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만남
실로 별 상관 없는 문제였다.
Lanterns - Hushed
녹음이 어스러지고 황량한 하늘, 갈까마귀 우는 계절이 덥썩 다가왔다. 선선한 바람이 무딘 날처럼 뺨을 훑으며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발 아래서 비산하는 시기. 흙은 추위에 메마르고 산짐승은 굴 속으로 머릴 밀어넣는 이 계절, 알맞지 않은 밤색 코트와 환한 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목 끊어진 이파리가 즐비한 흙길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걷던 사내는 무던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흰 포말에 감겨든 햇살처럼 따스하고 찬연한 색감의 눈동자. 그럼에도 그가 내비치는 온도란 그보다 낮은 해저 틈, 깊고 은밀하기 짝이 없는 밑바닥의 것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거칠게 갈라진 나무 숲 사이를 둘러보던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이 근처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코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지난 문자 내역을 훑었다. 핑그르르 내려가는 스크롤과 가장 하단에 위치한 주소지. 한 연구소의 이름이 붙은 주소지는 분명 한적한 지역에 우뚝 솟아 있을 게 분명했다.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물끄럼 흰 화면을 유리알처럼 담아내다 곧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고작 일주일 전, 막 게이트 정리를 끝내고 길드로 복귀했을 무렵. 막 스러져가는 게이트 앞에서 구경꾼을 통제하던 경찰과 무기를 챙기는 신인류 사이, 눈에 띄는 흰 가운을 걸친 채 가만히 서 있는 연구원이 있었다. 그는 게이트 안쪽에서 묻은 거스러미를 닦던 내게 다가왔고, 내내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으며 동시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흰 가운 안쪽에서 웬 사진 한 창을 꺼내 건넸다. 작고 왜소한 어린아이를 옆에서 찍은 사진.
‘부탁합니다. 이런 걸 부탁할 만한 사람이… 지금으로선 당신밖에 없어요.’
무심한 시선이 그의 시선, 읊조리는 입술, 주름이 지도록 앙 다문 턱을 훑어내려 목에 건 사원증으로 내려갔다. ‘베스틀라 푸르케리마’. 그는 언뜻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주인 없는 사진을 내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자세히 보란 듯 조금 더 내밀어 보이며 당당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런 호의도, 거부감도 없는 시선이 사진 안에 머물렀다. 사진은 초점이 엉망이었고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 속 아이가 곱슬진 분홍빛 머리칼을 갖고 있단 사실 만큼은 알 수 있었다. 흐음, 습관 같은 소리를 넌지시 흘리며 눈앞의 이를 훑었다. 급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긴 한다지만, 상식적으로 그는 상사나 다름 없었다. 상당히 귀찮고 이득이라곤 없는 부탁이었으나 미래에 대한 투자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여 그 갑작스럽고 귀찮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오늘, 연구소를 찾아온 참이었다.
“보이는군.”
경사진 땅 위로 우뚝 솟은 연구소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큰데. 여상한 생각이나 중얼거리며 손목 시계를 바라보면 약속했던 정시에 정확히 도착한 참이었다. 은판에 영문으로 양각된 이름과 큼지막한 철제 대문. 제로 그래비티와 오랜 연을 이어온 연구소는 건물만으로도 연식이 있어 보였다. ―삑, 인터폰의 버튼을 누르자 몇 초 지나지 않아 큰 대문이 짧은 전자음을 내며 벌어져 내부를 드러냈다. 도착한 손님을 안내하듯 정갈하게 정리되어 입구까지 쭉 이어진 길목.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푸른 나뭇잎이 살랑거렸을 길은 이제 가을에 접어들어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흙먼지 묻은 구두가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어 들어가자 문이 직전과 비슷한 전자음을 내며 닫혔다.
고작 가이딩을 부탁하려고 이런 곳까지 부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 안 맞는다. 머릿속 저울이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던 그때,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구소 문이 열렸다. 흰 가운에 안경 쓴 사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처음 보는 얼굴. 사원증에 ‘케일럽 베이’, ‘연구 1팀’이라고 적힌 그는 입가의 초콜릿을 묻힌 채 다가와 한 손을 내밀었으나, 그 꼴을 본 이후라. 그의 얼굴과 손바닥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곤 악수 대신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헤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가이딩 부탁을 받고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머쓱한 얼굴로 빈 손을 가운에 닦은 그는 먼저 등을 돌려 연구소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세미나실부터 분석실, 제작실, 연구실…. 그를 따라 얼마나 들어갔을까. 희고 흰 연구소 복도를 어지간히 돌아다니고서야 ‘격리실’이라 적힌 명패 앞에 섰을 때, 그는 마뜩잖은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어린애한테 미안하지만 능력이 능력이라서요. 헤라와 하는 건 실험적인 가이딩이니… 일단 격리실에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숱하게 본 연구소 문짝처럼 평범해 보이는 문은 ‘사용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착한 아이예요.’ 작게 중얼거린 그에게 무심하게 고갤 끄덕였다. 실로 별 상관 없는 문제였다. 착하든 악하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이를 따라 들어서자 그가 상냥하게 탈바꿈한 목소리로 한 아이를 불렀다. 각진 사각형 방에 간이 침대 한 개와 인형 몇 개 얹은 게 전부인 내부는 바깥 숲처럼 황량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넌지시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 또한.
“이미르~ 가이드 분이 오셨어.”
“네.”
앳된 목소리는 가지런했고 단정했다. 이제 열 살 정도는 됐으려나. 게이트 앞에서 울먹거리거나 자신감 있게 소리치거나 하던 그의 또래 아이와는 영 다른 반응. 마주친 아이의 눈동자는 반짝인다기보다, ‘반들거린다’고 표현하기 알맞았다. 이유 모를 동질감. 미미하게 흔들린 심상의 바다가 이윽고 바위 앞에 스러진다. 그럼에도 심상에 맺히는 감정이란 이다지도 고요하다. 무릎에 책을 펼치고 있던 아이가 사뿐히 침대에서 내려와 다가온다. 폭신한 슬리퍼 밑면이 쓸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사진으로 본 옆모습, 그보다 더욱 확실한 윤곽과 존재감으로 선뜻 다가온 아이는 화사한 색을 가진 이였다. 케일럽이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아이의 어깨에 한 손을 가볍게 얹었다.
“이미르 로렐라이 푸르케리마. 우린 미르라고 불러요.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이… 아니, 이미르의 무덤덤한 얼굴을 내려다 본다. ‘푸르케리마’… 이제 유독 강경하게 부탁하던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매가 조금 닮은 듯하기도 하고. 코트를 뒤로 정리해 넘기곤 무릎을 굽혀 앉는다. 그리 비슷한 눈높이에서 마주한다. 얼마 전 ‘아이를 대하는 법’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추고 살갑게 대하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갔을 때, 부드러이 입매를 올려 웃어 보이곤 한 손을 내밀었다. 몇 번이면 이 귀찮은 부탁도 끝나리라.
“안녕. 헤라 레피오드라고 해.”
이 묘한 아이와의 만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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