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패] backstage

스파이패밀리 / on stage의 무대 뒤쪽

to be continued... by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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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2024/07/06

수정: 2024/08/14

백스테이지

편의주의 전개의 무대 뒤쪽 조각모음

#1

언제나 무대 앞보다 무대 뒤가 분주한 법이다. 스파이업 역시 그러하다. 예를 들자면 오퍼레이션 올빼미의 클라이맥스에 관련된 몇가지 일들과도 같은.

그 첫 효시는 참으로 엉뚱하고도 이상한 방향에서 쏘아 올려졌다.

“—대학에서 인턴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대학명이 익숙한데라고 황혼은 잠시 생각했다. 익숙했지만 이 2년 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것 역시 확실한 이름이기도 했다. 그것은 ‘로이드 포저’의 위장이력에 사용된 출신교의 이름이었으므로.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거기 보통은 베를린트 종합병원에서는 채용하진 않는 클래스의 학교 아닌가? 그래서 위장용의 백그라운드로 골랐던 거고.”

“예, 원래라면 서류 단계에서 커트되었을 거긴 한데.”

거기까지 말하고 밤의 장막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웃음과 난처함 사이 어딘가에 걸친 표정을 지었다. 평소 표정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로서는 드문 반응이었다.

“포저 선생님의 출신교이기도 하니까, 한번 써보는게 어떻겠느냐고. 통과되었다고.”

“…….”

로이드 포저로서 병원에 지나치게 잘 적응한게 아는 이가 없을 것까지 고려해 만든 허위이력 모교 동문의 신규 채용의 사유가 되었다니. 자업자득이라기엔 참으로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그렇게, 날조한 서류의 한 구석에만 존재하는 다닌 적도 없는 학교에서 알지도 못하는 후배가 생길 상황이 되었다.

‘로이드 포저’로서 몇 없을 위기였다.

황혼도 일단 전후에 대학에 다닌 적은 있다. 당연히 웨스탈리스였고, 이미 스파이가 된 다음의 이야기다. 아마 본명으로 되어있는 유일한 서류 상의 이력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서류 안 학력란에 기록되어있을 대학명 한 줄. 그것조차도 아마 그 서류가 정보국 밖으로 나올 때엔 어차피 기밀처리 되어있겠지만.

스파이 업무와는 상관 없는 전공이었다. 좋은 성적은 필요없으니 그 나이대 평범한 녀석들을 관찰하고 행동을 익히라고 명령받았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눈에 띄지않게 학교를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변장해 타과의 수업을 듣거나, 혹은 상부의 필요가 있을 때 대학생의 위장신분으로 국내 현장에 파견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아마 3사람 분 정도의 대학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 어떤 작전과도 상관없이 깨끗하고 평범하게 졸업한 본명으로서의 신분, 당시 진행 중이던 장기작전을 위해 일년 정도 쌓았던 특정인을 위장한 신분, 적당히 사회운동에 관심을 두는 학생인 척하며 이런저런 무리와 어울리지만 실제로 대학에 소속되어있지는 않은 종종 바뀌던 임시용의 허술한 위장 신분.

어느 것도 의대생은 아니다.

실전적인 이유에서 외상 처치나 응급의료에 국한해 최소한의 의학적인 기술은 가지고 있고, 정신과 의사로서는 파견 전에 어디까지나 임시위장용 정도의 단기 수련을 받았지만… 솔직히 오스타니아의 의대에 대해서는 3일 정도 관찰하고 관련 자료를 머리속에 때려박은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커리큘럼도 시스템도, 그저 자료로서만 외웠을 뿐이다.

황혼에게 있어서는 위조된 서류 너머에서만 존재했어야 할 세계에서 온 청년은 밝은 색 머리에 녹색 눈이었다.

오스타니아의 서부는 웨스탈리스와 닿아있어, 그곳 출신자들은 사실 외견 상으로는 웨스탈리스인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억양 등도 그러했다. 몇몇 웨스탈리스 스파이들은 그래서 종종 서부 출신을 가장하곤 했다. 지금 로이드 포저가 그리했듯이.

꼭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긴 했으나.

전화에 많은 것이 망실된 땅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위조해 끼워넣거나 존재해야할 것의 부재를 변명하기에도 편리한 곳이었으므로. 신원, 신분, 가족, 친지, 고향. 그외 많은 것들을.

아직 스파이도 되기 전인 십대의 어느 무렵, 국경너머에서 그는 이미 한번 그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마르고 어리고, 그리고 시선에서 어딘지 모르게 독기라 불러야할만한 절박함이 엿보이는 청년은 어딘가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말이 많은 친구라서 살았군.’

청년은 이쪽에서 애매하게 화제를 던지면 꽤나 구체적으로 되돌려주었다. 적당히 맞장구만 치고 있음에도 그는 대화가 잘 통하고 있다고 느끼는 듯 했다. 성공지향적이고 자신만만한 타입이 흔히 하는 실수다.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몰입되어있고, 그걸로 상대와 회화가 성립된다고 여기는 착각.

하긴 그런 친구니 안될 거라 여기면서도 베를린트까지 도전해 온 거지.

스파이인 황혼은 저런 젊은이들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정보를 노출하면서도 자각이 없어 파이프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정보 소스, 혹은 스피커가 된다.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친구’로 삼기엔 경솔한 부류긴 하지만.

로이드 포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문득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당히 맞장구 쳐가며 흐르듯 의미없던 잡담은 어느새 제법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정신과를 선택하신 건 역시 저희는 수술이 약해서?”

글쎄. 확실히 정신과 의사의 위장을 택한 건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과라서다. 그가 말한 것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애초 그 학교는 가본 적도 없다. 거기까지 신경써 백그라운드를 끼워맞추지도 않았다.

가짜의사가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받아서야 큰일 아니겠는가. 물론 정신과라고 해도 돌팔이의 오진이 위험할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어차피 로이드 포저 앞의 장기 환자는 거의 본업 쪽의 관계자들이고 업무적 이유로 섞여있는 ‘진짜’ 환자는 가벼운 상담 정도로 가능한 수준에서 거르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언젠가의 잡담에서 듣기로는 ‘후배’는 베를린트 종합병원에서 이루어진 심장수술에 감명받아, 이곳의 흉부외과를 목표로 했다 한다. 외과 쪽에선 거의 최신 기술의 최전선 같은 분야다. 황혼이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심장이식수술이 최근의 핫이슈고 그 성과에 은근히 국제 경쟁 같은 분위기가 있다는 것 정도 뿐이었지만. 실수로라도 스파이가 배속되어서는 안될 영역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보다는… 그렇잖아. 다들 전쟁을 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로이드 포저’는 감상적이고 씁쓸하고, 겪어온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던 것처럼. 마치 그가, 정말로, 그 도시의 풍경 안을 살아봤던 것처럼.

자신은 그 도시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문득 깨닫는다. 그들의 모교가 있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떠올린 ‘그 도시’는 어디였는지를. 모든 전쟁이 끝난 후, 본명과 신원조차 지워버리게 되었던 그때 단 한번 들렀던 자신의 고향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정확히 같은 거리만큼 반대편에 있을 도시를.

전화는 양쪽에 공평해, 부서진 도시와 잃은 것과 거기서 딛고 일어난 어느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내용은 국경의 이편과 저편이 다르지 않았다. 무척 불공평하게도. 혹은 공평하게도.

부자연스럽게 멈춘 ‘로이드’의 말을 청년은 깨닫지 못했다.

그 전쟁이 시작될 무렵엔 태어났을지 어떨지도 애매한 적국의 청년을 바라보며 황혼은 쓰게 웃었다.

틀림없이 그의 고향을 덮쳐 잿더미로 만든 탱크와 군홧발 안에는 청년의 다정한 이웃과 일가친척일 이들도 속해있었을 것이다. 청년이 떠나온 도시를 부순 폭탄 중의 최후의 몇 발 정도에는 그 때 이미 스파이가 되어있던 그의 몫도 있었을 것이다.

고작 십년. 전화의 시기는 그토록 오래되고, 그토록 가까웠다.

#2

“이혼을 권하죠.”

그 말을 했을 때 관리관은 황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게, 도노반 데스몬드의 가치관이라도 바꿔줄 거라고 여기는 건가? 잃고나서 깨닫는 가정의 소중함 어쩌고 뭐 그런거야?”

결혼한지 2년 째이지만 얼마 전에야 갓 신혼 비슷한 상태가 된 오랜 부하가, 드디어 업무감각까지 꽃밭에 침식되었는가 하고 상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왜 정보국 씩이나 들어와서 멍청한 부하놈의 연애상담을 해주고 있어야 하는거지 하고 관리관이 오랜만에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던 당사자를.

다행히 관리관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는 여전히 업무에 있어서는 유능했고 판단력도 아직까진 멀쩡했다.

“아뇨 그런 불확실한 것에 걸진 않습니다.”

상사의 불순한 의심을 깨닫지 못한 채로, 황혼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데스몬드의 정치적 배후는 본인이 아니라 처가 쪽에 있습니다. 데스몬드가는 원래 유력 기업가였으니까요. 지금도 도노반 데스몬드의 기반 중 절반 이상은 데스몬드 그룹에 바탕을 둔 금력이고요.

반대로 말하자면, 기업가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그의 정치가로서의 인맥과 네트워크는 어쨌든 여전히 처가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젊었던 그가 전시 수상의 자리를 낚아챌 수 있던 것은 거의 처가의 공적이었죠.”

“하지만 거의 이십년에 가까운 단단한 동맹이기도 하지.”

“쇼윈도 부부에요 그 둘.”

얼마 전까지 위장부부였던 남자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걸 의기양양하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인가. 아니 본인에게 위장부부 경력이 있어 근거와 신뢰를 가지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건가. 뭐, 부하의 멍청한 결혼생활의 촌극에 대해 더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다. 관리관은 잡생각으로 잠시 흘렀던 사고를 그런적도 없던 듯이 되돌려, 본론을 이었다.

“어떻게 접근할거지?”

“일단 로이드 포저로서 주치의 자리를 노려보겠습니다. 마침 요르 씨가 멜린다 데스몬드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고 하더군요.”

“……그 권유를 듣는다고?”

“저도 의외였는데, 일단… 병원측으로 타진은 온 것 같더군요.”

요르씨, 묘하게 사람의 신뢰를 잘 사는 사람이네요.

그 여자를 상대로 제일 먼저 경계를 놓아버린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거야 하고 관리관은 이번에야말로 어이없는 기분으로 황혼을 바라보았다.

움직인 것은 국가보안국이었다.

“좀 의외네요.”

관리관과, 고참과 황혼. WISE측에서는 감시가 해제될 때까지 밤의 장막을 통해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황혼과의 오랜만의 직접 접선이었다.

멜린다 데스몬드 쪽에서 보안국을 동원해 로이드 포저의 신원조사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보안국의 검증을 통과해 주치의가 되었으며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들어온건 다시 거기서부터 한달남짓한 무렵이었다.

보안국의 감시에서 이제야 벗어난 포저 선생은 오랜만에 황혼으로 돌아가 자신이 ‘겪은’ 것을 전하며 예상과 달랐던 부분들을 짚었다.

“멜린다 데스몬드 쪽을 ‘온건파’로 가정하고 있었잖습니까. 그런데 ‘친정’이 사람을 쓸 필요가 생기니까 보안국을 움직였어요.”

“조직이 크니까 그 중 일부 선이 닿는 쪽을 쓴건 아닌가?”

관리관이 회의적인 태도로 말했다. 오스타니아의 삼엄한 감시체계 때문에 그것을 통과할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극단적으로 요원을 선별할 수 밖에 없는 탓에 소수정예 겸 과중노동일 수 밖에 없는 웨스탈리스 정보국과 달리, 그 역량의 대부분을 자국민 감시라는 물량적으로는 엄청나지만 그다지 정예일 필요는 없는 단순노동 업무에 쏟고있는 오스타니아 국가보안국은 비대한 공룡같은 조직이었다. 너무 거대해 머리 하나 만으로는 전체를 움직이기엔 부족해 보조뇌가 있는 것도 공룡을 닮았다.

보안국의 보조뇌들은, 좀 제멋대로 움직이는 편이긴 하지만.

웨스탈리스 정보국과의 분쟁보다 내부 권력다툼에 의한 숙청과 보복이 더 격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정보국이 그 문제에 대해 정말 아무 손도 안썼노라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냐면 그건 또 아니긴 한데.

“1과가 움직였습니다. 거긴 국장 입김이 직접 닿는 곳이라 라인 안타요.”

수염난 중년 사내가 어깨를 으쓱 하고 대답했다. 오스타니아 내부의 권력역학에 대해서는 그가 가장 전문가다. 참고로 그 권력학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오는데 이 전문가에게 얼마만큼의 지분이 있는지는 노코멘트다.

“뭐 국내방첩업무로선, 정석이군요.”

“실제론 방첩 목적이 아닌 걸 당사자들도 알고 있었다는게 재밌는 부분이지.”

“어차피 보안국이 사적으로 이용되는 건 흔한 일이잖습니까. 멜린다의 ‘라인’이 1과나 국장 본인이란 선 아닐까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보안국은 나서지 않을거라고 희망적으로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정도면 좋은 결과 아닙니까.”

“글쎄. 국장은 꽤 만만찮은 인간이거든.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치는 아무 생각없이 은혜를 팔진 않을거야. ……뒷일이 기대되네. 여러가지로.”

황혼은 선배의 그 농담같은 성의없는 태도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도 저놈도 뒤틀려있어서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관리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옆에서 말 몇마디 한다고 이제 와 이혼 같은 것을 하겠으며, 애초 그렇게 이혼 좀 했다고 해서 정치적 지각변동씩이나 일어나겠는가. 기껏해야 국가통일당 안에서 데스몬드의 기반을 좀 흔드는 정도겠지.

뭐, 그래도 골치 좀 아프게 해준다면 아무리 저 도노반 데스몬드라도 몇달 정도는 정신적으로 여력이 없어질 거고, 그정도 실금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생각해 작전을 승인하긴 했지만.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켜 학부모 모임으로 접근해보겠다는 느긋하기 짝이 없는 작전에라도 매달리고 있는 입장이다. 그보다 가까운 접근 방법이라면 투자 못할 것도 없다. 투자랄까, 도박의 마음이란 기분도 들지만.

“일단 진행하고, 경과는 계속 보고하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네 작전에선 올빼미 쪽이 우선이야. 그쪽에 영향을 줄 상황이라면 무리는 하지말고.”

“알겠습니다.”

“보안국 쪽은, 계속 동향 체크 부탁하지. 인적구성에 움직임이 있다면 밤이든 낮이든 언제라도 바로 보고해.”

“네. 셔우드 관리관.”

둘에게 차례차례 이후 업무 지시를 하면서도, 결과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으며 실비아 셔우드는 그 자리를 떠났다.

헌데 다시 반달 후, 마침내 멜린다에게서 이혼의 이야기를 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여기서부터 협력자로서 대응하겠다는 보고가 진짜로 올라왔을 때……. 관리관은 그 직위와 입장에 조금 부적절하게도, 저딴 작전이 정말로 통한다니 세상은 의외로 대충대충 돌아가는 곳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앞으로 세상이 부조리 코메디 같은 곳이란 생각을 하게되는 일을 몇번 더 남았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만이 그저 지금으로선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경호 요원은 붙였으니 거기까진 신경쓰지 않아도 돼.

항상 시큰둥한 얼굴의, 저온을 유지하는 상사가 참으로 드물게도 당장이라도 폭소하고 싶은 걸 참고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서 누구를 어디에 붙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굳이 생략했을 때 수상쩍은 걸 알았어야 했다.

“저, 부장님이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을 때엔 남편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그러는데요.”

이상할 정도로 태평한 요르의 목소리가 조명이 모두 나간 고요한 데스몬드 가 별저의 응접실에 울려퍼졌다. 신음 소리조차 내지않고 시체가 두 구, 발 밑에 굴렀다. 그렇다, 두 구였다. 그가 쏜 총은 단 한 발이었음에도.

“로이드 씨, 죽여도 될까요?”

저를요? 라고 반사적으로 속으로 반문했던 건 그의 잘못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게 습격자에 대한 이야기란 걸 곧 깨닫기는 했지만.

아무튼 아군 전력이다. 그거면 됐다. 전후사정 따위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작전 책임자가 당황해서야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한때의 위장 결혼 생활의 협력자가 전투의 협력자가 되었을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모두 알고있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로이드 포저’는 출장진료의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습격을 받은 정신과 의사답지 않은 태도로 담담히 대답했다.

“네, 편하신 쪽으로 해주세요.”

“그럼 한 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뒤를 부탁드려요. 저 경호보단 역시 암살이 편해서.”

발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 요르 포저가 사라지자 멜린다 데스몬드는 빤히, 정말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날의 우울증과 불면증의 상담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을 서국의 스파이라고 밝혔던, 그 전까지는 둘째 아들과 같은 반 아이의 학부모로만 알고있던 어느 정신과 의사를.

지금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의 남편을.

평범치 않은 운동신경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사람을 꿰뚫어보는데 재주가 있는 그녀에게 뒤가 있는 인물이라고는 단 한번도 경계시킨 적이 없는 이였는데.

포저 선생이 출장 상담에 멜린다 데스몬드와 아는 사이이기도 한 아내를 동반해 방문 한 것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방문을 가장하기 위한 대외적인 위장인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황혼 역시도 어디까지나 그저 위장일 생각이었다는 것은 이제와선 말할 수도 없게된 진실이다.

“……딸은 스파이는 아닌 거지?”

“8살짜리가 스파이겠습니까.”

솔직히, 대답하면서도 이제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자신의 아내가 암살자라고는 생각한 적도 들은 적도 없던 것은 멜린다나 그나 마찬가지 입장이었던 터라.

이 이상 무슨 깜짝쇼가 벌어져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서로의 관계와 사랑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남자에게 요르는 말했다.

“저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 말을 했을 때 두 사람은 서로가 말한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가 어느 정도 범위를 포함하는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들이 감춘 비밀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렇지 않은가, 스파이와 암살자가 생각하기에, 평범한 사람이 아무리 나빠봤자 자기만 할 것 같지는 않았고. 동시에 자기만한 비밀을 가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을 거라고는 그다지 상상할 수 있는 일도 아닌지라.

그리고.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존재라서.

대충 그렇게 말해 놓고도 어쩌면 상대가 그 말할 수 없음조차도 이해해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믿어 버렸던 것이다. 혹은 사실을 말하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기에 이해받음은 포기한 채로 이게 최선이었다고 자신의 기만을 정당화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 밤 귀가한 두 샤람은 무척 해야할 말이 많았다.

“음, 그러니까.”

남자가 일단 난처하게 중얼거렸다.

“상사한테서 그, 경호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 밖에는, 저는 들은 것이 없어서.”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란 둘러말한 고백이었다.

“남편이 알아할 거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더 아는게 없답니다라고, 부인에게서 역시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상사들 간에는 서로의 정체를 알고 협의도 되어있으며 둘의 관계도 기성사실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부분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것인가. 그걸 다 알며 굳이 자신들에게는 말해주지 않은 그 처사를 지적해야할 것인가.

결혼생활은 2년, 연애는 반 년. 이 단계에서 자기소개부터 해야하는 것인가.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로이드는 요르의 눈치를 봤다.

“음, 그러니까. 웨스탈리스의 스파이를… 하고 있습니다.”

어딘가 얼빠진 것이, 좀 맞선에서의 자기소개 멘트 같다고 생각했다.

#3

그들이 역 근처의 작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무렵이었다. 아직까지는 굳이 동선을 속일 필요도 노골적인 추척도 없었기에 숙박은 로이드 포저의 이름으로 했다. 남이 들으라는 듯이 그는 이야기했다.

“여기서 대학을 다녔어요. 은사님은 아직 계실 것 같으니 저는 인사라도 다녀와야겠네요. 아침부터 먼길오느라 힘드셨을테니 쉬고 계세요.”

“대학이요?”

그가 사실은 서국의 스파이임을 이미 알고있는 요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 포저는 전부 거짓말인게 아니었던걸까요.

타이밍 좋게 아냐가 물었다.

“안경네 학교?”

“하하. 응, 인턴 선생님하고 같은 학교.”

거기에 겨우 위장의 약력에 사고가 미친 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요르씨는 아냐하고 본드와 기다려주세요.”

스치며 작게 속삭였다. “습격이나 미행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이 틀어진다면 일전에 말씀드렸던 장소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저와 약속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테니 추후 지시는 그쪽에 따라주세요.” 요르는 서늘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이름을 들었을 때 한번 정도는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굳이 육로의 탈출 루트를 선택해 경유지로 이 도시를 집어넣은 것은 그런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로이드 포저도 황혼도 두번 다시 오스타니아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 확실해진 지금, 사실 로이드의 위장을 강화하는 일에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아마도 가짜 후배와 너무 많은 이야길 나눈 탓에 이곳을 알고있다고, 가짜 노스텔지어라도 생긴 걸지도 모르지. 평소라면 흔적을 감추는 방향으로 움직였겠지만 로이드는 그 반대로 행동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 가게에서 단골인 척 인사를 건네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 것 같은 행동을.

조금도 쫓기는 사람 같지 않은 태도로.

사실은 아는 사이도 아닌 교수와의 의미없는 만남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왔다. 미행이 있었더라도 모두 지쳐 떨어져나갈만큼의 시간이었다. 호텔로 향하던 걸음을 슬쩍 틀어, 길을 잘못 든 듯이. 사전에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남자가 서있었다.

사실 요르 씨가 이혼 대신 동행을 선택해준 것은 예상치 못했다.

……유리 브라이어가 이 망명을 돕겠다고 나선 것도.

며칠 전 베를린트에서 헤어졌던 유리를 낯선 도시에서 다시 마주했다. 이미 사전에 협의가 되어있던 내용이었음에도 솔직히 마지막의 마지막에 함정이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내심 진땀을 흘렸었다.

하지만 유리는 담담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인사조차도 입에 담지않고, 조용히 그가 건넨 지도와 몇 장의 서류를 로이드는 받아 그 자리에서 훑어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정밀했다. WISE도 지도 정도라면 확보할 수 있었겠지만, 경비에 대한 정보는 보안국이 아니라면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보안국이라도 원래라면 방첩부서의 일개 소위인 유리가 손댈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적극적인 협조였다. 예상하지도 못했을 수준으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로이드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나를 데려간다고 화낼 줄 알았어.”

“나도 눈하고 귀 정도는 있어. 당신 어차피 이제 이 나라에서 발뻗고 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잖아.”

반년 전 쯤에 보안국에서 로이드 포저를 조사한 기록이 있으니, 아마도 이 난리통에 자신이 엮여있음을 그도 알게된 것이리라. 하지만 그건 로이드 포저의 망명 사유일 수는 있어도 유리가 기꺼이 요르가 동행하는 것을 용인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누나가 행복하다면 어디든, 누구 옆이든 별로 상관은 없어.”

유리 브라이어는 품에서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들이쉬는 모습이 매끄러웠다. 로이드 포저는 그것을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만났을 무렵은 아직 흡연자는 아니었을텐데, 세월이, 변화가.

담배연기를 얼굴에 대고 뱉어낸 후 그가 말했다.

“봐줄 때 꺼져. 스파이.”

그 말에, 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는 걸 보며 유리는 혀를 찼다. 이 상황까지 와서 아직 위장을 고집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자신을 멍청이로 여긴 건지.

“오스타니아의 조직들은 눈이 전부 옹이구멍인 줄 알아? 멜린다 데스몬드의 돌연힌 변화 뒤에 당신네들이 있는 것 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어.”

그렇다. 베를린트 종합병원의 정신과 의사이자 주치의인 로이드 포저가 멜린다 데스몬드의 이혼에 엮여있을 것이란 일부 세간의 의혹은 ‘맞다’.

다만 방식이 정신과 의사의 그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로이드 포저, 아니 황혼은 멜린다 데스몬드의 ‘이혼 상담’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당파 차원에서의 보복의 가능성을 줄이고, 일이 임박할 때까지 도노반 데스몬드와 그쪽 진영의 움직임을 교란하고, 도노반 데스몬드를 상대로도 도망치지 않고 이혼 소송을 담당할 법무진을 구하고 당사자와 아이들을 경호하며, ‘친정’ 측에서 도노반 데스몬드란 패를 손절했을 때 대체할 수 있을 ‘말’을 제시하고.

그 모든 사전 작업의 후에 이루어진 ‘이혼’이었다.

그 모든 수면 아래의 기간 동안 외부와 멜린다 데스몬드의 사이를 오가며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외부인이 ‘포저’인 것도, 그 뒤에서 암약하고 있던 것이 서쪽의 커넥션인 것도 아는 자가 보면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전 내내 로이드 포저가 거의 표면에 드러나있었던 만큼, 정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노출된 것이란 부분은 각오했다. 실제 일에 착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의 의도를 눈치챈 각종 반 국가통일당 진영—가든이라거나—과 뒤에서 꽤 긴 협상과 타협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국가보안국조차도 이를 인지하고 있을 줄은.

그들은 알면서 서쪽의 스파이를 방치했나. 아니 방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도 틀림없이 게임 플레이어였다.

그렇군. 유리 브라이어는 딱히 독단으로 여기 나와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굳이 나온 건… 아마 본인의 희망이었겠지만.

“구시대의 망령들한테 미래를 줄 것 같냐.”

씹어뱉듯한 말투였다. 그 바닥에는 젊은이 특유의 결벽성과, 거기서 싹터나온 경멸과 혐오가 있다.

“오스타니아는 전쟁광 노친네들의 사유물이 아니야. …네놈들의 게임판도 아니고.”

그저 막연한 혈기만으로 그 길을 선택했을 남자는, 몇년 사이 참으로 훌륭한 보안국원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감정조차 억누르며 타국의 스파이조차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자가.

거참, 보안국도. 우습게만 봐왔는데 제법 사람을 키울 줄 아는 모양이다.

“유리 군, 담배 피우는 줄은 몰랐는데.”

지극히 ‘매형’ 같은 목소리로 로이드는 중얼거렸다. 정체가 다 들통난 지금조차도 조금도 위장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그 가증스러움에 유리는 피식 웃었다. 정말 어떤 인간을 가족으로 두고 있는 건지. 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와 함께하기로 한 걸까. 한달쯤 전, 자신을 불러내 앞으로 같이 있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유리의 행복을 바랄 거라 말하던 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자는 누나가 그토록 일찍 결심했다는 걸 알았을까.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담배 정도는 피워. 나이가 몇인데.”

“그렇군.”

로이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 대 줘.”

“댁이야말로 피웠어?”

“애가 생기고 끊었지만, 오늘 정도는 괜찮겠지.”

내민 담배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물고는, 담배도 없었으면서 어디선가 성냥을 꺼내 익숙하게 불을 붙이고 연기를 뱉는 그를 보며 유리는 그 모습이 지나치게 익숙하고 손에 익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희미한 성냥불에 잠시 비춰진 얼굴은 무척 모르는 남자 같았다. 그 담배 연기와 피로에 절어있는 모습은 그가 아는 매형이라기보단 어쩌면 그의 상사나 선배들을 더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가, 이게 ‘그’일까. 서국의 스파이. 정신과 의사도 뭣도 아니고, 본명도 나이도 모르고, 아이의 아버지란 것조차 과연 사실인지 미묘한.

그러나, 앞으로도 누나의 남편일 남자.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과 연기 만이 맴돌았다. 마침내 담배도 다 타버렸을 때 로이드는 천천히 그것을 비벼끈 후 남은 필터를 그대로 양복 주머니에 넣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요르 씨가 물어보면 내가 피워서 냄새가 옮았다고 해둬. 마지막까지 착하고 좋은 모범생 동생 하고 싶잖아? 보안국원씨.”

결국 같은 구멍의 오소리 주제에, 배려하는 척 덧붙인 한 마디가 참으로 밉상이었다.

“됐어. 누나하고는 이미 작별인사 했어. 여기서 다시 만나서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별로 이게 이 세상에서의 끝인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 세상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하고있다. 좀더 평화로운 미래와, 더는 총구를 겨누지 않아도 될 시대를 위해. 오스타니아는 오스타니아 대로, 자신들의 계산과 셈법에 따라 이 뒤에 펼쳐질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그건 더는 WISE와 황혼의 일은 아니었다.

웨스탈리스에서 왔던 그들은 그저 던져진 돌멩이였다. 그것이 아무리 깊고 무거웠을지라도 결국 수면 위에 퍼진 한번의 파문에 불과한.

정말이지, 이 청년은 어느새 이토록 어른이 되었을까.

“다시는 돌아오지 마. 당신이 오스타니아에서 잡히면 그쪽이 곤란해.”

“그래도, 결혼할 때 되면 소식 정도는 전해줘.”

“뭐?”

갑작스럽고 영문모를 말에 유리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부쩍 어른이 되어있거든, 그 뒤엔 보통 자기 가정을 꿈꾸게 하는 여자가 있는 법이라고. 자신조차 자각이 없던 연애 중에 동료들에게 비슷하게 놀림받은 적이 있던 현역 유부남인 스파이는, 그렇게 오스타니아 서부의 어느 도시에서 비밀경찰과 작별했다.

#4

보안국에 의해 마련된 탈출 루트는 대로만큼이나 장애물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은퇴 전 마지막 임무인 만큼 마지막까지 ‘경호’에 힘쓰겠노라고 의욕에 차있던 ‘가시공주’는 이상할 정도로 수월한 진행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좋은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금새 마음 편하게 방긋 거렸다. 그녀의 경우, 그건 방심이라기보다는 그 어느 때라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반한 여유겠지만.

“별이 예뻐요.”

그 말에 남자는 한손에 든 나침반과 지도에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조명이 가득한 밤거리에선 보기 힘들만큼 별로 가득한 하늘이었다.

“날이 맑네요. 내일은 좀 덥겠어요.”

국경을 넘으면 차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새 신분증으로 바꾸고 변장해 기차역까지 운전하고, 거기서 기차로 옮겨 타…. 그러나 매끄럽게 계획을 점검하던 생각은 익숙한 혀짧은 소리에 거기서 멈췄다.

“아냐 졸려…….”

“잘 시간이 지나긴 했지. 한두 시간 정도만 더 걸으면 되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본드도.”

당장이라도 꾸벅거릴 듯이 반쯤 감은 눈으로 걷고있는 소녀의 옆에서 멍, 하고 개가 작게 짖었다. 로이드는 피식 웃고는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손이 차더라도, 아냐가 너무 졸려하면 안고가야할까 하고 고민하면서. 이제 곧 9살을 앞둔 딸은 슬슬 안고 산길을 걷기엔 무거울 것 같은데.

보름달이 환히 비추는 산길에서 한 가족이 걸어간다.

남자의 곁에는 아내와 딸과 개.

마치 밤중의 소풍같은 한적한 탈출이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옹이구멍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요르 씨 정체는 몰랐던 걸 보면 옹이구멍이 맞는 거 같은데. 그러나 남매의 평화를 위해, 황혼은 그들 남매 각자에 대해 그가 아는 사실은 앞으로도 일생 자신의 마음 속에만 묻어두기로 했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가 소풍!”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아냐가 외쳤다. 언젠가 이든에서 야외수업을 다녀왔을 때 배운 말이었나. 그들은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집이고,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땅일 그곳을 그래도 그와 함께라면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해 줄까.

문득 시선이 맞자, 요르가 웃었다.

공룡 비유는 좀 오래된 옛날 학설 기준입니다. 20세기적 발상이란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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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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