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크리스털

2회차, 헤인 님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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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품으로 명명되고 박명하는 사나운 날짐승

사지가 매듭 지어진 채 둥글어

과녁판으로 오해된다

편해지고 싶었니 언제나 달아났니 병식을 외면하고

밑동이 다 드러난 거목은 음울한 심판자의 얼굴로 살촉을 내민다

작은 손을 내게로

나를 잡아

혼란을 피 흘리지 마

나를 잡아

고작 한 칸짜리 숲입니다 하나인 나와 하나인 숲 안에서 펼쳐지는 내 것 아닌 목소리의 공방 누군가는 거짓을 고하고 있다 거짓말을 질료로 저 나무는 울퉁불퉁하게 부풀어 오르고 나는 겁을 먹고 숨을 먹고 나를 먹으며 이 숲이 터져 나갈 때까지 가지런히 누운 성대를 긁는다

귀가 큰 토끼는 발 빠르게 숲의 시간을 돌리는군

다시 시작되는 나무와 나무 사이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부정한 시간

존재의 무심함이 겁나 토끼의 간을 파먹었구나

사람들이 내민 손엔 항상 같은 자수가 제 처분을 요구했다

철저하게 이해받고 싶었습니까

호화스러운 욕심은 비웃음을 사고

나는 반동자입니다

때문에

흉금을 야릇하게 드러내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하루치의 영혼을 살라 먹는 이웃들

오늘의 항상성을 노동하고

인간성을 보수로 드립니다

별의 웅성거림으로 태어나 파기되는 인류의 걸작이랬나 간절함이랬나

나의 뿔이 다 자라기 전의 이야기

저주를 퍼붓는 입술이 절절 끓는 심장에 틀어박힌다

밤은 지지 않는 제왕의 권력을 가지고 뜬눈을 매질한다

고작 한 칸짜리 숲 안에서

나의 양들과 반듯한 목제 의자에 앉아 손을 잡고 기나긴 고백의 항해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이것, 수치와 회고를 잃고 삶의 염증을 모작하고 생사의 진술을 촉진하는 입술로 인간을 폄하하니 제물로 바칠 것

초록빛으로 불타는 짐승의 털은 왜일까

나무에서 수북하게 떨어진 이파리를 피뢰침으로 삼았나

이런 천둥벌거숭이

너의 온상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타오르는 밤이 전부였다고

세상이 창조되고 나는 왔고 이 뿔이 자랐습니다

하늘의 굽도리에서 피어난 모두는 별이고요

부조리한 규율의 밀림이 우거진 안에서 서로의 입술을 문질러 막는 잔혹함

네가 나의 온상으로 발아한다

모두가 거룩했던 기도의 시간

목소리가 피어나는 불꽃을 저 나무에 매달아 수배할 수 있다면

나의 정체를 네게 보여 줄 수 있다면

나를 봐 주겠어?

뿌리가 없는 나는

의심하는 병으로 흉포해지고

뿔은 자라고

나는 태아처럼 웅크리고

반세기 전 숲의 역학을 떠올린다

폭염과 폭발

뿔아 떨어져

그만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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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2


  • 수집하는 나비

    정말 좋은 시 같습니다만,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지점이 몇 개 있는 것 같아요. 초반부부터 명명, 박명, 사지, 병식, 거목, 살촉, 혼란, 공방, 질료 등 수많은 한자어가 쏟아지는데 처음에는 독자의 시선을 확 끌어 집중 시키지만 내내 집중해 분석하듯 읽어야 한단 점이 쉽게 피로도를 올리는 듯 해요. 시를 매우 길게 쓰시는 것은 헤인 님만의 큰 장점인데, 오히려 이 시에서는 조금 단점이 되어버리고 만 듯 합니다. ㅜㅜ 앞선 많은 한자어가 집중력을 흐트러뜨려서인지, 뒷 연으로 갈수록 앞의 연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쉽게 까먹어버리고 말아요. 헤인 님의 시는 읽다 보면 정말 자연스럽게 하나의 세계관? 이미지? 분위기? 가 그려지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의, 빛이 잘 들지 않는 숲에서 무리를 형성한 누군가들이 떠올랐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손가락질 당하고, 박제 되고, 방출 되고, 버려지고…… 그래서 화자가 반동자란 점이 이 시의 중요한 지점처럼 느껴졌어요. 창작에서의 굵직한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매주가 기대 되어요. 만약 다음에도 이런 긴 호흡의 시를 쓰실 경우에는 아예 모든 연과 행을 붙여서 줄글로 나열하듯 시도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 HBD 창작자

    이제 고작 2회차일 뿐이지만 헤인 님의 시에서는 어미를 다루는 솜씨가 무척 능숙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번 1회차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미가 통일되지 않는 시를 조금 난해하게 보는 성향이 있는데요, 헤인 님의 시 속에서 발화되는 어미들은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와 매력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스터디라서 좋은 말을 써줘야지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가 특히나 평소에 어미에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니 헤인 님의 시를 더 특별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만드시는 능력도 훌륭합니다. '밑동이 다 드러난 거목은 음울한 심판자의 얼굴로' 라는 표현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이 외에 제가 특정하지 않은 문장들도 좋습니다. 헤인 님의 시는 한 줄 한 줄 읽는 맛이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문장들이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지 조금 난감합니다. 본디 아무리 짧은 글이어도 그것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어떤 상황이나 장면의 그림이 개인에 따라 다 다르게 그려지는 법인데, 저는 이 시를 읽고 어떤 풍경을 그려야 할지 고민되었던 것 같아요. 숲과 뿔, 피와 매캐한 연기 같은 것이 파편적으로 떠오르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어떤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단박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하나의 문장을 직조하시는 능력은 매우 좋으셔서, 그것들을 어떻게 하나의 봉지에 담으실 것인지 고민해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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