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퇴직교사 사카모토×3-Z 졸업 후 마을 한구석에 카페를 오픈한 구미긴파치
소나기가 방문하려는 것인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위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여있었다. 사실 창문이라고 할 것도 없는 통유리지만. 어찌 되었든 창문이긴 하니까. 사카타는 카운터 앞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빨대를 꽂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어느새 다 녹아버린 얼음에 밍밍한 커피 맛만 혀끝을 맴돌았다. 천천히 카페 안을 둘러본 사카타는 평소 같으면 잔잔한 클래식이라도 틀어놓았을 테지만 손님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보이질 않으니 굳이 음악을 틀기 위해 잠깐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졌다. 오늘은 문을 일찍 닫을까. 사카타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하나둘 떨어지던 빗빙울이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무슨 커다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매섭게 쏟아지는 빗물에 사카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빗소리를 감상했다. 사방은 고요했으며 오로지 깨끗한 빗소리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가끔 이런 날도 한 번 있어 줘야지.
딸랑.
그 순간,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빗소리를 가로질러 가게 안에서 수줍게 울려 퍼졌다. 올 사람은 없을 텐데. 의아한 표정을 지어낸 사카타가 엎드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종소리가 울린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킨파치! 오랜만이구먼!"
"뭐야, 타츠마냐."
그럼 그렇지, 내 감이 틀릴 리가 없잖아. 사카타는 바람 빠진 목소리를 내며 다시 고개를 팔 안쪽으로 파묻었다. 우산을 접어 문 옆에 세워놓던 사카모토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킨파치, 많이 피곤한 건감? 그래그래, 이제 문 닫을 거니까 좀 나가줄래. 너무한 거 아닌감! 이래 보여도 급하게 내려온 것이구먼! 사카타는 조용하게 있기에는 글렀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사카모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바보같이 큰 웃음소리는 그가 카페에 들어온 지 5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조용한 거 같은데.
"…뭐 하는 거야?"
이상함을 느낀 사카타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사카모토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은 얹으며 가볍게 눌러주었다. 아하하, 그래. 뭐 하는 건지 맞춰보게나. 어울리지 않게 작은 웃음소리를 낸 사카모토는 그래도 사카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머리숱은 시간이 지나도 빠지기는커녕 도리어 풍성해지는 모습이 마치 솜사탕 기계에서 점점 불어나는 솜사탕을 보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평소 같으면 같은 파마 주제에 천연 파마라고 놀리냐며 금세 쳐냈을 손을 사카타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노곤한 모양인지 엎드린 양팔 사이로 슬쩍 보이는 반쯤 감겨있는 눈이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킨파치."
"……. 왜…."
킨파치. 그가 다시 한번 사카타를 불렀을 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카타 역시 세상에서 무겁기로 소문난 눈꺼풀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인 듯했다. 얼마 가지 않아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카페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사카모토는 코트를 벗어 한쪽 의자에 걸쳐 놓고는 안쪽에 껴입었던 겉옷을 벗어 사카타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꽤 오랜 시간 입고 있던 터라 안쪽은 제법 따뜻했다.
카운터에 엎드려 조용히 잠을 자기 시작한 사카타를 뒤로하고 사카모토는 카페의 바깥에서도 볼 수 있도록 걸어놓은 Open 팻말을 뒤집어 Close가 보이게끔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나서는 카페를 한번 쭉 둘러보았는데, 카운터 옆, 벽의 한쪽, 선반 위 등등 곳곳에 보이는 사진과 편지봉투, 낡은 교과서와 필기구 같은 것들이 있었다. 모두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다.
사카모토는 그중 색이 바래진 낡은 사진을 하나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뱅글 안경을 쓰고 말끝마다 특이한 말투를 고수했던 유학생. 정상인 같아 보였던 아이돌 오타쿠 안경. 스토커한테 웃는 얼굴로 무지막지한 힘을 발휘한 여학생. 유급을 한 스토커 고릴라. 같이 유급을 한 마요네즈 진탕의 V자 앞머리. 장난기 넘치던 도 S 안대. 멀리 여행을 가버린 옛 친우를 닮았다던 긴 머리의 남학생.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함께 웃고 있는 사탕으로 담배를 피우던 안경 선생과 그 뒤에 서 있는 감시자를 자처한 중 2병 물뱀.
사카모토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진 속의 사카타는 언제 보아도 즐거워 보였다. 가끔씩 사카타는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며. 그때마다 정말인 물어보면 그는 항상 장난이라며 가볍게 웃어넘기고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카타의 표정에는 아주 미묘하게 일그러졌으니. 마치 울 것만 같이.
사진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은 사카모토는 곧 카페의 모든 조명을 꺼버렸다. 사카타의 앞에 놓여있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들인 사카모토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사카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동안 곤히 잠든 사카타를 바라쳐보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려 이마 위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게나, 긴토키 어느새 밖의 소나기는 그쳤버렸다. 카운터를 사이에 놓고, 은은한 조명 하나만이 그들을 밝히고 있었다.
사카타는 얼핏,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옛날의, 제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어느 사내에 대하여.
긴토키.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20.09.11 작성 24.11.06 퇴고없이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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