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커플링

[지크프리트+하겐] 정말로 바라는 것

Fate/Apocrypha 지크프리트+하겐 논커플링 글

2020.08.20 포스타입 게재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지크프리트 생전 날조 하겐 날조 전체적으로 아무튼 날조


“너 진짜 사람 짜증나게 한다.”

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발화자는 하겐이었다.

지크프리트는 그런가, 하고는 그 말을 흘려 넘겼다. 하겐이 본래 입이 험한 편이기도 하거니와, 어쨌든지간에 걱정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사실 역시도 알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남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버릇 좀 어떻게 하라는 잔소리의 일종이다. 여기서 섣불리 사과했다가는 이유는 몰라도 하겐이 더욱 열 받아 날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득할 정도로는 진득하게 사귄 사이였다. 하겐 또한 이제는 지크프리트를 어떻게 고쳐 보겠다는 헛된 마음은 버렸다고 말한 지 오래였으므로, 따지자면 잔소리가 아니라 불평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터다.

그리고 불평이 으레 그렇듯 하겐의 말 역시도 깊은 한숨과 함께 줄줄이 이어졌다. 지크프리트는 잠자코 고개만 주억거리며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핀잔에 가까운 공격적인 언사였으나, 그래도 그가 정말로 지크프리트를 싫어하지는 않는단 것쯤은 알고 있으므로 딱히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고 혀를 차던 하겐은 또 한 번 지크프리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이젠 좀 딴 사람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나는…….”

지크프리트는 대답하다 말고 말을 흐렸다. 다른 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가는 하겐이 화를 내리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치라고는 없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이미 지크프리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 챈 모양이었다. 말없이 눈을 부라리는 하겐을 바라보며 지크프리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삼백안이 매섭게 쏘아보면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조금은 주눅이 들기 마련이다. 고개를 당기고 어깨를 움츠리자 하겐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너지만 나도 참 나다…….”

쯧, 혀를 차면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잖으면 이제는 화를 낼 가치조차 없다고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눈치가 없으니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분하지는 못하겠다고 지크프리트는 생각했다. 그저 이런 자신의 곁에 계속 함께 해주는 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으음, 하는 신음으로 얼버무리는 지크프리트를 보며 하겐이 투덜거렸다.

“정말로 없냐? 소원이든 뭐든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그러나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냉큼 그렇게 답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정말 화나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크프리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흉내를 내었다. 자신은 무엇을 바라는 걸까. 자신의 소원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어둠 속을 헤매는 듯 아무것도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지크프리트의 소원을 바라는 이상 지크프리트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소원을 떠올려야만 했다.

거짓을 고해 보았자 의미가 없다. 지크프리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하겐은 만족하지 않겠지. 그러나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소원이라면 마음에 품어도 괜찮은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쩐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듯한 죄악감마저 스멀스멀 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다. 쩔쩔매는 지크프리트를 애처롭게 여겼는지 하겐이 지크프리트를 말렸다.

“됐다, 됐어. 바로 나올 거면 내가 고생했겠냐. 하여간 꽉 막혀가지고는.”

열 받은 듯 잔뜩 찡그리고 있던 얼굴에는 이제는 애잔한 쓴웃음만이 걸려 있다. 안심한 지크프리트는 그를 따라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뭘 잘했다고 웃냐?”

어처구니없다는 듯 정색한 하겐이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 쳤다. 악룡의 피로 온몸이 뒤덮인 이래 한 번도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는 몸은 그 공격에도 역시나 솜뭉치가 닿은 듯 간지럽기만 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지크프리트는 몸을 움츠리며 사과했다.

“며, 면목 없다…….”

“당연히 그래야지.”

흥, 콧방귀를 뀌며 하겐은 지크프리트를 흘겼다. 그러나 이미 투덜거릴 마음도 가라앉은 후겠지. 억지로 언짢은 척 굴어 보았자 오래 가지는 않을 터다. 그러한 지크프리트의 예상에 걸맞게 하겐은 금세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것으로 오늘의 불평도 끝, 이라고 생각하려던 차에 하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

흘끗 바라보자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떠올린 듯, 유쾌하게 히죽거리고 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일은 흔하지 않다. 지크프리트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든 말이지, 생각나면 말하라고. 뭐든 들어줄 테니까.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냐, 네 소원도.”

살아 있는 원망기, 전설적인 용살자가 소원을 들어 달라 부탁한다면 내 주가도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농조로 말하며, 하겐은 활짝 웃어 보였다. 그 표정에서는 티끌만큼의 부정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지크프리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자신마저 양해해주고, 위해주는 친구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황송할 정도로 고마웠다. 그러므로 언젠가 이런 자신이 입에 담더라도 괜찮을 만한 소원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부탁하자고, 지크프리트는 생각했다. 그것만이 하겐을 향한 보답이 될 터였다.

˙˙˙

“……부탁이 있다. 나를 죽여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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