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여름밤

고죠우타

Dusk by 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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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회전 헤테로 합작에 참여했던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고죠는 침대 위에 늘어져 있었다. 털털 돌아가는 선풍기는 시원찮았고 끈적거리는 공기 때문에 살갗에 닿는 시트의 감각도 별로였다. 늘 최상의 환경에서 살던 도련님에게는 많은 것들이 처음이었고, 이런 여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깎여나가는 듯한 느낌은 그다지 기분 좋지 않다.

그렇게 누워만 있고 싶기도 했으나 고죠는 이내 벌떡 몸을 일으키고서 옆에 던져둔 선글라스를 썼다. 일어나는 기세에 비해 걸음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왔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은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대지를 있는 대로 달구는 긴 해는 싫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없지는 않았는데, 바로 노을이었다.

주술고전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고죠는 같은 시각에 밖으로 나오는 습관이 생겼다. 산속에 있는 주술고전은 밤이 일찍 찾아오는 편이라, 4월의 이 시각은 벌써 깜깜했다. 그러나 지금은 산 너머로 저무는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노을을 보고 감동할 정도의 대단한 감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저 색은 싫지 않았다. 늘 앉던 바위에 대충 걸터앉아 그것을 바라보던 고죠가 문득 손목의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이제 곧.

 

♫•*¨*•.¸¸♪。・:*:・゚

 

노랫소리였다. 가느다랗게 시작한 소리가 천천히 울림을 더하며 퍼져나갔다. 상냥하고 온화한 선율에는 주력이 실려 있었다. 고죠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것을 들었다.

소리의 주인과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이 순간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사람은,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몇 곡쯤 이어지던 노래가 어느 순간 멈췄다. 눈을 뜨자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에 미련을 가지는 일도 없이, 고죠는 그 자리를 떴다.

 


 

주술고전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생처음 살아보는 좁은 방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해서 목적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 이 밤 산책의 시작이었다. 아직 차가운 봄의 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얻을 것도 없이 걷던 그가 왠지 모를 허무와 함께 돌아가려 했을 때 발길을 붙든 것이 이 목소리였다.

당시엔 누군지 알지 못했다. 다만 기분 좋은 목소리였기에 그 자리에 서서 노래가 멈출 때까지 들었다. 주변에 적막이 깔리고서야 찬 바람을 맞은 볼이 따끔거리는 것을 눈치챘을 정도로 멍하니, 그야말로 빠져들어서.

늘 같은 시각에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았다. 훈련을 위한 술식의 사용이 혹시 모를 혼란을 초래할까 싶어 그런 것 같았다. 성실하게도.

세 학년 위에 노래를 술식의 매개로 하는 선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노래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어색하다고 생각하던 중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우타히메라니, 너무나 직관적인 그 이름에 본인 앞에서 배를 잡고 웃어버린 날부터 고죠의 습관이 하나 더 늘었다. 찌르는 대로 반응해주니 시비 거는 보람이 있었다.

매일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고 우타히메에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놀리듯 몇 마디를 얹으면 분명 또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줄 텐데. 하지만 고죠는 그런 충동을 매번 참았다. 그렇게 소비해버리기에는 왠지 아깝다고 느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고죠 사토루는 분명 그 짧고 평화로운 시간이, 좋았다.

우타히메가 고죠를 성가시게 여겨 그가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노래한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었다.

 

매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고죠는 특급이었고, 우타히메는 4학년으로 수업보다는 임무가 중심이 되는 일이 많았다. 늘 일손이 부족한 주술계에 몸담는 이상 늦은 시간까지 임무가 이어지는 것도 별난 일이 아니었다.

우타히메의 노래가 들리지 않아 헛걸음을 한 날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래도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소식을 들을 수 있어서, 그 주력을 느낄 수 있어서, 그 날 밤엔 어김없이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왔기에. 부재를 신경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 공백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고 만다. 어디까지나 관성적인 의미로.

그래도 그때까진 괜찮았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잠깐이라도 우타히메의 주력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저녁 연습을 빼먹을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나흘째 그냥 노을 구경한 사람이 된 고죠가 침대에 누워 왠지 모를 허전함과 함께 눈을 감은 날, 내일은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다짐한 바로 그 날. 우타히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서 잠옷을 입던 우타히메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아픈 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니 몸이 녹아내린 것처럼 조금 움직이는 것조차 피곤했다.

겨우 머리를 말리고 나와서는 슬쩍 현관 밖을 확인했다. 아까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이었겠거니 생각하고 침실의 불을 켰을 때였다.

“…….”

너무 놀라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의 우타히메가 바로 그랬다. 벽 한쪽을 크게 차지하는 창문 너머로 방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나서야 막힌 숨이 터져 나왔다.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뭐 하는 거야!?”

“――, ―――…….”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창문 너머까지 들릴 만한 성량은 아니라 우타히메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조금 열어주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죠가 말했다.

“현관문 두드렸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 놓고.”

아까 그게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이 시간에 여자 기숙사에 찾아와 이런 불만을 늘어놓는 이유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진 우타히메가 조금 진지해진 톤으로 말했다.

“샤워하고 있었어. 무슨 일 있어?”

“……우타히메는 조금 경각심을 갖는 게 좋을 거야.”

아하, 알았다. 학교에서 짜증 나게 구는 거로는 모자라서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와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우타히메는 머리를 짚었다.

“선배한테는 존댓말 쓰랬지. 그리고 용건이 없으면 돌아가. 안 그래도 피곤하니까.”

“왜?”

“……뭐가.”

“왜 피곤한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렇게 대꾸하려던 우타히메의 시야에 고죠가 들고 있는 흰 봉투 하나가 들어왔다. 시선을 느낀 고죠가, 답지도 않게 그것을 슬쩍 뒤로 숨겼다.

“그건 뭔데?”

“내 질문이 먼저인데.”

우타히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나 아픈 거 아니야.”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고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죠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의 답이기는 했다. 그러나 솔직히 대답하는 법을 아직 모르는 열다섯 소년은 머쓱함을 덮기 위해 괜히 더 얄밉게 대꾸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건 우타히메 거 아니거든? 자의식 과잉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럼 왜 굳이 약이랑 쿨시트랑 포카리가 든 봉투를 들고 남의 방을 훔쳐보고 있던 건데?”

“이건 내…… 거야.”

시간을 3초만 되돌릴 수 있는 술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뱉는 순간 바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주워 담을 방도가 없었다. 갑자기 낭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아하하하, 하하하…….”

“너무 웃잖아!”

“웃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하하. 그래서? 아픈 사람이 여기까진 무슨 일인데?”

이대로는 안 된다. 우타히메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죠는 방향을 틀기로 했다.

“오늘 학교 안 나왔잖아. 약한 우타히메가 여름 감기라도 걸려서 뻗어있을까 해서 찾아온 게 맞아. 선배가 무안해할까 봐 신경 써준 후배의 마음도 몰라준다니, 역시 우타히메는 우타히메네.”

“안 약하거든!”

웬일로 걱정해주는가 싶어 조금 귀여울 뻔했는데 여전히 저 입이 문제였다. 우타히메는 한숨을 내쉬고서 덧붙였다.

“어제오늘 졸업시험이었어. 어제는 필기, 오늘은 실기. 알았으면 이제 좀 나가, 오늘 일찍 잘 거니까.”

졸업시험.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런 것을 위해 따로 준비한다는 개념이 없는 고죠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그럼 연습을 안 한 것도…….”

“연습?”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우타히메의 반문에 고죠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실언이 잦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우타히메, 졸업하는구나.”

“그거야 당연히 졸업하지. 뭐, 졸업해도 주술사는 보통 고전을 거점으로 활동하니까, 네 얼굴은 싫어도 봐야겠지만.”

“내 얼굴이 싫을 리 없잖아? 이렇게 잘 생겼는데.”

“그 자신감만큼은 좀 본받고 싶다.”

질렸다는 얼굴로 대답한 우타히메는 침대 위에 앉았다. 의미 없는 말씨름 끝에 정말로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별 용건 없는 거지? 얼른 가.”

창문을 닫고 잘 수 있는 날씨는 아니어서 우타히메는 고죠를 훠이훠이 쫓아내듯 손을 움직였다. 긴장이 풀린 건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우타히메를 바라보던 고죠가 불쑥 말했다.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이던 우타히메가 침대에 풀썩 쓰러지더니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러든가.”

“……정말?”

“가라고 몇 번을 말해도 듣지를 않잖아.”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다고 방금 말했던 것 같은데. 반쯤 잠든 목소리를 들으며 고죠는 생각했다. 물론 우타히메를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었지만.

고죠는 창문을 조금 더 열고 우타히메 방 안쪽에 걸터앉았다. 방금 샤워했다더니 물에 젖은 향기가 났다. 넉넉한 반바지 밑으로 뻗은 하얀 종아리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아 얼른 눈을 돌렸다. 역시 너무 무방비하다.

상념을 지우듯 고죠가 입을 열었다. 다행히 고죠는 멍석을 깔아줬다고 주저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언젠가 들었던 것도 같은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뭐든 다 잘한다더니 진짜였네. 우타히메의 첫 감상은 그런 것이었다. 어쩐지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졸렸다.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의식의 끝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언뜻 들으며 우타히메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저녁, 고죠는 평소처럼 밖으로 나왔다. 졸업시험이라는 게 끝났는데도 우타히메의 노래는 들리는 일이 없었다. 늘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오늘도 나오고 만 것이다.

잠시 쉬는 걸까, 아니면 우타히메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는 걸 결국 들키고 만 걸까. 노래 연습이 어쩌고 하며 이실직고한 셈이니 아무리 우타히메라도 눈치를 채 버린 모양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숨을 쉴 만한 일도 아닐 텐데.

하늘이 점차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것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뿐이었다. 내일은 정말 나오지 말아야지. 고죠는 어제도 했던 다짐을 다시금 반복했다. 그렇게 뒤를 돌아선 순간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니, 다른 소리를 찾아낸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목소리. 고죠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주력도 실리지 않은 그 선율은, 그 어느 날의 무척이나 상냥한 자장가였다. 고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글에 나오는 기숙사 방에 관한 묘사는 원작과 애니메이션 1기 2화에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시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방 구조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 같아서... 애니메이션엔 에어컨이 있긴 한데, 당시엔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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