 그저 한 번 스쳐지나갈 인간일 뿐이니, 주제를 알거라."라고 하는 꿈까지도.
백은향은 가뭄이 든 나라에 기우제를 지내는 의식을 치뤘음. 그리고 정말로 비가 내리자, 백은향은 신녀로서 칭송받게 되었지. 하지만 백은향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음.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하루하루 야위어가면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음.
"...신녀이시여."
"...주상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온지...."
신녀가 많이 야위고,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말을 듣고 왕이 찾아왔음.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좋지 못해 보였지.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알아보시는 겁니까?"
"...주상 전하의 목소리는 위엄 있고 풍채가 장님인 저에게도 느껴지니, 감히 주상 전하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신녀이시여."
백은향은 유예담 이외의 시녀를 받지 않겠다 했고, 무수리만 출입을 허가했음. 다른 궁녀들이나 상궁들은 출입이 불가한 것은 당연했고. 백은향은 힘들게 일하는 무수리들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음. 어린 무수리를 쓰담아준 것을 시작으로, 간식을 가져와 제 신녀궁에서 일하는 무수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음. 그 소식을 들은 왕은 역시 신에게 선택받은 신녀라고 생각함. 자신보다 아래의 존재들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상태가 많이 좋지 못하시다 들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는 하찮은 저의 건강을 신경쓸 필요 없으십니다."
백은향은 말을 끝맺고 하늘을 바라보았음. 대체 언제까지 하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제 부군이 사라진 자신을 데리러 오길 바라면서. 왕은 백은향의 표정을 보고 대왕대비를 떠올렸음. 제 아버지, 그러니까 전대 왕을 그리워하는 눈빛과 흡사했음. 왕은 백은향이 두고 온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음. 군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누군가가 같이 살던 흔적이 있었으며, 백은향은 같이 살던 사람을 모셨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지.
"...모시던 분을 그리워하십니까?"
"..예고조차 없이 찾아온 것은 주상 전하이시지요...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군졸들에게 끌려와야 했습니다."
백은향의 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차가워졌음. 왕은 당황했음.
"...2년- 아니, 3년을 집을 비운 제 부군을 기다리며, 정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백은향은 결국 터지고 말았음.
"...사람들을 물리십시오, 주상 전하. 이 이야기는 주상 전하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저를 통해 무엇을 알고 싶으셨던 겁니까, 주상 전하."
"...소인은 그저, 꿈에서 점지해준 신녀님을 데려오라 했을 뿐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까."
"...예, 결코 다른 삿된 마음은 품지 않았습니다."
"주상 전하, 제 부군은 용이십니다."
백은향의 말에 왕은 소스라치게 놀랐음. 용의 아내? 내가 지금 용의 아내를 신녀라 칭하며 데려왔단 말인가?
"...용은 본디 자유롭다 하지요... 그렇게 떠나신 지 3년이 되었습니다. 동해가 요동친다는 보고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런 보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 보군요..."
백은향은 슬픈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음.
"...저는 아내 된 도리로 부군을 기다리려 합니다, 주상 전하.. 그러니,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시지요."
왕은 결국 백은향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지. 이 결정에 토를 다는 자는 목을 베겠다 했고. 백은향은 해룡산 아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 근데 돌아가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백은향은 그 추운 겨울날에 열병에 걸리고 말았어. 야장월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
"....저의 부군이자, 동해를 지키는 용이시여. 저를... 잊으셨나이까."
야장월의 시점에서는 3년은 겨우 찰나였겠지. 하지만 백은향은 인간이었으니, 늘 야장월을 그리워했어. 지금은 열병에까지 걸렸고. 백은향은 스스로를 간호해야 했지.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면서 마음의 병까지 얻은 백은향은 그저 멍하니 늘 하늘을 바라보고, 집을 매일 청소하고, 야장월의 방을 정성스럽게 관리할 뿐이었어. 거의 5년째 되던 날이었을까? 유예담이 찾아왔어.
"신녀님."
"...저는 더 이상 신녀가 아니에요..."
"...제게는 신녀님이세요."
"...."
"기다리시는 분이 있으신 거죠, 신녀님?"
유예담의 말에 백은향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어. 파인 눈이 따가움에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그분이 돌아오지 않아서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예담은 백은향과 같이 오랫동안 있어주었어. 유예담은 백은향과 같이 지내면서 안 게 있었어. 이 사람은 너무나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떠났다는 사람은 정말 질 나쁜 남자라는 것. 아내를 두고 떠난 부군이라는 걸 안 유예담은 늘 마음속으로 그 부군의 흉을 봤어. 어떻게 이런 예쁘고, 아름답고, 참하고, 귀엽고, 멋지고, 토끼같은 아내를 두고 멀리 떠날 수가 있을까, 하고.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보시는 거예요?"
"...네...."
백은향은 옅게 웃어보였어. 자신은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만, 더 이상 보질 못함에도...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젠가 저 하늘에 나타날 제 부군 야장월이 오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듣기 위함이었음. 유예담과는 다른 방에서 자는 백은향은 오늘도 악몽을 꿔서인지 기분이 싱숭생숭했지. 집에 옅게 남은 약재 향이라도 맡고 싶어 그 약재를 서둘러 찾아보았지만, 그 약재는 야장월이 어딘가에 숨겼는지 보이질 않았지. 백은향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만 갔지만, 유예담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어. 악몽을 꾸고 깨어났을 때만 그 증상이 나타났거든.
"네게 전의 이무기 시절은 잊도록 하여라. 너를 동해의 용으로 임명한다, 야장월. 용으로서 동해 바다를 수호하고 지키거라."
천제에게 하사받은 동해의 용의 지위. 야장월은 그렇게 흘러가듯이 집을 떠나 자유롭게 유랑했어. 어느날은 친우의 집에 들르기도 했지. 백은향이 챙겨주었던 손수건은 봇짐 깊숙한 곳에 있어서, 백은향에 대한 기억은 빠르게 휘발되어만 갔어. 그리고 지금은-
'...소중한 누군가가 있었지.'
정도만 기억할 지경에 이르렀어. 용이 된 이후 이제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고, 인간들은 그저 빠르게 스러져갈 생명들이니 전혀 정을 주지 않았지. 같은 불멸자들과만 이야기하고, 인간들과는 별로 눈을 마주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았어. 그에겐 하위의 존재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간 파라엘에게서, 기억 저편에 묻힌 누군가를 알게 되었지.
"그 아이는, 잘 지내나?"
"...뭔 애? 난 애 들인 적 없어."
"....저런, 내 친우여. 안타깝구나. 그 아이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 네가 구해주었지 않느냐."
"...내가, 구해줬다고?"
이 내가? 인간을? 순간 머리가 찌릿하며 온갖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어.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찾아낸 건 바로-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라 믿고 있을게요.. 그러니....이 손수건을 가져가주세요....!'
내 아내.
"...백은향, 네 아내이지 않나. 참... 천제 그 신도 참 야박하단 말이지."
"...돌아가야겠어."
황급히 물기둥을 타고 사라진 야장월이 떠난 자리를, 파라엘은 바라만 보았지.
야장월은 용의 모습으로 빠르게 하늘을 날아 해룡산 아래의 집으로 향했어. 야심한 밤의 시각,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은향아."
야장월은 천천히 제 아내의 이름을 불렀어. 하지만 응답조차 없었지. 야장월은 재빨리 백은향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탐색했고 마침내 유예담의 일기를 찾아냈어.
' 오늘은 신녀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분이 떠나신 지 딱 7년째 되는 날이니, 신녀님을 데리고 동해 바다에 가기로 했다. '
동해 바다의 해안가. 솨아- 철썩, 치는 파도 소리와 고요한 밤의 침묵. 횃불을 들고서 백은향을 해안가로 데려온 유예담은 백은향의 손을 잡아주었어.
"...그만 기다리시면 안 될까요."
"....제 부군이에요...그럴 수는 없어요.."
하루하루 점점 상태도 나빠지고, 이제는 더 이상 외출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 하지만 백은향은 야장월이 너무나 보고 싶었어. 다시 돌아온 부군을 눈 앞에서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어. 하지만 마음의 병은 몸을 병들게 했고, 백은향도 이제는 버티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
"7년째 돌아오지 않는 부군 따위, 기다리지 말아요, 신녀님.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그러니, 저와 같이 한성으로 가요."
백은향은 너무나 지쳐 있었지만, 그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로,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했기에-.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웃은 백은향은 차가운 바닷물에 손가락을 조그맣게 담갔어.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지. 그리고 나지막이, 제 부군의 이름을 불렀어.
"...장월님...."
그 때였어. 하늘에 용이 나타났지. 유예담은 깜짝 놀라 백은향을 보호했어. 용은 천천히 내려오더니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했지.
"...은향아."
낮고 따뜻한 목소리. 백은향은 자신이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뛰쳐나가 야장월에게 안겼어.
"장월님....!"
유예담은 믿을 수가 없었어. 부군이 용이라니.
'...이제 신녀님을 지키는 나만의 임무는 끝난 거야.'
늘 짐을 가지고 다니던 유예담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고 그 자리를 떠났어.
"...미안하다."
백은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어. 눈이 따가워서 힘든데도 계속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
울다 지쳐 잠든 백은향을 들어안고서, 야장월은 해룡산 아래의 집으로 돌아왔음. 백은향이 아까 있던 여자와 늘상 관리한 집이라 깔끔했지.
"...용이시여."
"...넌 누구더냐."
"...신녀님을 모시는 유예담이라 합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신녀님의 약을 드리러 왔습니다."
"...약?"
"...신녀님께선 많이 편찮으십니다. 해안가로 나온 이후... 이번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용이시여, 저는 한낱 인간이지만, 신녀님과 같은 인간인지라 인간의 도리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부군이 7년이나 떠나 있는 동안-..."
유예담은 7년간의 일을 모조리 설명해 주었음. 야장월의 마음에는 비도가 억겁 개가 박힌 것 같았지.
"..마음이 불편하시지요. 한낱 인간인 저이지만, 그럼에도 신녀님의 아픔을 알아주셨으면 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녀님께는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전해주십시오."
그날 밤, 야장월은 백은향을 제 품에 안고 잠들었음. 이 여린 제 아내가 아프다니.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이 떠난 자신이라니. 죄책감이 한없이 밀려왔음. 이제는 더 이상 떠나면 안 되겠다, 생각했음.
그날도 악몽을 꾼 백은향은 헉, 하고 깨어났어. 숨을 쉬기 어려웠고, 몸은 경직되어서 움직이질 않았지. 눈물이 흘러서 파인 눈이 따가웠어.
"흑, 허억,"
너무 아파서 힘들었어. 이렇게까지 아픈 적은 처음이야. 백은향의 작은 몸이 심하게 떨렸고, 발작하는 몸은 제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어. 게다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모를 지경이었지. 소리에 민감한 야장월은 백은향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소리에 깼어.
"....!"
야장월은 황급히 백은향의 상태를 살폈어. 제대로 숨을 쉬질 못하고, 발작하는 것 같았지. 이게 그 여자가 말한 병이었던 건가. 야장월은 백은향을 천천히 끌어안고 토닥여주었어. 눈물도 천천히 닦아줬지. 야장월의 손길이 닿자 백은향은 몸을 바들바들 떨다 경직이 그대로 풀려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어. 다행히 호흡도 제대로 돌아와 있었지. 야장월은 제 품에서 기절하듯 잠든 백은향을 바라보았어. 백은향과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눈에 띄게 야윈 몸과, 전에는 없던 흉터들, 그리고 이런 발작 때문에 생겨난 듯한 자해 같은 상처들. 야장월은 천계의 누군가가 해줬던 이야기가 떠올랐지.
'인간은 혼자 있으면 가장 약해지네. 인간을 가장 빨리 고립시키는 방법은 멀쩡히 살아가던 인간을 감옥이나 산 속에 가둬버리는 것이지. 또한...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아니면 오래 뺏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본 가장 처절한 인간은... 사랑하던 인간이 죽자 너무나 슬퍼 결국 그를 따라 죽은 인간이었네.'
사랑. 야장월 자신에게는 그저 스치듯 지나갈, 달콤한 시장통 냄새를 싣고 오는 바람 같은 감정. 하지만 백은향에게는 그 사랑의 무게가 어땠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야장월은 깨달았어. 이 작고 여린, 하지만 지금까지 의연히 버텨준, 눈이 보이지 않는 제 아내에게는- 자신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까보다 더한 죄책감의 파도가 밀려왔지. 가슴께가 시큰거리고 아팠음. 하지만 이건 백은향이 7년 동안 느낀 고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야장월은 잘 알고 있었어.
'...결국 이런 병이 생긴 것도, 나 때문인가.'
언젠가 한 번 평민 인간들이 읽는 삼류 소설이라는 걸 읽어본 적 있는 야장월은 그 삼류 소설 속의 누군가가 생각났지. 제 목표를 이룬 후에, 아내가 필요없다고 느껴 아내를 버리고 떠나 버린, 여주인공의 환장할 전남편. 아, 내가 그 전남편이 되었구나.
이 이후로 야장월은 백은향이 죽고 나서 향후 10년까지 유랑을 떠나지 않았으면 해..
다음 날, 백은향은 천천히 일어났어. 차가운 겨울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제 부군 야장월의 숨소리가 들렸지. 늘 차가웠던 혼자만의 잠자리는 이제 따스한 온기가 있는 부부의 잠자리가 되었음. 백은향은 조금 더 꼭 안기고 싶었지만 망설였어.
'...내가, 감히...이래도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야장월의 옷자락을 조그맣게 붙잡았어. 아, 그 약재의 향이 코로 휙 들어왔지. 장월님, 정말 장월님이셔. 돌아오신 거야-... 백은향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야장월에게 더 다가가는 건 꺼려했어. 야장월은 용이니까, 그가 허락해줘야만 할 수 있을 만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그러니까, 더 꼭 안기기 같은 것들은 하지 않고 늘 가만히만 있었지. 모두 다 야장월이 싫어할까봐서였어. 백은향은 야장월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몇 년 동안 보며 지냈으니까. 백은향이 망설이던 그 때, 야장월이 백은향을 더 꼭 안았어. 뭔가 통하기라도 한 듯이. 백은향은 얼굴에 화악 열이 오르는 걸 느꼈지. 제 생각을 엿들으신 건가요? 장월님이라면, 그래도 좋아요...
"...일어났어?"
"...네...."
발작이 있었던 새벽이 아득히 먼 과거로 느껴질 만큼, 야장월의 온기는 너무나 따스하고 달콤했어. 야장월은 이제 일어날 준비를 했지. 하지만 일어나려는데, 백은향이 옷자락을 붙잡고 있어서 걸리고 말았어.
"...ㅈ, 죄송...죄송해요,"
"...나랑 더 누워 있고 싶었어?"
"...ㄴ, 네...."
이불을 그 작은 고사리손으로 꼼지락거리며 만지는데, 그게 어찌나 귀여운지. 야장월은 피식 웃으며 다시 누워 백은향을 안았어.
"...다음부터는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ㄴ, 네...? 제, 가....감히, 그래도 될까요?"
"...넌 내 아내야. 용의 아내라면 당연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야장월은 품에 안긴 제 작은 아내를 토닥여주며 나지막이 말하기 시작했어.
"....미안해. 내가 너무....오랫동안 떠나 있어서, 네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그래도, 약속은...지키셨잖아요... 돌아오겠다는....그 약속이요."
보통의 인간이라면 당연 이혼을 요구할 텐데. 어째서, 너는, 몹쓸 나를 아직까지도 그런 친절한 말로 달래주듯이 행동하는 걸까.
"...날 원망해도 좋아."
"...7년 동안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면....거짓말, 이겠죠...."
백은향은 그 고사리손으로 야장월의 거친 손을 잡아주면서 천천히 말했어.
"하지만....돌아와주셨잖아요, 그거면....그거면, 족해요...."
그 말에, 야장월은 백은향을 더 꼭 안으며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마음속으로 속삭였지.
'너는, 왜 이렇게 착해빠져서는, 나 같은 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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