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09:20/PM 09:20

PM 09:20

이 남자가 현관의 벨을 누르기까지 고민한 시간을 문장으로 옮긴다면, 책 한 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많은 분량이 나올 게 틀림없다.

오늘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을 것이다.

어제 가게를 나서기 전 쪽지를 건넨 순간부터 반짝거리는 기대의 빛이 그의 눈에 떠오르기 시작했으므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 후로부터 가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할 겨를조차 없이 시곗바늘은 돌아가고 날이 저물고, 그렇게 하루가 끝났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그는 허겁지겁 오늘을 준비했으리라. 그의 가게라는 공간으로 같은 시간에 찾아가 한 잔의 대가를 지불하고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태 이름조차 모르던 한 사람을 위해서.

매일매일 커피만을 주문했어도 케이크 가게라는 건 알고 있었다. 딸랑하고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이제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다가 이따금 시선을 들면 쇼케이스에 가지런히 놓인 아름다운 케이크들이 보였으니까. 케이크가 진열된 쇼케이스 너머에는 커피를 내리는 그의 뒷모습이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그 모습을 보는 건 일상이 되어갔다. 정해진 시간에 그의 가게에 들어가는 일이 당연히 거쳐야 할 하루의 시작이 되어갔다. 책에 적힌 문장 몇 개를 눈으로 좇다가 카운터 쪽을 보면, 그는 아까와 약간 다른 위치에 서서 부지런히 일하는 중이다. 아침부터 참 바쁘게 움직인다는 생각을 문득 하다가, 이곳은 케이크 가게이자 카페이므로 그의 아침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시작하리라고 추측했다.

──그렇구나. 내게는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이지만, 그에게는 한창 일하는 한낮이 지금이겠거니 하며 시선을 책으로 되돌리고 두세 장을 넘긴다. 그러면 머지않아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읽던 페이지를 확인한 다음 덮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날 때 바닥과 의자 다리가 마찰하는 끼익 소리마저도 일상이다. 지금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그에게 알리는 대답 대신이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가져올 때, 그는 반드시 얼굴을 마주 보고 ‘맛있게 드세요’라거나 ‘매일 와줘서 고마워요’라는 가벼운 인사와 눈웃음을 건넨다. 마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면 천천히 아침이 시작된다.

시럽도 크림도 넣지 않은 커피에서는 묘하게도 항상 단맛이 느껴졌기에, 어지간히 특이한 원두를 쓰는 건 아닌지, 혹은 저 금발의 오너가 몰래 시럽을 넣는지를 의심했으나, 냉정하게 거듭 생각해보아도 번번이 ‘기분 탓’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내리는 커피의 맛이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오히려 훌륭한 편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그의 가게에 처음 들어서서 주문한 커피의 맛을 떠올렸을 때 최근과 같은가를 묻는다면 ‘아니다’였다.

“저기…….”

작은 종이 꾸러미를 품에 안은 채 차마 한 걸음을 내디디지 못하고 선 남자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알하이탐의 사고는 거기서 멈추었다. 카베는 가까스로 벨을 눌러 집 안에 들어오는 데까지 성공하였으나, 결연한 표정과 달리 몸은 머뭇거리며 더는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과 주저가 느껴졌다. 어제 다짜고짜 주소가 적힌 메모와 함께 찾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으니, 이후부터 그는 끝없이 생각하고 망설이고, 그리고 선택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렇게 카베는 결국 이곳에 와서 알하이탐의 앞에 서 있었다.

케이크의 보답을 하고자 했을 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어제 아침 카베의 가게에서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모양의─어제의 그는 이런 뉘앙스로 말했다─토끼 케이크를 대접받고, 평소처럼 입으로 옮겼다가 너무 달아서 곧바로 커피를 들이켰더니,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달음에 달려오던 카베의 얼굴을 떠올린다. 지금과는 완전히 딴판이라, 그가 지금 긴장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케이크에 대해 말할 때는 거침없이 큰소리로 야단을 쳤으면서. 좋아하는 일, 혹은 잘하는 분야를 논할 때는 자신감과 고집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는데 지금은 확신이 결여된 모습이다.

걱정하고 있다. 주소를 적어주며 찾아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주제넘게 와버린 것은 아닌지, 여기까지 와서도 고민하고 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으려 해도 알하이탐을 향한 시선 아래에 서린 불안이 잘 보였다.

“……이거. 받으세요.”

그리고 카베는 알하이탐을 향해 품속에 가지고 있던 꾸러미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뭐죠?”

“원두……. 아니, 그런데. 집에 초대한 사람에게 처음 하는 인사치고는 정 없는 거 아니에요?”

“단순히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내 사적인 공간에서 굳이 반기는 인사를 할 필요는 없죠.”

“………….”

꾸러미를 알하이탐 쪽으로 건네기 위해 팔을 뻗은 그대로 카베는 굳어버렸다. 눈이 크게 열리고, 입은 아까 ‘아니에요?’라고 말하느라 살짝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올라간 양 눈썹 사이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지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카베는 어이없어하는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어렵게 찾아온 그에게 예상외의 발언이었을 테니 당황할 법하다. ‘잘 오셨네요, 어서 들어오세요’라느니 ‘오느라 고생하셨죠? 뭐 이런 걸 다……’라며 상투적인 인사와 함께 카베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 드는 것이 정해진 답이겠으나, 알하이탐은 집 안에 들이기까지 한 상대를 굳이 딱딱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발걸음을 되돌려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카베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 책을 펴면 어김없이 시선이 밀려들었다. 노골적인 종류는 아니었다. 원두에 뜨거운 물을 붓고 뜸을 들이는 동안에 피어오르는 향기처럼 시선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밀려들었다. 그것에 점점 나른함이 섞여갈 때쯤, 마시기 딱 좋을 정도로 식은 커피에서는 단맛이 났다. 암시라도 건 것처럼, 채 다 걷히지 않고 의식에 남은 아침의 졸음을 걷어가는 대신에 카베는 커피에 단맛을 남겼다.

그의 호의를 알고 있다. 매일 마주치는 시선, 어쩌다 손이 스치는 짧은 순간에 닿는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질 정도였다. 갑자기 케이크를 들고 테이블까지 다가왔을 때는 조금 놀라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주는 달콤함이 싫지 않았다.

“집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한 사람이니 딱딱하게 대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본인의 성격에 관해 설명하는 건 알하이탐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참이므로 굳이 덧붙였다. 매일 만나는 상대이기는 해도 그가 알하이탐을 보는 시간은 한정적이며, 말을 섞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카베는 정해진 시간에 가게로 찾아와 잠깐 머물다 떠나는 알하이탐을 보고 어떤 사람일지 상상만 해왔을 테니까. 애매한 모습에는 상상하는 사람의 이상이 섞여 들어가므로, 카베의 안에서 점차 형태를 갖추어가는 알하이탐이 그의 이상으로 굳어지기 전에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공간으로 그를 초대하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알하이탐이 카베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그제야 카베는 살짝 벌려져 있던 입을 다물고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올라간 양 끝의 입꼬리를 내려다보고 잘 웃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 한 말로 오해가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다행이라.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그저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카페의 오너일 뿐인데. 노골적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의 호의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집에 초대해놓고, 그를 눈앞에 세워둔 채 자신의 언동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해명까지 하고 있다니. 너무 번거롭다. 오해하면 어떻단 말인가. 오해하든 말든 카베가 운영하는 카페는 알하이탐에게 기분 좋은 공간이고, 앞으로도 매일 들러서 일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아침을 맞으면 별 지장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오늘을 기대했을 카베가 실망하고 돌아갈 경우에는 이따금 그가 직접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케이크가 제외되겠지만.

사실 케이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에게 말한 대로 단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므로 굳이 디저트를 원해본 적이 없다. 매일을 살아가면서 필요 이상의 당분을 찾는 경우라고는, 예를 들자면 아주 완벽하게 지쳤거나 머리를 쓸 때이기에 필수 요소가 아니다. 아름답게 세공한 케이크, 차갑고 단단한 금속 포크를 밀어 넣었을 때 폭신하게 휘감기는 시트, 잘라내어 혀끝에 올려놓으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감미란 알하이탐의 인생과 인연이 없는 것들이다. 훌륭한 케이크임에도 불구하고 한두 번 맛본 뒤 물려버릴 종류의 단맛이 신선하게 미뢰를 자극하는 이유는, 아마도 케이크를 만들어 커피와 함께 가져다준 사람 때문이다.

“가게에서 쓰는 원두예요. 뭐가 좋을까 하다가……,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라서. 그리고…….”

이걸 좋아하잖아요.

이 말을 하며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알하이탐을 응시하기까지의 짧은 순간에도 카베는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 끝에 결정했을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걸 가져왔지만 막상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려니 조금 쑥스럽다. 하지만 집에 초대해놓고 왜 오해를 살 만한 언동을 보이는지 설명까지 하려는 사람에게, 나는 오해하지 않았으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내비치기 위해서는 우선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같은.

속내가 이렇게 겉으로 죄다 드러나는 타입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이라기보단, 여태 살면서 의식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이 원두를 쓰느라 가게에 안 가면 어쩌려고?”

꾸러미를 받아 들며 떠보는 말을 던진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그 말에 어울려줄 생각이 있는 듯 카베는 입 끝을 올려 웃었다. 이 얼굴은 본 적이 있다. 자신 있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런 표정을 한다. 카베의 시선에 어렸던 망설임은 빠르게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아뇨, 오겠죠.”

“어떻게 알아요?”

확신의 이유를 되묻는 말끝에 웃음기가 섞여 호흡과 함께 흘러나왔다. 케이크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닌데, 카베는 그때와 같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궁금하다. 카베가 자신을 어떻게 상상하고 보든 간에 알하이탐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 얼굴로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에는 흥미가 일었다.

“당신은 내 가게를 좋아하니까요.”

“그것뿐?”

“충분하잖아요. 매일 짧게나마 책을 읽다가 가는 걸 보면 당신에게는 커피 그 자체보다 여유가 필요할 테고, 그런 여유는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어 주니까요. 내 가게에서 내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셔야 그 맛이 나는 거라고요. 그리고 아침마다 와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이 직접 내려서 들고 다니겠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원두를 선물하더라도, 주말이 끝나면 가게로 와서 언제나처럼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읽겠죠. 이 원두는 시간이 많을 때나 직접 내려 마시고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굳이 되물었다. 그가 이어서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서, 빨리 뒤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 같은.”

말을 어중간하게 끝맺고서 카베는 입을 닫았다. 여태 술술 쏟아내던 모습이 무색하게 다시 내리깐 눈 위에는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모양이다.

“놀랍군요. 전부 맞았어요. 그리고 마지막 제안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자면…….”

궁금해졌다.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채 서로의 존재만을 확인하던 아침이 반복될 때마다 카베의 안에서 알하이탐이라는 사람이 어떤 형태를 갖추었을지. 그의 상상과 실제 자신이 얼마나 일치할지. 그래서 알하이탐은 카베의 제안에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오늘은 내가 커피를 내릴 테니 앉아서 기다려요. 디저트는 당신이 가져온 것으로 하죠.”

“어떻게 알았어요?!”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카베를 보고, 알하이탐은 ‘역시 알기 쉽다’라고 생각했다.

✧✧✧

너무 이른 아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점심때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방문한 그에게서는 단내가 났다. 평소 가게에서 두르고 있던 케이크의, 눅진한 과일이나 크림 향이 섞인 단내가 아니라 조금 다른 종류였기에 카베가 원두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실의 소파로 카베를 안내하여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고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알하이탐은 카베에게서 나던 버터 향을 떠올렸다.

묵직하고 진한 맛을 내기 위해 그라인더로 원두를 곱게 갈아두고 필터와 서버를 뜨거운 물로 한 번 적신다. 물의 온도는 90도 이상으로, 준비를 마치면 필터에 원두를 담고 충분한 물을 부어 원두가 물을 머금도록 시간을 들인다. 원두가 부풀어 오르고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할 때쯤 천천히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한다. 실내 전체에 감도는 향기는 카베의 가게에서 퍼지는 것보다 더 무겁고 은은했다. 카베가 내릴 때는 이보다 조금 더 화사한 향기가 난다. 맛도 아마 차이가 날 것이었다. 카베의 방식을 흉내 내어 비슷한 맛을 낼 수도 있었지만, 오늘 그를 초대한 목적은 알하이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함이므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추출한 커피를 따를 잔 세트는 오랜만에 꺼낸 물건이다.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조모의 소장품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빈티지 잔이었다. 혼자 커피를 마실 때 쓸 일이 없어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써보기로 했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평소보다 정성 들여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평소에 안 쓰던 잔을 꺼내고, 거기에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붓고, 같은 원두를 사용했음에도 향기의 무게가 다르다는 점을 의식하며, 내린 사람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커피에 대해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예상하는 모든 과정이 번거로우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잔을 옮길 트레이를 꺼내기 위해 뒤돌았을 때 그곳에는 벽에 기대고 선 카베가 있었다.

“놀라지도 않네, 재미없게.”

“알고 있었거든요, 기척으로.”

“이렇게 뒷모습을 지켜보니까 난 졸리기만 한데……, 잠 깨는 거 맞아요?”

“당신처럼 쓸데없이 많이 움직이지 않거든요.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자는 주의라서.”

“아, 그러세요?”

커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제법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가게에서처럼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는 목소리가 즐거워 보인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노곤해지는 것 같아요. ……이러다 처음 온 집에서 잠들어 버리겠어요.”

“상관없는데.”

“……응?”

“자고 가도 된다고.”

“………….”

이번에도 그 표정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얼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알하이탐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였고, 그제야 카베는 한숨처럼 길게 내쉬는 호흡 끝에 웃어 보이더니 시선을 옆으로 피한 채 한 손으로 가볍게 주먹을 쥐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 못내 아쉬운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상관없는데…….”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커피를 얹은 원목 트레이를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알하이탐을 뒤따르기 위해 카베도 기대어 있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과 소파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커피를 각자의 자리에 내려놓고 한 모금을 마시기 전까지 짧은 침묵이 흘렀지만, 마침 떠올랐다는 듯 가방을 뒤적여 또 다른 꾸러미를 꺼낸 카베로 인해 어색하지 않던 이번 침묵은 머지않아 깨졌다.

토끼 모양으로 구워진 쿠키를 한 손에 집어 들고 잠깐 쳐다본 뒤 곧바로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맞은편에서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 더 감상하는 척이라도 하는 쪽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알하이탐의 성격이다.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연기하기보다는,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을 편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알하이탐의 분위기나 태도로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다. 그는 알고서 이곳에 왔다. 오히려 이제 와서 꾸며봤자 부자연스럽다. 평소의 알하이탐을 보고, 그도 마찬가지로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 편하게.

심혈을 기울여 귀엽게 구웠는데 그냥 먹어버리는 법이 어디에 있냐느니, 그래도 한 번 보고 먹은 게 다행이라느니, 감성이 메마른 게 아니냐느니.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는 듯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매일 책을 읽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나. 무슨 책을 그렇게 매일같이 읽느냐고 묻기에 서재를 보여주기로 하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으로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거릴 때마다 만족스러운 듯 미소가 번지고 있어서 그가 이 커피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점도 알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뜨거운 것을 잘 못 마시는지 절반밖에 비우지 못한 잔을 그대로 들고 뒤따라 일어난다.

서재의 문을 열자마자 등 뒤에서 터져 나온 작은 탄성에 뒤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빌려 가도 좋다’라고 말을 걸었더니, 그는 기뻐하며 뛰어드는 것처럼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 하나 너머의 서재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다.

빼곡하게 책을 꽂아둔 순서, 보관 방법, 눈에 들어오는 타이틀과 장정裝幀, 책장의 나무 재질과 짜임과 그 깊이, 색을 맞춘 책상과 의자 등의 가구, 책을 읽기에 알맞은 조명, 책 보관을 위해 창에다 달아놓은 우드 블라인드. 해가 내리쬐는 한낮이 지나고 여유로운 오후 때쯤, 블라인드를 걷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잠시 잠드는 시간을 알하이탐은 좋아했다. 서재에서 감도는 향기가 꽂아놓은 책들처럼 차곡차곡 내려앉은 이 방 한가득, 알하이탐의 취향이 밀도 높게 들어차 있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물건은 평소에 자주 쓰는 것들이라, 들여다보면 서재의 주인이 어떤 사생활을 보내는지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애초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가장 개인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집 안에 타인을 들이는 일 자체를 하지 않을뿐더러 서재를 나서서 보여주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누군가에게 서재의 문을 열어 보이며 들어가기를 권해본 적도 물론 처음이었다.

알하이탐이 지내온 시간과 일생 축적하고 고수한 취향으로 가득한,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며 따스한 공간에 뛰어든 한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재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나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새 책을 꽂을 때, 매일 새로 뜨는 햇빛을 방에 채울 때, 펜이 약간의 저항감을 남기면서도 고요하게 종이 위를 미끄러질 때, 곁에 놓아둔 커피가 식으면서 퍼지는 향기에 잉크 향이 어렴풋하게 섞일 때. 정체된 것만 같던 그 모든 시간의 기억 사이로 흘러든 한 사람은, 그야말로 시럽이나 크림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들고 있던 커피를 책상에 내려두려는지 책상 위를 이리저리 헤매던 카베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기에 눈으로 좇아보았더니, 위치상 어떤 이유로 거기에 시선이 머물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만년필을 넣어둔 짙은 색의 보관함이다. 상자의 윗부분을 덮은 유리 아래에 가지런히 눕혀진 펜들 중에서 선명한 붉은빛의 만년필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색이지만, 배럴과 캡에 전체적으로 들어간 불꽃 패턴과 장미를 양각으로 새긴 금 장식부가 잘 어우러져 우아함이 돋보이는 펜이다. 알하이탐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해서 조모에게 물려받은 후로 쭉 보관만 해두었으나 지금 만년필에 머무는 시선의 주인에게는 잘 어울릴 것이다.

책상으로 천천히 걸어간 알하이탐이 보관함을 열고 펜을 꺼내어 카베에게 건네자, 눈을 살짝 위로 떠서 올려다보며 머뭇거리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여 괜찮다는 무언의 말을 전했다.

카베는 펜을 양손으로 받아 들고 정중하게 이리저리 살피더니 감탄하는 눈치였다. 역시 그가 들고 있으니 잘 어울렸다. 오래도록 보관함 속에 진열된 채 눕혀져 있던 만년필이 드디어 주인을 찾아 생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 마음에 들어요?”

“……네. 여태까지 펜을 좋은 것으로 써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비싼 펜을 사는 이유를 알겠어요.”

고가의 펜을 더 들여다보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카베는 머지않아 펜을 알하이탐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알하이탐은 받아 들지 않고, 대신 카베를 보며 만년필의 내력을 설명했다.

“그 펜은 유품이에요.”

“누구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아끼던 물건이었죠.”

“……그렇군요. 보여줘서 고마워요……. 안목이 높으신 분이었네요. 그럼 커피잔도 혹시…….”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눈을 좁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 커피잔 이야기를 꺼내는 카베의 말을 자르고 알하이탐은 짧게 고했다.

“줄게요.”

“네?”

“케이크의 답례라고 치죠.”

“아니……! 이건 아니잖아요! 고인이 아끼던 유품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받아요?!”

“어차피 난 안 써요.”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조심스레 들고 있던 만년필을 양손에 꼭 쥐고 일견 화가 난 것처럼 외치는 카베 앞에서, 알하이탐은 입을 닫고 “음……” 하는 소리를 흘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이 펜은 카베의 손에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린다. 그에게 건넬 때부터 줄 생각이었기에 이미 알하이탐의 마음속에서는 손을 떠난 물건이며, 물건은 쓰지 않고 전시하기보다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 잘 쓰이는 것이 좋다.

“어제의 케이크는 날 위해서 특별히 만들었다고 했죠.”

“……그건 그런데…….”

“당신이 나를 위해 만든 단 하나의 케이크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도 과한 것 같나요?”

“그래도 이건 소중한 유품이잖아요.”

“소중히 사용해줘요.”

“…….”

한 손을 들어, 펜을 쥐고 있는 카베의 양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직 주저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카베에게 이건 이제 당신의 물건이라고, 온전히 가져도 좋다고 체온과 감촉으로 새겨주려 했다. 안심시켜주려 했다. 타인에게 이런 식으로 닿기는 처음이라 힘의 가감이나 손을 감싼 손가락의 간격이 적절한지 의문이지만, 제대로 전해진 모양인지 카베는 이윽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잉크는……, 내가 블랙밖에 안 써서. 그 펜에 어울리는 걸 따로 사죠.”

“아! 아니에요! 펜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리고 블랙도 괜찮아요!”

“카베.”

“……왜요……?”

“그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잉크를 사주겠다는 말에 허겁지겁 대꾸하는 카베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당황이 어려 있었다. 이제부터 할 말은 알하이탐으로서도 제법 넉살이 필요한 종류였기에, 카베의 손을 감쌌던 자신의 손을 물리고 멋쩍은 듯 턱을 매만졌다.

“잉크는 구실이거든요.”

“구실이요?”

“잉크를 고르러 가자는 약속을 잡아서, 다음 주말에도 만나자고 하기에는 딱 좋은 구실이죠.”

“아…….”

“블랙이 좋아요?”

“어……?”

카베는 이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그가 보이는 망설임으로부터 간질간질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굳이 목소리가 아니어도,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의사를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알하이탐으로서는 알기 편했기에 그런 카베를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에게도 대답할 준비는 필요하다. 기뻐하는 기색을 적당히 감추고, 지나치게 노골적이지 않은 단어를 적절히 고르는 과정을 거친 뒤, 마지막으로 그것을 말할 용기를 천천히 부어서 언어로 추출하기까지의 시간이.

펜을 쥔 두 손을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가 다시 힘을 주고서 카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역시 다른 색이 좋겠어요.”

✧✧✧

여느 휴일처럼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곁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그가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더해진 존재감을 온종일 의식해야 했다. 혼자만을 위해 준비하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더 늘려야 했다. 2인분의 식사, 2인분의 식기, 혼자 앉던 식탁 맞은편의 의자도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식사할 때 식기가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도 두 사람 몫으로 늘었다. 소리는 존재감이다. 평소에 항상 착용하고 다니던 헤드셋을 그의 가게에 있을 때만큼은 쓰지 않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카베가 움직일 때 바닥을 디디는 소리로 그가 다음에 어디쯤에서 멈출지, 커피 내릴 준비를 할 때 작게 부딪치는 도구들의 소리와 물이 원두에 스며들 때의 폭신한 소리, 서버를 조금씩 채워가는 커피의 소리로 모든 과정을 섬세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시선은 책에 고정한 채 그 기분 좋은 소리를 듣는 것이, 그러다 소리를 좇아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 누군가의 존재감 그리고 온기를 실감하는 것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이례적인 경우이다. 타인이 내는 소리는 알하이탐의 입장에서 소음에 가까우므로 불쾌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 때 나는 소리만큼은, 누군가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했다. 사고는 부드럽게 깨어나고 날카로워졌던 이성은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소리가 흘러들 때 얻을 수 있는 평정심이란 신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 끝에는 단맛이 남는다.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잔을 들어 색을 확인하고, 몇 바퀴 돌려 향을 끌어올린 뒤 목 안으로 흘려 넣는 모습을, 카베는 맞은편에 앉아서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한 잔을 따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앞에서 시음까지 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시음을 마친 잔을 내려놓고 와인 병을 들어 카베의 잔을 채우기 위해 기울인다.

묵직하게 잔 속으로 흘러드는 액체에서 과일과 홍차의 향기가 퍼졌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할까. 다소 무거운 맛을 가졌어도 향과 균형감이 훌륭한 와인이다. 달콤한 것을 항상 가까이하는 카베에게는 더 단것이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이 묵직하고 우아한 와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었다.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살짝 기울이며 카베는 알하이탐을 바라보았다. 올려다보는 눈이 한 번 크게 떠졌다가 다시 좁혀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무슨 의도인지 바로는 알아채지 못하다가, 이 분위기와 상황을 고려할 때 건배하자는 의도라는 것을 깨닫고 잔을 마주 들어 올린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당연히 해야 할 형식상의 말 같은 건 없었다. 만남을 기념한다느니 집에 초대해준 데 감사하다느니 하는 말도 없이, 그저 잔을 부딪치는 짧은 순간에 시선만이 오갔다.

말 없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다. 상대에게서도 어색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목으로 흘려 넣은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잔을 둥글게 돌리면서 그는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알하이탐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카베는 그야말로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와인에 대해 섬세한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와 같은 눈빛, 그리고 들뜬 목소리를 보아하니 정말로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와 같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말하며 술을 홀짝홀짝 잘 들이켜기에 계속 첨잔을 해주었더니, 금세 술이 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애주가인 것치고는 술이 약한 모양인데,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는 말을 건네니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이다.

식사한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쉬면서 술을 깨라고 권했다. 카베를 거실의 소파로 보내고 그릇들을 정리하다가 인기척에 돌아보니, 그는 그새 되돌아와 식사할 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와줄까요?”

“취한 사람에게 맡기면 일이 더 늘 테니 필요 없습니다.”

“그쪽 말할 때마다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잘 알죠. 그러니 얌전히 소파로 돌아가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분의 존재감만큼은 같은 공간에서 여전히 느껴졌기에 그가 식탁에 앉은 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내리깐 시선 아래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일까. 식탁 위에 올려놓은 양손에 곤란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하릴없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같이 있어봤자 별말 안 하는데. 혼자 있는 게 싫어요?”

“싫다기보단……, 그냥…….”

그가 말을 끝맺기를 기다린다. 말이 오고 가지 않아 고요해진 주방에 식기를 정리하는 소음만이 작게 울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평소 말을 잘하는 타입 같아 보여도 진짜 속내를 말할 때는 저렇게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술이 들어간 김에 쏟아내면 될 텐데.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생각하고, 그렇게 몇 번인가 목 안으로 말을 삼킨 끝에 그가 겨우 뱉어낸 말은 이러했다.

“…………가, 같이……, 있……고……, 싶어서…….”

달그락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리가 끝나, 손의 물기를 닦아내고 뒤돌아서 식탁 쪽으로 다가간다. 예상한 대로 카베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다가가는 기척을 느꼈는지 몸이 흠칫 떨리더니 시선만을 움직여 힐끔, 이쪽을 쳐다보았다.

“끝났어요. 같이 가죠.”

“아…….”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제대로 올려다보며 한숨 쉬듯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불안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아직 얼굴이 붉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속내를 내뱉어버린 끝에 부끄러움이 남았는지, 혹은 둘 다인지. 알하이탐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한 손을 카베 쪽으로 내밀었다. 머뭇머뭇 서서히 닿아 오는 손끝의 체온이 간질간질하게 스며들었다. 닿은 피부에서부터 퍼진 따뜻함에 서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손을 잡았다.

알하이탐은 분명히, 자신이 지금 웃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올려다보는 카베의 얼굴에서 망설임이나 긴장이 순식간에 걷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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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이 만나면 왜 으레 영화를 보는지, 알하이탐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접점이 한정적인 어른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영화 감상이라는 명목만큼 좋은 것은 없다. 평일 아침에만 가게로 찾아가 커피를 마시는 손님과 오너의 관계로부터, 단번에 집으로 초대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말없이 서로의 존재만을 느끼는 동안 쌓아온 교감을 구체화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영상을 본다는 명목으로 몸을 나란히 기대고 호흡과 체온을 나누는 것 같은. 그런 면에서 ‘영화 감상’은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영화를 고르고 함께 화면을 응시한다. 알하이탐으로서는 영화가 무엇이든 상관없었지만, 카베는 진지하게 고르는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장르는 무엇이냐느니, 러닝타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냐느니, 선호하는 배우가 있냐느니. 아무래도 좋은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나는 영화를 볼 목적이 아니고 관심도 없으니 당신이 골라도 된다’라고 말하자, 당황한 듯 말을 멈춘 카베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알하이탐의 말에 담겨 있는 노골적인 의도를 알아채고 쑥스러워졌는지, 카베는 한동안 열심히 영화를 고르는 척했다. 고르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 뻔히 보였기에 그를 지켜보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다. 역시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알하이탐은 생각했다.

카베는 잔잔한 가족영화를 골랐다. 좋아하는 영화이니 당신도 봐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는 옆얼굴이 진지해 보였다. 화면이 흘러가는 동안 눈을 떼지 않고 들여다보면서도 그는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었는데, 솔직히 이쪽이 더 재미있었다.

이미 두 번 이상은 봤을 텐데도 열심히 영화를 보던 그는, 역시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알하이탐의 팔과 어깨에 카베의 머리가 닿을락 말락 했다가 결국 닿아버리는 순간에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 하기를 몇 번. 이번에는 어깨에 기댄 무게가 바로 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천 너머로 밀착한 몸이 천천히,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그렇게 망설이던 그가 알하이탐에게 한껏 기댄 채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카베?”

알하이탐은 이름을 불러 카베가 깊이 잠들었는지 확인했다.

낮은 목소리를 낼 때 미세하게 울리는 몸의 진동이 전해진 듯 카베의 속눈썹이 한 번, 살짝 흔들렸으나 그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처음 온 집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잠드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를 어디에 재워야 할까. 내 침대 위에서 눈을 뜨면 놀랄까.

난생처음 해보는 고민에 잠기면서 알하이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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