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트루베누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창, 창 너머에 보이는 정원.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어떤 날이 찾아와도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하는 방. 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음악. 정해진 시간이 되면 준비되는 차. 그렇게 시작되는 게르트루트 슈트롤로의 하루. 게르트루트는 생각한다. 쌓아 올리는 건 오래 걸리지만 모든 게 산산조각 나버리고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끌어내려지니 비참하다. 실패한 복수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 게르트루트 슈트롤로는 죽은 자다. 숨을 쉬고 살아있지만 죽은 자다. 게르트루트를 제외한 세계는 그를 죽은 자로 구분한다. 죽은 자로 알고 있다. 게르트루트 슈트롤로는 더는 게르트루트 슈트롤로로 살 수 없다. 더는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 테다. 자긍심을 가진 이름마저 빼앗기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작고 고요한 공간. 숨 쉬는 것은 게르트루트 뿐. 침묵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도 천천히 가라앉는다.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다.
“게르트루트씨.”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손이 뺨에 닿는다. 단단한 목소리가 그를 잡아끈다. 한때 자신의 시종이었던 자고, 이제는 자신을 살려내 이곳에 데려온 자다.
“…….”
“저녁을 준비할게요.”
게르트루트는 베누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다. 자신을 산 자로 구분하고 제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단 한 사람. 죽어가는 숨을 붙여둔 사람. 베누아 샤스탕. 그의 시종. 어떻게 이렇게도 부조리한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은 자가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알고 이름을 기억하고 부를 수 있다니. 들이마신 감정이 숨을 가득 채운다. 불가해한 순간을 마주한다.
베누아는 거리의 단칸방으로 들어간다. 작은 방. 하지만 자신의 집. 바깥에서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 그 누군가는 제 생각을 들으면 화낼 테고 기다린다고 하지 않을 테지만 뭐 어떤가. 사 온 식재료를 한 구석에 놓아두고 누워있는 게르트루트에게 다가간다. 더는 사경을 헤맨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혈색이 도는 얼굴, 나아진 몸 상태. 베누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릴 정도의 만족감. 그는 이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입을 맞춘다. 뺨에 손을 댄다. 입안에서 그의 이름을 굴려본다.
“게르트루트씨.”
감고 있던 눈에 떠진다. 눈동자가 교차한다. 감긴 눈꺼풀 안에는 흔들리는 눈동자가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복잡한 감정이 스며 나오는 게 투명하게 보인다. 베누아는 입꼬리를 올린다. 서로의 눈 안에 서로가 가득 들이찬다. 돌아오지 않는 답. 짧은 침묵. 그는 개의치 않고 말한다.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느껴진다. 애처로움과 만족. 제 주인이었던 자에게 애처로움을 느끼고, 제 손이 닿아야만 하는 자에게 만족감을 가진다. 이 작은 단칸방 아래 두 사람만 있다. 그는 이 작은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할 테다. 설령 벗어난다 해도 돌아올 곳은 이곳뿐임을 안다. 그의 세계는 망가졌고, 그는 잊혔다. 그를 기억하는 건 베누아 자신 뿐이다.
“제 곁에 있기 싫나요?”
문득 베누아는 질문한다.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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