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드는 곳에서는 해바라기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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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인, 여명(지나간 과거는 현재의 찰나)

삼셋 by 삼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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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주의 중심이 있다면, 그곳에서 가장 먼 곳이지.


끔찍하게 먼 아우터 림에서도 가장 먼 외곽부에 속하는 행성. 만일 당신을 어지간히 정신 나간 여행자라 가정한다면, 은하의 가장 밝은 위치에 있는 행성들 중 하나인 코러산트에서 가장 질 좋은 항공편을 잡을 수 있다. 물론 ‘질 좋은’ 항공편이란 당신에게 여비나 정신력이나 남아도는 행운이 따라 준다는 가정 하에 따르는 조건이다. 이 셋 중 하나라도 모자라다면, 당신은 영구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우주 해적들 사이에서나 술안줏감 풍문으로 도는 우주 유령들 중 하나에 합류하게 되겠지. 그보다 심하게는, 더러운 담요와 악취 나는 음식을 감내하며 싸구려 우주선의 더 싸구려인 위생 상태를 간신히 견디다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쯤엔 벌써부터 잔뜩 지쳐 버린 정신으로 집에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를 개척하게 되는 거고….

교통비도 아낄 겸 경유로 행성들 사이를 건너뛴다는 결정은 별로 현명한 게 못 된다, 안 그래.

그러나 우리가 숙지해야 할 점은, 하고 많은 여행지들 중 하필이면 아우터 림을 고려한 당신이 이미 충분히 정신 나간 여행자라는 것이다. 미학을 중시한 알록달록한 돔을 쌓아 올린 건물들이 아기자기한 찻잔 세트처럼 마음을 즐겁게 하는 미드 림의 나부는 좋은 여행지지만 당신에겐 요양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설령 청자기의 표면처럼 잔잔하고 투명한 나부 바다의 이면에는, 수중 괴물에 대한 으스스한 전설이 점쟁이의 불길한 카드 뒷면처럼 숨겨져 있을지라도. 하물며 부유한 코러산트는 어떤가. 행성 전체에 강철 나무처럼 자라난 빌딩들이 반사하는 인공 불빛이 별마저 덮어 가려 버리는 은하 수도의 야경을 보고도 당신의 심장은 지나친 편리성에 몸서리를 칠 수도 있겠지. 이건 아니야. 당신이 말한다. 나는 팔다리가 굳고 눈이 침침해질 무렵 말년을 보내고 싶은 장소를 채택한 게 아니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여행이야. 청춘의 서가에서 추억이 영원토록 가장 좋은 물감으로 덧칠하도록 간직해 두었다가, 내가 불혹의 늙은이가 되어도 또 다시 열여덟 청춘을 맞을 후손들에게까지 두고두고 물려줄 만한 짜릿한 모험담.

사실, 그런 당신이 아니라면 아우터 림은 도무지 일반적인 사람이 기거할 곳으로서 추천해 줄 만하지 않다. 성계 전체에 만연한 패배주의와 이기주의적 사고의 풍모. 거주민들의 다 해진 소매 끄트머리에서 자유 없는 투쟁이 기름때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문명화라는 개념의 발명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그들 모두가 한목소리로 고발하는 듯하다.

그래.
보여?
어둠 없는 빛이 어디에도 없다면, 빛 없는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을…….

그리고 그토록 정결한 어둠의 맨 한가운데이자 가장 끄트머리에, 타투인이 있다.
우주 전체의 범법자, 무법자, 원하는 자가 없어 처량맞게 버려진 쓰레기들이 당연한 것처럼 흘러 고이는 별. 타투인의 왕이라는 직책이 범죄자들의 왕과 동치가 된 지도 어언 600년. 누구도 타투인 같은 별에서 무언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태어나거나, 자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질서의 유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가장 모범적인 과제로 보여주는 행성에서, 한편.

타투인, 공항 도시 모스 아이슬리, 도시 입구 남동쪽의 샛길을 따라가면 보이는 다 쓰러져 가는 집. 그곳에서 두 소년이 햇살에 비친 먼지를 맞으며 누워 있었다.

"짜증나."

소년들 중 유달리 키가 작은 쪽이 투덜거렸다. 친구와 대련 겸 몸싸움을 하던 중 타격점을 잘못 잡아 찬장에서 쏟아진 풀잎 더미를 고스란히 맞았던 것이다. 어지간히 방치되어 있었던 모양인지 먼지까지 풀풀 날려 댔고, 와중에 상대방은 잽싸게 몸을 피한 데다 더 가까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었던 덕에 괴상한 풀더미에 뺨을 맞은 것은 저밖에 없었다.

음, 사실 맞은 곳은 정수리다. 냅다 식물에게 따귀를 맞은 소녀는 희귀 유사–인간 종족인 고르고스의 몇 되지 않는 후예였고, 머리에 접착제로 붙인 모자처럼 유연하게 붙어 있는 레쿠는 외부 이물질의 침투로부터 비교적 말랑한 살갗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기왕 보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면 확실하게 할 것이지, 왜 뱀이 되다 만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맨들하니 닦인 거울을 들고 아무리 열심히 고개를 기울여도 결코 머리의 모든 각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이따금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 망가진 풀잎 바구니 손잡이를 고쳐 보려다 실패하고, 침착하게 이것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고 합리화하며 던져 버린 참이었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평소에도 머리가 뱀에 반쯤 먹힌 느낌인데 풀까지 묻으니까 머리에서 식물 키우는 사람 같다."
"선 넘네?"
"잔디 심으면 자라나?"
"자라겠냐고!"

고르고스 소녀 피티아는 그러는 너는, 으로 시작하는 뭔가 근사한 비유를 말하려고 했다. 그 시도가 보기 좋게 실패한 이유는 밉살스러운 햇살 때문이었는데, 때마침 열린 덧창 너머로 햇살이 남색 머리칼에 베일을 드리웠던 것이다. 화려한 바닷빛이 아침 하늘 같은 이마 위로 어롱지듯 구불거리며 떨어진 가운데, 말간 얼굴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혀를 내밀고 미끄러진 것은 햇살인데 물방울의 쏟아짐이 보였다. 말해 무엇하나, 인스탄스 데저트레인은 분명한 미인이었다. 시각이 멀쩡한 놈이라면 누구나 차마 거기에다 대고 그러는 너는 머리에다 시든 블루베리 껍질 끼얹은 게⋯. 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인 전서 1장 1절: <필요하다면 우주가 나서서 미모를 뽐내는 순간을 도와줌>에 얻어맞은 피티아는 마지막으로 덧없는 발길질을 하며 휙 돌아누웠다. 선생님이야 뭐라고 하시던 저놈의 덧창을 고쳤어야 했는데. 친구의 힘 빠진 발길질을 피하며 깔깔 웃은 인스탄스는 고목에 매달린 매미처럼 친구의 등 뒤로 훌쩍 매달렸다. 당장 이 작대기들을 치우라는 아우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 손 양 발을 모두 동원한 인스탄스, 이하 인스가 속살거렸다.

"있지⋯. 이따가 네 방에 애들 초대해서 게임 할 거거든. 너도 올래?"

저럴 수가. 피티아는 입을 딱 벌리고 남의 방을 마치 자기 방처럼 권하는 뻔뻔함을 마주했다. 순간 직전의 수모를 잊은 그는 바보처럼 고개를 돌렸고, 마냥 휘어진 눈과 마주쳤다.

"기분이야, 특별히 끼워 줄게."
"너 혹시 트윌렉 혼혈이 아니라 악마 혼혈이냐. 우주에서 가장 염치 없는 생명체 말이야."
"글쎄. 그러면 내 어머니는 악마의 부인이 되는군. 그 사람치고는 너무 강해 보이는 수사인데⋯ 그래서 올 거야 말 거야."
"오긴 어딜 와. 다 꺼져. 오기만 하면 전부 내쫓아서 초짜 타투인 여행자들을 위한 불길한 복선으로 전시할 거야. 남들한테 해 준 거 하나 없는 인생에 하나쯤은 선행 좀 한다고 치지 뭐."

겨우 그걸로? 쪼잔하다! 아슬하게 소녀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나이이기는 하나 벌써 성인이 될 날이 성큼 다가온 나이, 아이처럼 꺄르르 웃는 친구의 나잇값 못 하는 낯을 보며 피티아는 한심하다는 내색을 부러 지우지 않았다. 미색의 음성이 종처럼 울려 대어서, 망가진 바구니 따위도 이내 머릿속에서 잊혀 버렸다. 타투인의 명물 모래폭풍이 수백, 수천 번 흔들고 간 끝에 이제는 나사 자국이 둥글게 닳아 버린 덧창만이 그들을 위한 조악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좋은 나날이었는데 말이야.

왜 나는 우리가 망가진 물건들을 어떻게 했던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을까? 그런 별 것도 아닌 일을 이⋯ 별것도 아닌 순간에.

특별할 것 없는 청년, 피티아는 냉동 석상을 멀거니 올려다본다. 표면이 돌로 깎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표현의 섬세함이 영 조잡한 석상은 현실감 하나로 모든 비예술적 자질을 상쇄했다. 당장이라도 도주할 듯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달아날 수 없는 현실을 예감하고 절망한 듯한 성인 남자. 이건….

'한 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유령처럼 따라붙는다. 과거의 악몽은 언제나 유령의 가죽을 쓰고 있기 마련이므로. '후회할 거야. 그렇지만 됐어. 가. 가라고. 네 죽음과 싸우러.'

피티아는 소스라치듯 숨을 삼킨다. 황급히 석상에서 떼어낸 손끝에는 유령의 냉기가 달라붙는다. 그는 타투인 사람이다. 그런데 사막의 열을 식혀주는 차가움이 이렇게 불온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니. 지저의 세상에서 발을 뻗은 듯한 냉기가 어린아이처럼 키득 웃었다. 아이야, 너무 놀라는구나. 이건 사람이 아냐. 네 친구도 아냐. 단지 빛 바랜 잿빛 버드나무 가지일 뿐이야……

때때로 가장 감각적인 본능에 맡긴 감상이 어지간한 통찰보다도 상황의 본질을 꿰뚫곤 하는 것은 인간사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일시적인 패닉으로 머리가 둔중하게 울렸기 때문에, 정작 피티아는 한 발 늦게 발목에 와 닿은 기체의 정체를 깨달았다. '얼음이야.' 그가 히스테릭하게 생각했다. '미친 놈들이 사람을 통째로 얼려서 배달해온 거야. 취미 나쁜 현상금 사냥꾼 자식들.' 그리고 근처에 문제의 취미 나쁜 현상금 사냥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상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요즘은 취향 한번 고상해졌네? 예로부터 좋은 취미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나머지 남의 고통을 줄여 주는 데에는 별로 관심도 없는 줄 알았는데, 미스터 펫."

물 흐르듯 나온 비난은 딱히 보바 펫 개인에 대한 기존의 원한에서 기인한 건 아니었다. 방심했을 때 가장 두려워했던 악몽이 실현되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럴 것이듯이, 그의 기분은 나락으로 처박혀 있었다. 할 수 있다면 누구와도 능히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 상대가 그런 화풀이에 순순히 어울려 줄 만한 인사가 아니었기에, 그날은 대진이 나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보바 펫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이죽였다.

"오, 물론 아직도 관심은 없어. 레이디 스스로-자랑할-만한-긍지도-없음." 

저게 성씨 없는 걸로 엄마 없음 드립을 쳐.

먼저 시비를 건 것은 편의적으로-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잊고, 피티아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순간적인 패닉이 가시고 나니 상대에 대한 굴절 분노로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기 때문에, 그가 허리춤에 블라스터를 차고 다닌다는 것도 뒤늦게 인식할 수 있었다. 상관없어, 피티아가 생각했다. 저자의 아버지라는 작자는 2대째 취향이 괴상한 데다(세상에 누가 자기 성씨가 펫인데 아들 이름을 보바로 짓는담?) 현상금 사냥꾼들의 이른바 긍지란 대개 야만과 비합리에 양발이 걸쳐져 있었다. 평소 그것을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도발로써 그것은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였다. '오, 네 아버지는 뭐 자랑할 만한 인사셨나 보지. 그래도 내 친구의 머리만 잘라오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뭐 이런 말들.

그리고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피티아에겐 다행히도, 그리고 불행히도, 근처에서 지나가던 소년 하나가 다급히 그를 막아세웠다. 최근 일이 많아(연말은 언제나 범죄 성수기의 시대인 법이니까) 제대로 자지 못해서 연해진 몸이 휘청이며 피티아의 앞에 섰다.

"우와아아앗 피티아! 피티아……! 그러면 안 돼요…!"
"왜."
"왜냐뇨, 그야 지금 피티아는."

소년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양 방향으로 처량하게 휜 레쿠가 분홍 낙엽처럼 풀썩 가라앉았다. 발화자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감안할 수 있는 일이므로 피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나, 시선 처리가 다소 무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피티아는 위에서부터 따끔따끔 올라오는 열을 삼키며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뒷목 부근이 따끔거리는 듯한 환상통이 일었다.

"좋아, 캐리." 피티아가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잘 모르겠다. 애초에 의도했던 것보다 좀 더 부드러운 음성이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다.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만 물러나. 앞으로는 보바 펫 낀 일에 끼어들지 말고. 사람을 얼리고 다니기나 하다가 자기 제트팩까지 얼려 버릴 놈하고 엮였다간 제다이가 강림해도 못 구해 주니까."
"스스로도 재주가 시답잖단 건 알았나 보지."
"닥쳐."

비록 서로가 서로를 유구히 싫어할지언정, 보바 펫과 피티아의 관계는 대개 거의 모든 부분이 얄팍했고 악의는 시원찮았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 의견이 있었다. 바로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보바 펫은 만일 지도자라도 된다면 시간 낭비가 너무 싫어서 존중으로 통치하고 싶어할 뒷걸음질 성군 류였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바 펫은 이미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치의 시비를 모두 채운 것이다. 피티아는 한숨을 쉬었다. 골이 죽을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리고 다행히도, 사람은 이딴 일들로 죽지 않는다. 단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실망하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야만 한다고 해도.

그래. 죽음은 그런 식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않지.
절망적인 것은 보편적인 진리에마저 허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것. 너무 멍청해서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망조차 하지 못한 자들. 너무 연약해서, 너무 다정해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마음을 써서.

"……."
"피티아."
"난 괜찮아. 캐리."

괜찮기는. 캐리는 새침한 눈을 양순히 누그러트리며 생각했다. 그러겠냐? 내가 인의 일이 있는데도 그런 뻔한 말에 속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무슨 반응이 돌아오던 속 터질 반응일 것이 뻔하니까.

피티아 클레이모어. 자신이 아는 그는 자기 인생만 챙겨도 족하다 못해 모자랄 것이 인생인데 남의 인생 이야기에 너무 신경을 쓰는 바보. 사람이 이야기를 듣는 능력이 있는 것도 모자랐는지 무언가 궁금증이 생기면 주체를 못 하지. 저러다 너무 위대한 이야기에라도 홀려 버리면 어쩌려고. 피티아가 들으면 싫어하거나 짜증을 낼 말임을 알지만 캐리는 분수라는 단어를 믿었다. 한 사람의 그릇이 감당할 수 있는 바에는 정량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안다. 가진 거? 많을수록 좋지, 그야 없는 것보다야.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만찬장에서의 피티아는 제 것으로 안배된 몫들 중 가장 좋은 것들을 두려워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져도 지킬 수 없으니까. 바꿔 말해, 피티아는 이미 그런 것들을 충분히 욕망했다. 욕망하는 자만이 자신 안의 결핍을 뚜렷이 읽는다. 캐리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그야 한 솔로가 그런 위대한 것이냐 하면 글쎄⋯⋯. 뭐⋯ 아마도 특정 취향의 누군가에게는 수요가⋯. 어느 부유한 행성의 성격 특이한 귀족이라거나. 물론 자기에게 준다면 줘도 안 가질 사람이긴 하지만. 캐리가 한 솔로에게 특별히 나쁜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던 그의 입매는 잘 닦아 광을 낸 놋쇠를 닮은 미소로 번들거렸다. 나랑 상관만 없다면 그런 사람은 싫어하지 않아. 처음 플러팅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경계했으나 좀 관찰하니 그것은 상대의 종족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모든 미인을 대상으로 던지는 의례적 멘트인 듯싶었고 이후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런 일을 두 번 하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이긴 해도 그 정도면 본성이 나쁘지 않은 인간 평타는 친다.

단지 반군에 들어갈 인간상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해서 그렇지. 처음 한 솔로가 반군에 들어가느라 자바의 빚을 갚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낀 충격이란. 더구나 그 말은 도망친 채무자를 추격해 잡아 오라는 명을 받은 피티아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한 말이었다. 이길 희망도 없는 정치싸움에 끼느니 밀레니엄 팝콘 호—잠깐만, 이름이 이게 아니었나?—를 처분할 동류라고 생각했는데. 애써 잊으며 살려 애썼던 군청색 머리칼이 기억 속에서 되새겨지고, 그는 속으로 큰일 났다고 세 번 복창했다. 왜냐하면 캐리는 한 솔로에게 별 인상을 받지 못했어도 피티아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캐리 클레이모어는 자신이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우주선에 멋들어진 황금 주사위 장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주사위 장식의 끈을 기어오르는 뱀 모양의 매듭은 순은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그 매듭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왔는지, 본래 어떻게 쓰는지도 안다. 낡고 이곳저곳에 잔 흉터가 남았지만 순도 높은 은은 귀금속류 중의 귀족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중히 여긴 사람도. 지식은 곧 힘이라지만 그가 아는 모든 정보들 가운데서도 쓸모없기로는 순위권을 다툴 정보였다. 캐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난 일단 가 볼게요. 자바 님이 축하주 가져오랬어요. 맛있고 숙취 심한 거 가져갈까 하고요."
"그리고 오래된 거. 쭉쭉 비우기 좋긴 한데 막상 비우고 나서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닌 날에 비워 버린 게 좀 아까울 만한 거 말이야."
"이 몸에게 맡겨만 주시라."

발소리를 내지 않고 돌아서며, 캐리는 아까 보지 못한 목덜미 부근을 그제서야 짚었다. 목소리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건조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난 사이기도 하니 아마 피티아에게 눈이 두 개 뿐이었다고 해도 내심이 가볍게 읽혔을 테다. 나를 위해서라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거죠?

캐리의 예상대로 피티아는 캐리의 걱정을 알고 있었다. 다만 캐리의 생각을 길게 잇지는 않았다. 그는 데저트레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감히 농담 같지도 않은 냉동 조각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나타난 한 솔로를 생각했다. 이미 잃었거나 앞으로 잃을 친구들을 생각했다. 어쩌니, 캐리. 입가가 뭉그러지는 것이 거울 없이도 느껴졌다. 이 타투인 땅 위에서 내가 두려워할 일은 잔뜩 남았어도 기겁할 일은 더 없어서 말이야.

헛웃음을 쳤다. 이 오래된 광대극에 새삼 겁에 질리기엔 스스로가 너무 무디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서. 타투인은 저주받은 땅. 우리는 고독과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모두 노예다. 망가지거나 버려져도 마음 쓰는 사람 하나 없는 물건. 가엽고도 딱하게도.

어떻게 해. 피티아가 황망히 되뇌었다. 어깨가 가볍고 귓가에 울리는 종소리는 이제 없는데 시간만이 네 운명을 끝도 없이 되풀이해⋯. 인스탄스.

사막비가 드문 타투인이라지만 이번 해는 유난히 태양이 거셌다. 그 아래에 사는 객체들의 모든 존엄을 부정하며 진실을 빛 아래로 끌어내리는 햇살, 그것이 미치는 경계선 속에, 그러니까 즉 발치에는 말간 들풀이 수줍게 자라나 있었다. 작은 몸을 필사적으로 옹송그리며. 찰나, 그 기막힌 꼴을 멀거니 노려보며, 피티아는 그러는 스스로는 살면서 얼마나 운명에서 자유로워 현명했던가를 반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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