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엘
총 8개의 포스트
외젠의 귀가가 늦다. 인터뷰라고 했던가. 이반은 문을 나서기 전의 외젠을 떠올린다. 적당히 단정한 차림새. 손에는 양장 공책. 가방은… 검은색 가방. 늘 같은 모습이다. 즉 평소와 같다는 거다. “늦군.” 외젠이 나선 건 시곗바늘이 12를 가리켰을 때다. 나서기 전에 문 앞에서 구두 앞코를 바닥에 두어 번 두드린 게 기억난다. 이어지는 말의 정보 값
뺨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차갑다. 코끝까지 얼얼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이곳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실제로도 류천과 미나를 제외하면 사람이라고는 없다. 오로지 두 사람만 존재한다. 어쩌면 삭막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옆에는 제 연인이 함께다. 파도가 발치까지 몰려왔다 물러난다. “안 춥나요?” 발걸음을 맞춰 걸어가던 연인이 묻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 창 너머에 보이는 정원.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어떤 날이 찾아와도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하는 방. 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음악. 정해진 시간이 되면 준비되는 차. 그렇게 시작되는 게르트루트 슈트롤로의 하루. 게르트루트는 생각한다. 쌓아 올리는 건 오래 걸리지만 모든 게 산산조각 나버리고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높은 위치에
지독한 악몽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뜬다. 아직 어둡다. 발작하듯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자 차게 식은 손끝으로 반대 팔을 감싼다. 숨을 몰아쉰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쉰다. 진창 속에서 벗어나고자 알코올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 삶은 익숙하지 않다. 멜리시아의 인생은 그렇다. 부모를 모르고 혈육이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시작점은 보육
난데없이 하늘에서 동거인이 뚝 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K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K는 타인과 함께 살아본 경험은 J가 유일하다. 비록……. 아무튼 그렇다. 물론 제 몸에 끔찍한 게 깃들었다지만 그건 동거인이 아니다. 침입자다. 허락도 없이 남의 몸에 제 몸을 비집어 넣은 무례하고 끔찍한 것. 그러니 K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걸 생각해 본 적
레닌그라드의 겨울이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추니, 유리창 넘어 길가에 쌓인 눈더미가 보인다. 지금까지 머문 곳의 겨울은 어떻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시시한 감상만이 떠오르자 외젠 로베르는 들춘 커튼을 놓고 주전자를 든다. 때마침 물이 끓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으니 적절한 순간이다. 준비해 둔 두 머그잔에 물을 붓고 한 손에 하나씩
프랑스의 땅이다. 요한 크란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익숙한 내음이 코를 간지럽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리니 수선화 꽃잎을 닮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소피아 로드리고. 열차에서 함께 내려, 독일 다하우 수용소를 밟고, 프랑스까지 같이 온 이. 소피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소피아, 도착했어요.” 프랑스의 하늘은 독일의 하늘과도 미국의 하늘과도
귀를 찢을 듯이 웅웅거리는 소음, 깨지고 부서지는 금속들. 피부를 태울 듯이 타오르는 열기, 제 살을 가르고 파고드는 공포. 그리고 누군가의……. 로잘리 옥타비우스는 눈을 떴다. 정돈되지 않은 가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기도가 짓눌리고 막히는 기분이다. 숨을 폐가 감당할 수 없어 저릿하다. 시야가 어두워지다,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