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수면을 채우던 해 질 녘 노을의 온도

“네게 축하받으러 왔어.”

축하의 꽃다발로 가득해야 할 그의 양손이 비어 있었다.

올해 졸업생들의 대표로서, 주인공으로서 카베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축하를 받고 있어야 했다. 축하 세례를 받으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느라 여기까지 올 시간을 내기 힘들었을 그는 지금, 인적 드문 이곳까지 찾아와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서서 ‘축하해달라’라는 말을 던진 채 알하이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아 재학생으로서 졸업식에 참가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라 알하이탐은 자리를 피해 혼자만 아는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졸업식인 오늘 카베가 여기에 찾아온 건 예상 밖이다. 대판 다투고 난 이후로 이렇게 침착한 카베의 목소리를 듣기도 오랜만이다. ‘축하받으러 왔다’라고 했지만, 카베는 성격상 노골적인 말로 무언가 해달라느니 받고 싶다느니 요구하는 일이 별로 없다.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한 알하이탐을 굳이 찾아와 무언가를 해달라고 하는 건, 그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서로를 등지고 떠나 더 이상 엮일 일도 없을 줄 알았다. 어쩌다 아카데미아 안에서 마주쳐도 그는 처음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곤혹스럽게 눈을 다시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돌리고서 거북한 자리를 뜨는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오늘을 끝으로 졸업하면, 아카데미아라는 접점도 사라져 이따금 마주치는 우연도 기대하지 못한 채 서로 오랫동안, 혹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선만 움직여 카베의 모습을 확인한 알하이탐이 펼쳐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되돌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그에게 인사는커녕 짧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익숙하다.

 

 

 

 

시선이 잠시나마 이쪽을 향했다는 건 인사나 다름없다. 여태까지 그래왔다. 여태까지라고 하기에는 다툰 이후로 공백이 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역시 카베가 알던 그대로였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가장 이해해준다고 여겼던 단 한 명에게서 날카로운 말을 듣고 상처 입고 다투고, 그 이후로 알하이탐을 의도적으로 피해왔지만 졸업식인 오늘 카베는 그의 앞에 서 있다. 카베가 왔다는 걸 확인해도 말 한 마디조차 건네지 않는, 차가워 보이는 모습의 밑바닥에는 허용이 자리 잡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기조차 싫다면 알하이탐은 진작 이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짧게라도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했다.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에게는 기대하게 된다.

그의 공간에 비집고 들어와 카베가 말을 걸면, 정체된 대기에 고여 있던 침묵이 흐르는 것 같았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누그러져 천천히 순환하기 시작한 침묵이 카베의 옷자락과 피부에 닿을 때쯤에는 공기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무시하는 줄 알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말로 대답하니까. 직접 목소리로 돌아오는 대답에 익숙해져서, 어느샌가 한 공간 안을 채우는 사람의 체온과 존재감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마음의 온도를 잊고 지냈다는 걸 알하이탐을 만나고 나서 깨달았다.

다시 책을 향한 눈은 속눈썹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위에 맺힌 석양의 빛이 흘러 떨어져 발아래에 핀 정원의 꽃에 내려앉으면, 빛의 온기를 머금은 꽃잎이 따스한 색으로 바뀌어 간다. 온기가 차츰 몸을 감싸고 이 온화한 침묵에 익숙해질 때쯤, 그렇게 예열이 끝나면 그가 목소리를 낸다.

알하이탐과의 대화는 대개 시작이 이렇다.

“그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하나하나 성가신 녀석이다, 모처럼 건네는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더 나은 인사를 할 줄도 알면서──울컥 하고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이 느낌도 오랜만이다. 그새 없던 정도 떨어졌다며 다 필요 없다, 네게 축하 인사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따위의 말을 던지고 이 정원을 등진 채 도망치듯, 여태까지 그래왔듯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공들여서 해놓은 예열이 식는 일은 없었고, 오랜만의 온기는 그리운 감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알하이탐이 카베에게 바라는 말은 지난 일에 대한 회고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평소 그의 성격을 고려하면 그럴 것이다.

사과하라는 게 아니라 카베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다. 그는 항상 이렇다. 가장 나약하고 보기 싫은 면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딱딱하고 직설적인 말투로 무심한 듯 툭 내던지면서도 카베가 말을 곱씹을 수 있도록 항상 이렇게 시간을 들여주었다. 크게 싸운 이후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만도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알하이탐은 그대로였다.

졸업식을 뒤로하고 고민하다 이곳을 찾았을 때 멀리서 보이는 인영이 정원 한구석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어서, 여태 알던 그대로의 익숙한 모습이어서 보자마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거기에 의지한 덕분에 가까이 다가와 대뜸 ‘축하받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무시하고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와 달리 알하이탐은 전과 똑같이 카베를 대했다. 앞으로 몇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채 저 모습 그대로 이곳에 머물 것 같았다.

그래서 필요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의 파동이 온화한 대기를 타고 전해져 고막을 울리면, 언령처럼 그 말이 가슴에 새겨지면 이곳을 떠나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낯선 세상으로 나가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나 오랫동안 소속되었던 곳을 떠날 때 불안을 느낀다. 기존의 소속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또다시 방황하며 새로 자리 잡을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불확신을 품게 한다.

졸업이란 끝이자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다. 불안하고 모호한 그 경계선에서 카베는 알하이탐을 절실하게 떠올렸다.

아카데미아에서의 추억은 많았지만 가장 온화하고 가장 강렬했던 양극의 기억은 전부 그와 공유했다. 알하이탐이 졸업을 각인시켜준다면, 인생의 큰 전환점에서 끝이자 시작이 되어준다면 이곳을 떠난 후에도 그 추억에 의지해서 자신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하이탐.”

이제야 고개를 돌려 카베 쪽을 바라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카베를 보는 시선이 그저 차갑지만은 않다. 그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내 졸업, 축하해줘.”

탁 하고 두꺼운 종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대기의 흐름을 잠시 끊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부드러운 침묵이 단절을 뒤덮어 둘 사이의 대기는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시선을 돌리고 책까지 덮었다는 건 항상 잔잔한 그의 심경에 파문 하나 정도는 새길 수 있었다는 뜻이다──즉, 대화할 의향이 있다는 뜻이다.

 

 

 

 

이성의 호수는 항상 평온해야 한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한 이성 위에 이따금 나뭇잎 하나가 가볍게 내려앉을 때 부드럽게 수면이 흔들리는 그 순간은, 아주 좋은 책을 읽어 지적인 갈증이 다소 해결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좀처럼 느끼기 어렵다.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호수 한가운데에 어느샌가 날아들어 채 건너지도 못한 채 녹아버린 나비는 물방울이 되어 물속으로 떨어졌다. 수면 위로 떨어지며 깊숙이 파고드는 물방울이 새긴 파문은 그야말로 요란해서, 항상 고요하던 수면 전체가 나비의 파문으로 흔들렸다. 물속으로 파고든 나비는 호수를 제멋대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결코 섞이는 일 없이 물속을 날아다니다가 저 밑바닥에 잠든 호수의 주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음껏 휘젓고 다녔으니 호수의 주인을 발견하고 도망갈 법도 한데, 나비는 물속을 떠나 다시 수면 위의 하늘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수를 가득 채운 이성의 밀도가 그대로 수압처럼 온몸을 옭아맬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비의 날개는 깃털처럼 움직였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자신 외 다른 존재와의 접촉에서 불쾌함이 아니라 신선함을 느끼기도 처음이었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목소리를 처음 들려준 순간부터 그는 알하이탐의 내면에 날아들어 이성의 호수 깊숙한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숨 막히는 물속 밑바닥에서도 그는 자유로워 보였다. 자신이 채워둔 이성의 밀도가 그에게는 무겁지 않은 것 같았다. 그제야 알하이탐은 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에게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실체는 지금 바로 눈앞에 있다.

카베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오늘 그는 불안해하며 의지하고 싶어 했다. 다름 아닌 알하이탐에게. 알하이탐의 말은 무겁다. 카베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의지하는 것이다. 입에서 흘러나온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속에 차오르고, 수위를 높여가는 물속에 끝내 잠겼을 때 몸을 옭아매는 그 수압 속에서 오히려 카베는 자유로웠다.

이 정도면 상당히 발전했다. 원하는 바를 똑바로 전달했으니, 보상으로 졸업 축하 인사를 해주는 일 정도야 어렵지 않다. 

“졸업 축하해, 카베.”

원하는 말을 전해주었으나 카베는 아직 부족한 눈치다. 그게 무엇인지 재촉하지 않아도, 그는 알하이탐의 앞에서라면 머지않아 알아서 덧붙일 것이다.

한동안, 짧은 공백이었으나 지금 대화하던 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길게 느껴지는 시간──심호흡 두 번 정도의 간격을 두고 카베는 입을 열었다.

“……‘선배’는?”

“…….”

“그 반응은 뭐야? 오늘 정도는 괜찮잖아.”

“어이가 없군.”

“너……! 후배에게 선배라고 불러달라는데 어디 문제 있어? 순순히 축하해주면 안 돼?”

시간을 되돌려 다투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니다. 둘 사이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 익숙한 전개에 한두 마디 더 보태다 보면 반드시 다투게 될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같은 대화를 반복하기보다, 이곳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 할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는 편이 낫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이쪽이 좋으리라 판단한 알하이탐은 다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졸업 축하해, 카베 선배.”

높낮이가 거의 없는 억양이라 무미건조한 듯 울려 퍼진 말은 그래도, 카베의 입가를 부드럽게 풀어지도록 하기 충분했다.

무심한 듯 들려도 카베에게는 제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석양의 따스함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 입꼬리가 증거이다.

“……고마워, 알하이탐.”

그는 오늘 이곳을 졸업한다.

아카데미아를 떠나 앞으로 새로운 길을 나아가면서 그는 분명 외로울 것이다. 카베는 평탄한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에 앞으로 걸어갈 길은 가시밭길일 수도 폐허일 수도 있다. 오늘의 기억이 마음속에 빛으로 남아, 끝내 어둠 속을 헤치고 나온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알하이탐은 마주 웃어주었다.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감으로 뒤덮이자 양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서 카베는 두 손을 머리에 쓴 모자로 들어 올려 엠블럼 배지를 떼어냈다. 같은 학파의 후배에게 주는 것이 원래의 관습이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카베는 자신의 엠블럼 배지를 각별히 여기는 후배 중 한 명에게 물려줘야 한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떼어낸 배지를 손에 올려놓고 내려다보던 카베가 천천히 알하이탐 쪽으로 팔을 뻗었다. 나름대로 큰 결심이었기에 결연한 표정으로 내밀었는데도 불구하고 알하이탐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 뿐 배지를 받아 들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이걸 왜 나에게 주는가’라고 묻는 것 같다. 묘론파에 학생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카베에게 각별히 여기는 후배가 몇 명쯤은 있을 텐데. 오히려 이쪽이 그럴 법하다. 굳이 지론파인 데다 앙숙이다시피 한 알하이탐에게 이 물건을 줄 이유가 없다.

뜻밖의 상황을 눈앞에 두고 순순히 받지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는 알하이탐을 향해, 카베는 팔을 가볍게 흔들어 받으라는 재촉을 했다.

“특별히 네게 주는 거야. 역시 이걸 받을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대신…….”

알하이탐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배지를 쥐려던 손을 멈추고서 이어질 카베의 말을 기다렸다──기다리려고 했으나, 카베가 다른 한쪽 손을 잽싸게 들어 알하이탐의 손을 덮어 눌렀다.

“네가 졸업하면, 네 건 나에게 줘야 해.”

알하이탐의 손을 위아래로 감싼 카베의 손이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지금은……, 못 받아 가니까.”

알하이탐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손에 힘을 넣어 카베의 손을 맞잡았다. 정확히는 배지를 집어 들 생각이었지만, 카베의 손이 위아래로 감싸고 있어 이런 식으로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떨림이 멈추어 비로소 전해진 온기가 알하이탐의 피부에 스며들기도 전에, 카베는 손을 물렸다. 손등의 윤곽을 조심스레 덧그리는 것처럼 손끝이 피부 위를 미끄러진다. 아슬아슬하게 접촉한 자리가 간지러워서 반사적으로 튀어 오를 것 같은 손가락을 억누르기 위해, 알하이탐은 카베의 손 위에 올려진 배지를 잡아 서서히 손을 빼내었다.

“네가 받아줘서 다행이야.”

“…….” 

알하이탐의 손이 물러나자 카베도 머뭇거리다가 양손을 서서히 내렸다. 피부에 남은 온기를 가두려는 듯 양손을 가슴 앞에 감싸 쥔 카베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손에 쥔 묘론파의 엠블럼 배지는 평생 인연이 없으리라 여겼던 물건이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도 처음이었다. 배지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한 번 가볍게 문지르고 나서 알하이탐은 다시 고개를 들어 카베를 보았다.

“어떻게 받아 가려고?”

“어?”

“내 것도 달라면서. 졸업식 날 올 건가?”

“그건…….”

모르겠어, 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카베가 말을 이었다.

“네 졸업식은 못 볼지도 몰라. 하지만 반드시 받으러 올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 주면 안 돼.”

마지막에 한 말은 역시 쑥스러웠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카베는 몸을 돌렸다. 부드러운 움직임이 바람을 일으키면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에도 붉은빛이 맺혔다. 머리카락을 타고 흩뿌려진 빛의 입자가 비말처럼 그를 감싼다.

몸을 완전히 돌려 등을 보이기 전까지 카베의 시선은 알하이탐을 좇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눈이 석양의 빛을 받아 따뜻하고, 그리고 아련했다.

 

 

 

 

카베는 알하이탐의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올 수 없었는지 오지 않은 건지는 알기 어렵지만, 알하이탐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아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 거기서부터는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졸업 후 서기관이 된 알하이탐에게 이따금 흘러드는 소문 속의 카베는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 어느덧 이 나라에서 손꼽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어 있었고, 이제 입을 필요가 없어진 알하이탐의 교복은 언젠가 ‘반드시 받으러 올’ 주인을 위해 옷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정리할 겸 오랜만에 꺼낸 상자 속에는 교복과 함께 카베에게서 받았던 묘론파의 엠블럼 배지가 잠들어 있었다. 카베의 졸업식 날 몸 위로 쏟아지던 석양을 입은 탓에 기억은 온기의 형태가 되어 교복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내 배지를 받아 가겠다고 했는데, 라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알하이탐은 도로 상자를 덮어 방 한구석에 보관해두었다. 입을 일도 없을뿐더러 졸업 후 몸집이 더 커진 탓에 맞지도 않지만, 옛집 서고에 쌓여 있던 책들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 온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기억도 상자 속에 잠들었다. 

몇 년이 지나 석양의 온기가 잠든 상자에 얽힌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오랜만에 아카데미아를 찾은 카베의 얼굴에는 과연 저명한 예술가답게 어딘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로지 작품을 위해 고뇌하다 드리워진 그림자였다면 그야말로 속세와 동떨어진 예술가다울 텐데, 그는 현실적 문제로 시달린 끝에 출강할 의사를 밝히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사실 지금의 카베에게는 돌아갈 집도 없다. 단골 주점에서 임시로 숙식을 해결하는 이 생활을 오래 끌 수는 없기에 전부터 권유받았던 출강 제의를 수락했다.

이런 식으로 아카데미아에 돌아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몇 년 전에 바라던 대로 강사로서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이기도 했다.

카베는 문득 졸업식을 떠올렸다. 해 질 녘의 빛 속에 서 있던 그를 찾아가 축하의 말을 요구했던 그날의, 그 장소가 보였기 때문이다. 옛 친구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지만 눈에 비친 풍경은 감회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엠블럼을 받아 가겠다고 해놓고 정작 졸업식에도 가지 못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카베가 일방적으로 명의를 포기하고 처리를 떠넘긴 집에 살고 있을까,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니 그 집에 살지 않더라도 수메르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아로 돌아와 강의를 하고, 이렇게 지나는 길에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들면 어느 날 눈앞에 그가 서 있으리라는 애매한 확신과 기대가 가슴을 채웠다. 세월이 흘렀어도 이곳에 떨어지는 석양은 여전히 따스하다. 이 온기는 변하지 않았다.

 

 

 

 

때때로 현실은 우연한 꿈처럼 다가온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간 주점에서 오늘도 술을 마시던 카베의 눈앞에, 옛 친구는 그렇게 다시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여태까지 겪은 일들과 좌절과 형편 전부를 그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길을 걷는 날이 다시는 없으리라 여겼기에, 별이 뜬 밤 익숙한 길을 함께 걸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 걷는 길이 끝나지 않기를 가슴 한편으로 바라는 동안 둘의 걸음은 현실의 끝에서 멈추었다.

네 이상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질문을 받고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는 그와의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건…….”

한 번 단절했던 과거를 이으면, 그날 끝이자 시작을 고해주었던 그의 질문에 대답하면 그날 쏟아지던 석양의 온기가 되살아날 것 같았다.

“내가 달라고 했던 거, 아직 가지고 있지?”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그건 이제 내 것이 아니니 맡아두는 셈 치고 보관해뒀어.”

“그럴 줄 알았어. 정말 너다워.”

이제 받아 갈 수 있겠네.

그리고 카베는 뒤늦은 축하 인사를 이어서 말했다.

“졸업 축하해, 알하이탐.”

카베를 보고 있지 않아서 표정이 잘 안 보였지만, 그의 입가가 작게 올라간 듯 보였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알하이탐의 손가락에 얽자 손의 마디가 굽혀지고 손끝이 맞닿았다. 피부와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심야의 공기가 이미 차갑지 않았다.

이상의 시작점은 현실에 있다.

되찾은 온기 역시 현실에 있었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맞이할 아침을 기대하며 카베는 마주 잡은 손가락을 더 깊게 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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