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

귀하

떠나간 이를 위해 보내는 편지

엘리자베스. 부탁 하나만 하마. 복도를 쭉 가로질러 왼쪽에서 세 번째 방 안에 들어가면 옷장이 하나 놓여있단다. 그 안쪽의 구석에 놓인 보따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을 내게로 가져와다오.

제법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도 고급 진 비단과 같이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보따리를 풀어놓은 카츠라는 제 앞에 놓인 벼루와 붓을 내려다보았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벼루의 한 가운데에는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부분을 만지작거리던 카츠라는 처음 서당에 왔을 때,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벼루인 것을 떠올렸다. 복슬복슬한 누구 덕에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두 동강이 나버린 바람에 한동안 우울했었지. 그걸 선생님이 보시고 이렇게 깔끔하게 두 동강 난 벼루는 처음 본다며, 크게 웃으시고는 이 정도라면 다시 고쳐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끈끈한 풀로 붙여주셨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고쳐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또다시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옷장 안쪽에 고이 모셔두었지. 그때 다 메워지지 않았구나.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오르자, 카츠라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벼루를 내려놓았다.

다음으로는 붓이었다. 또 복슬복슬한 누구 덕분에 망가져 버린 것을 그해 제 생일이 되는 날, 타카스기가 새로운 것으로 구해다 주었다. 망가진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품질의 붓이라는 것이 눈에 바로 보였기 때문에 사양하려고 했으나 내가 그렇게 나올 것을 알고 일부러 생일날까지 기다렸다가 준 것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면 어릴 때에도 제법 똑똑했구나, 타카스기. 복슬누구 씨랑 투닥거리는 것을 매일 보느라 두 사람 모두 같은 수준으로 보였으니까.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즐거웠고 나는 두 사람 덕에 더욱 우등생으로 돋보였으니 말이다.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인 카츠라는 이 자리에 그 둘이 함께 있었다면 벌써 옆구리에 발차기가 날아왔을 것이라며 중얼거렸다. 그립구나.

똑똑.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와 함께 옛 추억의 늪에서 카츠라를 꺼낸 것은 엘리자베스였다. 혹여 종이가 찢기는 불상사가 없도록 단단한 상자 안에 담아 가져온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친 카츠라는 서로 고개를 까딱였다. 종이를 건네주고 곧바로 자리를 벗어난 엘리자베스를 뒤로한 카츠라는 건너 받은 상자를 열어 자칫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끔 천천히 꺼내 놓았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부드러운 질감을 자랑하는 종이는 무척 고급 진 편이었다. 그만큼 튼튼하기도 한 것이, 역시 엘리자베스라며 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먹을 갈 차례였다.

-먹을 갈 때는 너무 윗부분을 쥐면 먹이 부러질 수 있으니 중간이나 조금 아랫부분을 잡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먹을 가는 것이 서툰 아이들을 위해 손수 한 명씩 설명해 주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기분이었다. 조금 기울여서 하는 편이 먹이 튀지 않고 좋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비스듬하게. 

-코타로는 배움이 빠르군요. 괜찮다면 다른 친구들을 봐주지 않겠어요?

그 말에 신이 나버린 나머지 어떻게 대답했더라. 아마도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라고 했을 테고 그것을 본 타카스기가 지지 않겠다며 그날 종일 먹을 가는 바람에 마을의 버려진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다니는 수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색다른 방식의 수업이라 모두 들떴으니까. 물론 그 모두에는 자신도 타카스기도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많아진 먹의 양에 당황한 듯했지만 선생님의 나이스 한 대처에 고비를 넘겼었지. 나이스. 정말 나이스입니다 선생님.

또다시 추억의 늪에 빠져버린 카츠라는 이번에는 저스터웨이의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따라 감상에 젖는구나. 카츠라가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완성된 먹에 소매를 걷어 고정시킨 후, 붓을 쥐었다. 그대로 늪에 빠져 죽어도 나는 좋지만 말이야.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곧 자세를 잡은 카츠라는 잠시 서두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생님께 안부인사를 올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저는 하루에 우마이봉 열일곱 개를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긋하게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도 퍽 오래간만입니다. 머릿속이 맑아지니 몸과 마음도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전까지는 하루하루를 무척이나 바쁘게 보내기 그지없었으니까요. 오늘 에도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여명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다른 양이지사 동료들이 말하기를, 그 빛이 양이지사의 새벽이라고 불렸던 저와 닮았다고 합니다. 그리 불렸던 것도 지금은 옛날의 일이었으나, 그들은 좋은 뜻으로 말한 것이니 저 또한 그리 받아들였습니다.

실은 마치 전자레인지 안의 만두가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온몸 구석구석을 골고루 비추는 햇빛 때문에 전자레인지 바닥이 돌아가지 않아도 잘 해동되는 만두를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아, 참고로 고기만두입니다. 잡채가 들어가는 고기만두입니다. 제게 늘 야채만두를 주셨지만 사실 저는 고기만두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크흠. 이 이야기는 뒤로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그 햇빛이 너무나 따스한 나머지 온몸을 감싸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 언행이 풀린 듯합니다. 한 팔을 들어 얼굴을 쓰다듬던 빛을 가리니 저 멀리에 보이는 빛이 무척이나 밝아서. 너무 밝은 나머지 가슴의 한편 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떠오르는 태양빛이 그것을 가려주었습니다. 요즘의 해님은 타이밍도 제법 잘 맞추는가 봅니다.

처음에, 가장 처음의 한 달이 기억납니다. 

근래에 보았던 그의 안색이 날이 다르게 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좋지 않은 방향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농담 따먹기에 바빴습니다.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그리 많다니, 역시 이 카부키쵸의 유명 인사라는 이름이 괜스레 붙은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예전에 '곤란한 일이 생기셨다면 카부키 쵸의 무엇이든 해결 해주는 해결사 긴짱을 찾아가세요!' 하는 홍보용 전단지를 이곳저곳에 붙여두기까지 했었다는 것을 깜빡한 모양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대화의 방향이 조금 틀어졌습니다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말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저를 찾아왔습니다. 좋지 못한 안색. 가늘게 떨리는 손끝. 빈틈없이 온몸을 감싼 기모노. 그 사이에 얼핏 보이는 하얀 붕대까지. 처음에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지내온 시간이 몇인데, 그것 하나를 눈치 못 채는 일이 있을까요. 아니,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그는 꽤나 구석에 몰려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이기는 평소와 같은 마다오나 다름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던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며 본인의 상태에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하게 함구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의 상태에 대해 일절도 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나 숨기는 것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터였고, 그것을 억지로 파헤치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를 찾아왔던 그는 자신과 함께 사는 아이들의 신병을 제게 부탁하고는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직전, 어디로 가느냐는 저의 외침에 그는 작은 속삭임을 남겼을 뿐이었죠. 바람을 타고 돌아온 답은 당시의 저에게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아. 돌아갈 때가 된 거 같거든. 슬슬 집에 가야 될 거 같다.

그러니까 이제는, 돌아가야지. 그때의 표정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슨 일인지 그의 표정만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의 집은 모두와 함께 있는 이 거리가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다음날. 에도에서는 그의 옷자락 하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을 넘어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언제 존재했었냐는 듯,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스스로의 존재를 감춘 것이 마치 그의 존재가 정말 귀신이었나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왔던 저 조차 말입니다. 

저는 그가 아이들을 두고 홀로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를 믿었고 그가 사랑하는 이 거리를 믿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곳에 남아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였습니다. 그랬기에 더더욱 그는 떠날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이 거리의 모두를 위해서라도.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미련한 자식."

마루의 기둥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혀를 한번 차고는 곰방대의 연기를 한번 들이마신 후에 한숨과 같이 내뱉었다. 이내 들고 있던 곰방대를 소매 안쪽에 집어넣으며 자세를 바로잡으니, 곧이어 뒤쪽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보폭이 넓었던 것인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발소리는 어느새 사내의 바로 옆에서 멈추어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그렇게 당연한 건 묻지 말라고."

하하, 당연한 건가요.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도 잇따라 작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어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말이 없어도 편안하게만 느껴지는 그런 침묵이었다. 선생님.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녀석, 곧 올 거야.

"…그렇군요."

선생님은 이전의 사내와 똑같이 대문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기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모습이 퍽이나 태연해 보였다. 사내가 눈을 흘기더니, 몸의 방향을 틀어 선생님의 주먹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리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걸.

"손이, 떨리고 있잖아."

정말 미세할 정도로 떨고 있었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겨우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피부가 손에만 새하얗게 질린 것이 유독 눈에 띄었다. 손바닥에는 그리 길지도 않은 손톱의 자국이 찍혀있었다. 사내의 손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온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선생님은 이내 푸스스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신스케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군요.

"걱정되는 거야?"

선생님을 눈을 똑바로 마주 보던 사내, 타카스기 신스케가 말했다. 아무래도. 선생님이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타카스기가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어먹은 것인지, 분명 자신과 카츠라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내왔던 인연이 선생님과 그였다. 그러나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삽질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줄곧 옆에서 직접 봐왔던 그에게는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당신은 정말 바보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타카스기는 이 말을 직접 내뱉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과정이 얼마나 불안해도 결국은 당사자에게 듣는 것이 가장 안심될 테니까. 진상을 얼추 알고 있는 타카스기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어 보였다.

"그리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타카스기는 그가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워하지 않아."

그 녀석을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간의 공백이 있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타카스기가 단언했다. 지금에서야,라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이었기에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으리라. 물론 미웠던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롯이 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게 화를 낼지언정,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많이 부딪혔죠? 많이 다치고."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타카스기를 콕콕 찔러댔다. 바로 그 점에서 타카스기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찔러대는 부위마다 전부 살아생전에 그와의 전투에서 생긴 상흔이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도 않다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양심에 찔리잖아. 이 사람, 아닌 척하면서 전부 꿰뚫어 보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순간적으로 예전에 서당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꿀밤을 맞던 것을 기억한 타카스기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옷을 단단히 여몄다.

언제 벌써 가을이 다가온 것일까. 카츠라는 괜스레 바람이 스쳐 지나간 손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쉬어가는 일 없이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인 카츠라는 어느새 도착지에 다다랐다. 산 중턱에 위치한 이곳은 마음이 심란하여 머리가 어지러울 적에 그것을 진정시키고자 몇 번이나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 앞에 셋이서 모여 사이좋게 회포를 풀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건만, 그것은 실현시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 증거로 지금 이곳에는 카츠라 그 자신만 홀로 서있지 않은가.

카츠라는 제 앞의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은 비석에 가까이 다가가 품속에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고기만두를 꺼내어 비석의 앞에 살포시 얹어놓았다. 잠시 동안 비석을 마주 보던 카츠라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때었다.

"선생님."

카츠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친구라는 두 녀석이 의리도 없이 먼저 선생님을 뵈러 가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나 선생님을 좋아하더니, 결국에는 따라가버렸네요. 잔잔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카츠라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지만, 쓸쓸한 느낌이 한껏 묻어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녀석들도 어엿한 성인이니 예전보다는 얌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다행히 지금은 선생님께서 곁에 계실 테니 걱정은 없습니다. 과거, 서당에서의 일이 생각났는지 카츠라는 다시금 즐거운 듯 웃어 보였다. 저는 염려하지 마시길.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 느긋하게 돌아서 가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찾아온 이유는 선생님이 아니었기에, 평소보다는 짧게 말을 마친 카츠라가 이름 없는 묘비를 향해 묵념을 보냈다.

"…언젠가 네가 말했더랬지.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고개를 든 카츠라의 눈앞에는 이름 없는 비석의 옆에는 또 다른 비석이 세워져있었다. 저기 밑에 이미 놓여있는 자의 것이었으나. 이왕이면 선생님의 곁에 함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이들의 허락을 구해 카츠라가 새롭게 놓은 묘비였다. 그때 아이들이 뭐라고 제게 답했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사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매우 인상 깊었던 대답이었으니, 참으로 그가 말할 법한 이유였다. 그 녀석의 신념이 너희들을 물들여버렸구나. 아니면 그 반대이련 지. 카츠라는 조심스럽게 소매 안쪽에 놓은 종이를 꺼내들었다. 펼친 종이에는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있었는데, 그것은 카츠라가 선생님에게로 보내는 편지였다.

"내가 이 편지를 왜 자네 앞에서 꺼내 든 이유를 알겠는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이 안에 담은 말을 네게 먼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라. 갑자기 바람이 불어 카츠라의 긴 머리카락 잔뜩 헤집어 놓았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카츠라가 이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 소리에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산새들이 깜짝 놀란 듯이 짹짹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덕 날갯짓을 벌였다.

"알겠네. 장난은 그만하지."

이 머리를 보게. 마치 자네가 심술을 부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진정시킨 카츠라는 편지를 그의 비석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빳빳한 봉투에 가지런하게 적힌 글자가, 정말이지 글씨체도 즈라라며 놀려대는 소리가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이 편지를 선생님께 전해주게나."

분명 문 앞에서 쉽사리 들어가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것이 훤히 보이니까 말이네. 묘비 위의 낙엽을 치우던 카츠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서로 안부 인사만 나누는 일이 없도록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니 고맙게 여기도록 하세나. 탈탈. 낙엽을 다 치우고 옷자락에 붙은 먼지를 털어낸 카츠라는 몇 발자국을 물러서더니 두 묘비를 함께 눈에 담았다. 어릴 적, 두 사람을 처음 봤던 신사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기억에 카츠라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제 눈앞에는 그리운 이들이 한대 모여있었다. 이제 정말로 저만 남은 것이다. 카츠라가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결연한 눈빛이 돋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럼, 부디 평안히 지내기를.

다사로운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제 손에 쥐어진 것을 물끄럼하게 쳐다보았다. 빳빳한 봉투에 담긴 편지. 이승에서 카츠라가 그에게 보낸 편지였다. 받은 이는 그가 아니었지만, 그는 배송 수단이었으므로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어라. 이승이라고 하니까 나 정말 죽은 걸까. 진심으로 죽은 걸까나.

"그럼 그 썩어빠진 동태 눈깔을 하고서 살아있다고 말할 참이었나?"

"아. 죽은 게 맞나 보다. 어디서 치비스기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까 말이야."

치비스기라니.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최종 보스가 꽤나 귀여운 말을 하고 있잖아. 그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자색을 바탕으로 금빛의 화려한 나비 무늬가 인상적인 여성복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이어서 재수 없는 외눈 요구르트 요괴의 얼굴이 보였다. 요구르트 요괴가 아니라 타카스기다. 엑, 이제는 생각도 읽는 거야? 징그럽게. 네놈의 멍청한 얼굴에 다 쓰여있다만. 우와, 여전히 재미없는 녀석.

"긴토키."

타카스기가 그를, 사카타 긴토키를 불렀다. 눈 한번 깜빡이는 일 없이 시선을 맞춰오는 타카스기에 먼저 눈을 피하게 된 것은 사카타였다. 너 진짜 싫다.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머리를 벅벅 긁던 사카타가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집착 많은 남자는 인기 없다고. 집착은 무슨.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타카스기는 제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린 사카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나 마나 선생님에 대한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게 훤하게 보였다. 삽질도 이런 삽질이 정말 있을 줄이야. 타카스기는 그제야 두통약을 먹던 제 부하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즈라가 준 기회를 버릴 셈이냐."

사카타가 편지를 쥐고 있던 손에 약간이지만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당연한 소리였다. 이제는 사는 세상마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의 친우가 저를 위해 마지막으로 힘을 써주었는데. 그것을 져버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아니, 불가능했다.

사카타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행위였다. 잠시 후, 결심이 섰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편지를 구겨지지 않게끔 빳빳하게 펴놓은 사카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타카스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땅속에 깊게 박고구마가뿌리가 뽑히나 보다.

갈까.

그래. 가자.

타카스기가 앞장서고 사카타가 그 뒤를 따랐다. 저기 멀리에 대문이 보인다. 어릴 적에 보았던 그 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바로 옆에는 문패도 제대로 걸려있었다. 다음으로 대문 너머의 서당이 보였다. 아무것도 불타지 않은, 온전한 모습의 서당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선생님이 보였다. 어릴 적, 멀리 밖에 나갔다 왔을 때는 언제나 당고를 준비해 주셨다. 그것 또한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먹음직스러운 당고 접시와 함께 마루에 앉아 계셨다.

선생님이, 요시다 쇼요가. 바로 저기에 보인다. 사카타가 씨익 웃어보였다.

안녕, 쇼요.

20.10.12 작성 24.11.06 퇴고없이 백업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