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서사
드림주 과거
🅒 러블리 갈삐바라💛
▶ 도깨비의 농간
아들만 바라던 그 시절 조선. 평범한 어느 양갓집에서는 또 한 명의 작은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날 적 울음소리가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기에 사내아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렇다면 이 아이 역시 시가媤家에 뺏긴 후 사라지겠구나. 그간 사라진 자식들을 떠올리며 체념한 어느 어미는 제 뱃속에서 나온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본디 갓 태어난 것은 울 줄만 알지 눈을 뜨지 못하는데, 이 작은 것이 세상 떠나가라 엉엉 울던 것을 뚝 그치더니만 별안간 초점 없는 눈을 둥그렇게 뜨는 게 아닌가. 당최 누구를 닮은 건지 알 수 없는 샛노란 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색에 징그러움을 느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여태 낳은 아이는 죄 제 아비를 닮았었는데 이것은 저 혼자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미의 얼굴을 빼다 박아서.
‘아. 이것을 뺏겨서는 안 되겠다.’
모성母性이 아닌 단순 책임감이었지만 뭐 어떠랴. 그렇게 버려졌어야 할 것은 제 어미의 덕으로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 사라진 자매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며 몇이나 버려졌냐 물으면 리나는 자신 위에 몇이나 되는 이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또 이것이 슬프지 않은지 “다섯 손가락 안에만 내가 들어있으면 좋겠구료.”하며 손이나 쫙 펼쳐 보였다. 다섯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든다나 뭐라나.
▶ 꼬대각시
집에 남았으나 아비는 가정에 관심이 없었고, 어미 역시 최소한의 책임으로 굶기지 않을 뿐. 아이는 철저히 홀로 자라났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다. 기어이 딸을 집안에 둔다며 어미를 지독한 년이라 손가락질하던 시가媤家의 노인네가 하필 또 딸을 낳았냐며 울음을 터트려 ‘오열’이라 불렀으나, 아무리 그래도 사람 이름에 눈물을 넣을 수는 없으니 조금 바꿔서 ‘오연’. 그런 축축한 것을 이름이라 달고 있었다. 뭐. 부르는 이가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아이는 시종들 입에서 벙어리가 아니냐는 말이 은밀히 오르내릴 만큼 입을 딱 다문 채 그 무엇도 보채지 않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조용히, 얌전하게. 또한 죽은 듯이. 그리 조용한 아이가 딱 하나. 남들 눈을 피해서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해 질 무렵에 뒷산의 깊은 곳까지 오르는 일이었다. 그곳에는 집안사람들보다 족히 다섯 척은 더 커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아이를 어여쁘게 여겼다. 그렇게 느껴졌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샛노란 눈을 가진 새카만 것들은 누구도 알려준 적 없는 말과 글을, 그들의 세상을 익히게 해줬다. 그 덕에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겨울날.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
첫 소리. 그제야 아이는 사람 사는 세상 위에 태어났다.
✔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냐고 물으면 리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 대동놀이
과장하자면 낳은 걸 잊을 만큼 조용하던 아이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나오자 어미는 자식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역시나 모성母性은 아니었지만 낳기만 했음에도 저를 엄마라 부르는 생명에게 적어도 최소한은 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굳어진 탓이다. 아이의 손을 붙잡은 어미는 당장 여인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양갓집 마당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인의 흐느낌이 담긴 처량한 소리가 아닌, 화가 난 짐승의 고함과도 같은 소리. 그것에 온 식구들이 달려 나와 손가락질을 하고 나면 머리 위로 귀한 것들이 날아다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미는 자식의 손을 잡아끌어 대문의 문지방을 콱 밟고 먼 길을 나섰다.
“잘 듣거라. 네 이름은 이제부터 리나다.”
성씨도 네 아비의 것을 쓰지 않을 것이다. 김 리나. 내 성을 따라 그리 부를 것이야. 단단한 목소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을 가졌는지 그 당시의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 이상해서 자꾸만 자기 이름을 종알종알 읊어볼 뿐이었다. 지독했던 이 씨 가문을 떠나온 여인과 어린 딸 리나. 둘은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을 한적하고도 한적한 산골짜기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얼마나 깊은 곳으로 떠나간 건지 생사의 소식조차 들리지 않으니, 가끔 그 가문에서는 패악을 부린 벌로 도깨비가 잡아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는 했다.
✔ 아버지와는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이냐고 물으면 리나는 “아버지뿐이랴. 내 친가親家와 완전히 연이 끊겼지.”라고 말하며 실실 웃어 보였다. 끊은 것이 아니라 끊겼다고? 애매한 부분을 짚어 물으면 “나도 그 집 좀 찾아다니다가 알게 된 건데, 우리가 집을 나온 후 몇 해가 지났다고 하더라? 아무튼 뒷산이 와르르 무너져 친가親家를 완전히 덮쳐버렸다 하오. 살아남은 이가 단 하나도 없더라지.” 덤덤히 말하는데 그 얼굴이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제 손으로 ■■해서 천대받았던 어린 날의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 리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모녀를 도깨비가 잡아간 거라며 주위에 그렇게나 흉을 봤다던데 우습지. 역시 잡혀간 건 그들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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