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 레피오드 Hera Lepiod

소원

아이의 의미 없는 대답처럼.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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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Legends of Four Dragons - Akatsuki no Yona Original Soundtracks


귓가를 멍멍하게 울리는 굉음이 쉼없이 폭발하고 천지분간 어려운 기적이 괴물과 인류 사이를 거스르며 용솟음 치는 곳. 생명과 죽음이 뒤엉키며 마지막 멱살을 잡아 틀어서야 생존을 외치는 이 전장은 언제나 매캐한 연기와 역겨운 피비린내로 이루어져 있다. 거스러미 같은 먼지가 맴도는 눈앞을 한 손으로 휘이 저어 없애고 습관이 된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갤 들었다. 분명 처음 들어왔을 무렵엔 푸른 하늘이 드넓은 황야였는데, 지금은 붉게 무르익은 노을과 피 머금은 대지로 얼룩져 하나의 별세계처럼 보였다. 아니, 보통은 지옥이라 부르던가. 건조한 여름의 황무지이자,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처럼 무수히 많은 이능력자들이 죽어가는 전장. 타고난 능력이 비루한 자는 고기 방패가 되고 드높은 자는 부를 쓸어 담는 그들만의 전쟁터, ‘게이트’. 널부러진 시신을 수습한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옮기며 붉은 방울을 뚝뚝 게워내고 있는 창을 바라본다.

숨 가쁘게 뛰어다녀서인지, 또는 사지가 도륙된 시신이 잡초처럼 굴러다녀서인지. 전신에 거센 혈류가 흐르고 손끝까지 뜨겁게 데워지는 감각을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차갑디찬 빙하 아래서 얼어버린 듯 잠잠하던 심장이 달가운 두근거림으로 깨어있음을 전했다. 살아있다고, 너도 저렇게 죽어나가는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맥박 한 번에 화사하게 퍼져나가는 온열. 머리는 따스하고 목은 메마르며 폐부 깊숙히 감도는 통증은 어떠한가. 이토록 기꺼운 고통이 또 있으랴. 생명의 단말마를 증명 삼아 살아온 삶은, 이제 다른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창대 쥔 손을 되잡으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무기를 쥔 손아귀는 피로 얼룩져 미끄러웠고 괴물의 살가죽과 대지를 수없이 가른 창날은 그 끝이 무뎌지고 있었다. 한 번은 손 보긴 해야겠군.

“헤라, 또 여운을 즐기고 있어? 슬슬 돌아갈 때야.”

팀을 맺은 동료 한 명이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뉘이며 다가왔다. 정예 기사로서는 다섯 번 이상 같은 팀으로 배정되어 안면이 퍽 익숙한 이였다. 거친 전장을 누비던 탓인지 옷이나 부츠가 하나같이 붉게 물들어, 건장하게 웃고 있는 낯이 아니었다면 필시 부상자로 보일 법했다. 천천히 호흡 고르던 입술을 지그시 다물며 고갤 끄덕였다. 함께 모여 이동하는 전략 상, 그의 말대로 슬슬 짐을 정리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할 시기였다. 아쉽게도.

“…….”

문득 건조하고 무료한 시선이 그의 피딱지 앉은 얼굴부터 괴물의 피로 얼룩진 몸, 다리를 훑어 발치로 향한다. 노골적으로 훑어내리는 시선에 당황한 이가 멋쩍은 얼굴로 의미없이 웃어 보였을까. 사내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보통 헤라 레피오드라는 이는 열 마디 건네면 한 마디 돌아오고, 그마저 통보나 다름 없는 이였으므로.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일은 원하는 게 있거나 용건이 있을 때, 딱 그 정도였다. 혹여 다른 손에 들고 온 수건이 탐이라도 났나. 곧 성큼성큼 다가온 이에게 어색한 몸짓으로 한 번 제대로 쓰지도 못한 수건을 건네려던 찰나, 돌풍 같은 바람이 어깨와 대검의 빈틈 사이로 첨예하게 스쳐갔다. 서슬퍼런 바람 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머릿속까지 왕왕 울렸을 때, 그는 뒤늦게서야 바람이 아닌 얇고 긴 창대가 그 사이를 꿰뚫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창대를 타고 흘러내리는 녹색 체액까지도. 곧 성인의 상체만 한 거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길고 얇은 다리를 바르작거리다 늘어졌다.

“…어.”

“…확인 사살. 빠짐없이 확인해.”

이런 이들이 있었다. 전투가 끝났다고 마지막에 가서 모든 의심을 떨쳐버리는 자들이. 늘 무미건조하던 눈빛에 일순 한심하단 기색이 떠오르곤 사라졌다. 굳어있는 그의 틈에서 창을 회수하자 겨우 버티고 있던 창날마저 결국 거미의 체액에 부식되어 희미하게 갈라진 게 보였다. 아무리 쓸 만한 무기를 구입해도 게이트만 몇 번 다니면 이렇듯 닳고 이 빠진 날붙이만 남았다. 그러고 보니 어떤 연구원이 무기를 험하게 쓴다고 했던가. 언젠가는 조금 더 튼튼한 무기를 만들어야겠지. 뒤에서 미리 언질이라도 하라고 투덜거리는 이를 간단히 무시하곤 포탈로 향했다. 그의 한낱 투정을 받아줄 이유는 없었기에.

포탈 쪽으로 가까워지자 기다리고 있던 다른 동료들이 물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가치 있는 건 배낭에 넣고 나머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걸 정리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마지막 남은 생수 더미까지 아낌 없이 뜯어 물세수까지 끝낸 팀장이 어서 오란 듯 손짓했다.

“여, 너희도 써. 괜히 아깝잖아. 어차피 다 놓고 갈 건데.”

닫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이트 특성상, 공략을 완료했을 경우엔 식량이나 충분히 사용한 도구 등 짐이 되는 물자는 두고 떠나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유독 절약이 생활화된 이들은… 모든 물자를 아깝지 않게 아득바득 전부 사용하고 가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보통의 경우, 팀원은 팀장의 성향을 존중하는 편이었고. 하여 저 팀장의 유난한 ‘아낌’이 끝날 때까지 대기라는 사실이다. 게이트를 들어올 만한 실력이면 이 정도는 별 가치도 없을 텐데. 뒤따라 온 동료가 다른 생수를 뜯어 손을 씻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팀장도 참…. 이럴 시간에 나가서 샤워를 하겠다.”

“웬일로 맞는 말을 하는군.”

“웬일이라니.”

오리처럼 입을 삐죽 내민 이가 콸콸 쏟아낸 플라스틱 통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렇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쓰레기가 오므라든 거미 사체 품에 정확히 안착하자 오, 하는 감탄사를 내며 웃음소릴 냈다. 그리고 턱턱 쌓아 올린 상자에 대충 기댄 그가 수건으로 물기 젖은 손을 닦았다.

“이번에도 나가면 연구소 가려고?”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누가 신경 쓴대. 궁금하니까 물어보는 거지. 거기 연구소장께서 친히 부탁하는 모습을 다 봤는데.”

…같은 말 아닌가? 느릿하게 꿈뻑거리는 시선이 그를 바라봤다가, 곧 저무는 석양으로 향했다. 쌉싸름한 바람이 느지막이 불어오자 그 아이를 처음 만났던 가을의 어느 하루가 문득 떠올라 비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작 동료는 별 걸 다 본다는 듯 한쪽 눈썹을 밀어올리며 더 말해보란 듯 한쪽 팔꿈치로 제 옆구리를 툭 밀었다. 도로 그를 푹 밀어버렸지만.

“아야…. 그 애가 마음에 들어?”

“…엄살은. 그래, 마음에 들어. 말이 잘 통하고, 가르치는 보람이 있거든.”

그날, 처음 만나던 날에 느꼈던 일종의 동질감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거친 사포로 갈고 또 갈아내듯 그리 희미하면서도 확실하게 남아버린 감정은 잔잔한 물결 같아서, 고요히 순환하는 바닷물처럼 깊은 심해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그러다 문득 멍하니 입술이 벌어지며 작은 숨소리를 흩어낸다. ‘보람’이라니. 자신이 그런 단어를 사용할 줄 알던 이던가. 낯선 감각이 밀려와 답지 않은 얼굴로 어리숙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 지었던 뺨을 넌지시 문질러 보기도 하고.

“…되게 마음에 드나 보네. 너, 지금 네 표정 모르지?”

몇 년간 그의 곁을 지키던 동료는 끝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헤라는 언제나 이겨요.”

사각형의 방. 어린아이를 위한 벽지와 인형, 빼곡한 책장과 화사한 색감의 이불로 채워진 이곳은 연구소 내부의 한 침실이었다. 오직 한 아이를 위해 꾸며진 침실 중앙엔 두 명이 앉을 만한 원형 테이블이 있었고 그 중 한 의자는 이따금 아이를 만나러 찾아오는 한 사내의 것이었다. 헤라 레피오드, 그 사내는 어느덧 몇 번째 만남을 이어가는 분홍빛 아이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가볍게 대꾸했다.

“언제나 네가 지는 거지. 크면 이길 수 있을 거야.”

테이블에 가볍게 상체를 기대어 턱을 괴곤 미소 지었다. 둥근 테이블 위는 고급스러운 체스 말과 체스판이 펼쳐져 있었고, 승패는 어느 정도 갈라진 무렵이었다. 아이의 고민 어린 얼굴과 달리 여유로운 손짓이 마지막 말을 움직여 백색 ‘킹’ 앞에 내려놓았다. 이로써 벌써 세 번째 게임조차 제 것으로 끝났으며 이는 누구나 예상한 결과였다. 하긴, 어린아이를 상대로 진다는 것도 퍽 웃긴 일이긴 할 테다. 눈앞의 아이, 이미르는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패배에도 상심한 기색도 없이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체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무던한 아이는 언제나 그러했다. 당장의 결과에 마음이 흔들리기보다 머리로 이해했고, 눈앞의 패인을 찾으려 했다. 아이는 바닥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살랑거리며 전쟁이 끝난 체스판 위를 바라보다가, 곧 특유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시선을 부딪혀왔다.

“이길 때까지 해주시겠다고 했죠?”

“그래, 이기면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도 했지.”

…그제서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한쪽 눈매를 비죽 올렸다. 그간 수식을 가르친다든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든지. 혹은 퍼즐을 푼다든지. 아이와 처음 대면하고 가이딩을 베풀어주며 한 일은 많았다. 그런데 최근엔 특히 체스판만 꺼내들어서 무슨 바람인가 했더니. 지나가듯이 한 이야기가 이미르의 흥미를 끌었던 걸까. 메말라 있던 입매가 비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습관처럼 비틀려 올라간다.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서 그리 안달일까.”

“소원…….”

조막만한 입술을 우물거린 아이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리 중얼거린 아이의 대답엔 큰 의미 따위 없을 터였다. 이 아이와 동질감을 느낀 부분은 이런 면모였으므로. 주관은 미지에 가깝고 욕망은 모호하기만 하다. 가만 턱을 괸 채 아이의 모습을 지그시 시야에 담아본다. 긴 속눈썹,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저보다 훨씬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동료가 얄궂은 얼굴로 장난 치던 말과 달리 아이를 향한 감상은 특출나지 않았다. 심장은 잔잔하고 호흡 또한 고르다. 그렇게나 추구하던 ‘살아있다’는 감각은 지금,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역시 이 또한 잠깐의 유희 정도로 끝나려나. 나지막하고 희미한 웃음이 한숨처럼 토막토막 샌다. 그래, 나도 내 소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고작 십 년 겨우 넘겨 산 아이가 무얼 알겠나.

“언젠가 유심히 고민해서 들려줘.”

체크메이트를 했던 체스말을 뒤로 물리며 나이트 앞에 먹히도록 내어준다. 이로써 판은 다시금 아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느 면으로 보나 승패를 아이의 손에 쥐여 준 셈이었다. 처음부터 이 게임에 있어 승리는 별 의미 없었다. 아이의 의미 없는 대답처럼. 그저 가치 없는 전쟁을 치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를 잡음으로서 이 행위 자체에 여흥이 있다고 여길 뿐. 그리고 나는 아이에게 그 깃발을 건넨 것이나 다름 없다.

“네 소원을.”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조금은 미래를 기다려봐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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