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 레피오드 Hera Lepiod

신화 AU - 02.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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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Mrest - 몽상[夢想]


유스티티아의 신전. 검을 닮은 기둥이 우후죽순 솟아 각을 이루며 사시사철 불꽃 머금은 천칭이 활활 불타올라 정의를 되새기는 신의 거처. 그 성스러운 장소로 부산스럽게 달려들어온 불청객은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리만치 서성거리고 있었다. 왼쪽으로 돌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넓적한 발등과 팽팽한 승모근, 묵직한 골격에 두꺼운 사슬 갑옷으로 중무장한 이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그 무게를 증명하듯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그 울림을 계단 중반까지 내려와서 체감한 스베르드는 그의 주인이 앓은 두통이 저 요툰의 발구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이내 기민한 감각으로 스베르드의 인기척을 알아챈 요툰은 그제서 자리에 꼿꼿이 서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얼굴의 반절 이상을 가리던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낀 채 인사를 건넸다.

“서신은 어찌, 잘 받으셨나.”

“…… 앓아누우셨다.”

“이런. 그럴 의도는 없었단 사실만 알아주게나.”

그들의 뜻이 어찌나 잘 전달되었는지 모를 리 없는 대답이었음에도 자신을 ‘흐림’이라 소개한 요툰은 껄껄 웃어넘겼다. 그 깐깐하다는 유스티티아의 검, 스베르드에게서 거절의 대답이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상당히 기꺼운 모양이었다. 아무렴, 괜히 막대한 자원을 들여 수문장인 헤임달의 눈을 가린 게 아니었으므로. 원초에 가까워진 정의의 신, 유스티티아의 가호 아래 요툰의 왕은 제대로 자라날 테다. 머릿속에 요툰의 평화로운 미래를 그린 흐림은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악수를 건넸고 스베르드는 제 앞에 내밀어진 쇠 장갑과 묘한 비린내가 풍기는 사내를 곁눈질하곤 고갤 돌렸다. 이번 만큼은 완곡한 거절 의사 앞에서 뻘쭘해진 흐림은 아무것도 없는 갑옷에 빈 손을 닦곤 팔을 내렸다.

“거, 손님을 너무 홀대하는 것 아닌가.”

“요툰의 일은 요툰이 해결해야 할 일. 어찌 아스 신족이 나선단 말이냐.”

스베르드의 뾰족하게 날선 물음에 흐림은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유라도 제대로 해명하라는 강력한 표명 앞에 달리 변명이 있겠나. 흐림은 옆구리에 낀 투구를 다시 쓰고서 허리춤에서 작은 천에 겹겹이 둘러 싼 보석 한 개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주변을 휙휙 살피고 어깨를 옹송그리는데, 산 같은 덩치가 참 우습기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보석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은은한 빛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보랏빛이었다가, 산짐승 혓바닥 같은 붉은빛으로. 오묘하고도 불길한 색을 머금은 보석은 이윽고 그 흉한 기운으로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땅거미를 잠식하는 밤처럼 어두웠으며 늪지 깊은 곳의 물안개처럼 습했고 또 아주 느릿해서…. 스베르드는 그만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퍼뜩 고갤 들었다.

누군가 등 뒤를 꽉 잡고 목덜미를 누르는 듯한 착각. 소금기 마른 자갈보다 거칠고 깨진 바위 틈을 벌리듯 불안하기만 한 그 기운은… 길고 긴 아스가르드의 역사에도 몇 본 적 없는 행위를 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한 스베르드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요툰에게 주먹을 날렸으나 쉽게 저지되고 말았는데, 가로막힌 분노에 부들거리는 팔과 목덜미까지 돋은 혈관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결국 이를 아득, 깨문 스베르드가 먼저 팔을 내리고 나서야 흐림은 한숨을 푹 내쉬며 힘을 풀었다.

“…네놈, 다 깨어나지도 않은 자를…!”

“부디 진정하시게. …서둘러서 그만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네. 그런데 아무리 보살펴도 도통 갈무리되지 않아. 이 천도 철의 숲에서 특별히 제작한 물건이지만… 이렇게 진정시키는 게 전부일세.”

침음을 삼킨 흐림은 펼쳤던 천으로 다시 보석 아니, ‘혼돈’의 핵을 감쌌다. 그러자 암약하듯 도사리던 기운 또한 어스름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그럼에도 한 번 기지개를 켠 핵은 자신을 덮은 천 안에서도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덜 자란 아이의 탯줄을 끊는 것과 다름 없는 짓을 한 후손을 나무라듯이. 그는 진실을 확인한 스베르드의 기색을 내심 걱정하며 긴 해명을 늘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스베르드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이 애꿎은 치아만 까득까득 짓깨물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이제 와서 거절할까 싶어 초조해진 흐림이 두 손을 휘휘 저어대며 변명을 쏟아냈다.

“어쩔 수 없었네. 이대로 두면… 정말 왕의 자리가 사라지고 말아. 더불어 아예 깨어나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다 여물지도 않은 핵을 가져와…!”

“아니, 아니야. 이미 다 만들어진 걸 확인했네. 그저 갈무리만 잘 하면 되겠다 싶어서 그런 게야.”

“그리고 실패했지.”

스베르드의 날카로운 결론에 입술에 바느질이라도 박은 듯 침묵한 흐림은 그들의 ‘왕’을 두 손 안에 꼭 붙들었다. 그것 만큼은 달리 변명이 없었는지 앓는 소릴 삼킨 그는 고개를 푹 숙였으나 투구 속, 덥수룩한 얼굴에선 결연한 기색이 도드라졌다. 흐림은 손 안에서도 마디 사이를 벌리며 그 불길한 빛을 뿜어내는 핵을 그대로 스베르드에게 내밀었다.

“이런 험한 기운을 누르고 잘 길러내기 위해선 그분의 도움이 절실하네. 원초에 가까운 힘 말일세.”

“유스티티아 님은, …하아. 헤라 님은… 너희를 위해 그 힘을 기르신 게 아니야.”

결국 제 이마를 붙든 스베르드가 깊고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근 주인이 위그드라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는데, 과연 이마를 짚고 앓아 누울 만한 일이었다. 어쩐지, 휴식에 들고 가장 먼저 요툰헤임 일에서 손을 떼시더니. 이미 유추하고 계셨나. 스베르드는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눈앞에 마주한 요툰을 바라봤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의 결심을 엿본 탓이었다. 또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자마저 그의 주인이 유일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요툰헤임은 운이 좋았고, 그의 주인은 운이 나빴을 뿐이라 표현할 수 있으리라. 흐림은 그의 비위를 맞춰주듯 고갤 주억거리며 다시금 그에게 내민 핵을 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알지. 알다마다. 그분의 마지막 휴식을 방해한 건… 내 직접 무릎 꿇고 사죄드리겠네. 이 은혜는 다음 대 신에게 곱절로 돌려드릴 테니….”

“그럴 필요 없어.”

그렇게 어수선하게 쏟아내던 흐림의 변명을 칼처럼 끊어낸 건 스베르드의 분노나 암담한 질책이 아닌, 고조없이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세상을 등진 바다처럼, 한 길로 흐르는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 신전의 모든 불길이 그를 맞이하듯 흔들리고 차갑기만 하던 석조 홀 가운데로 돌연 따스한 바람길이 훑고 지나간다. 스베르드는 그의 머리칼이 선선하게 흩어지는 것을 느끼곤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나오셨군.’ 하긴, 순식간에 화한 핵의 기운이 흉흉했던 것과 별개로, 모를 수 없었으리라. 특히나 불타는 천칭이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의 거처에서, 신의 시선을 가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스베르드는 하염없이 앓기만 할 것 같던 주인이 다가오자 금세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도리어 좀 늦은 감이 있는데.

‘…귀찮으셨군.’

스베르드는 한 마디로 그의 행차를 정의했다. 태평하게 속으로 중얼거리는 스베르드와 달리 흐림은 마침내 마주한 신 앞에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투구를 벗고 인사를 건네기엔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핵을 내밀고 있는 손이 무색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렇다기보다. 흐림은 일반적인 아스가르드의 복식을 입은 스베르드나 요툰처럼 무두질한 가죽과 쇠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신을 눈으로 훑었다.

부슬부슬한 흰 천을 가는 몸에 여러 겹으로 둘러 금 장식으로 고정하고, 환한 금발을 월계수 잎처럼 엮어 정리한 그는 그리 사치스러운 치장이 아니었음에도 화려한 태가 났다. 훤히 드러난 어깨는 어떤가. 영광스러운 요툰과 비교하면 ‘약한 무리’에 속할 것 같은 외모였음에도 흐림은 도무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눈동자를 옮겨 핵을 내민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봤다. 다섯 손가락을 쫙 뻗어 스베르드에게 내밀고 있던 손은, 주인을 맞이하느라 눈앞에서 사라진 이를 두고 그대로 굳은 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심해를 유영하듯 가벼운 몸짓으로 순식간에 다가온 기척은 작고 불온한 핵을 고작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걸음이, 그의 발이 땅에 닿았나? 아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너희는 늘 흥미로운 짓을 하는구나.”

“…정의의 신을 뵙습니다.”

흐림의 굳은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은 ‘신’, 헤라는 손 안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여러 방면으로 훑어보며 흐음, 여유로운 소릴 내뱉었다. 여태 핵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던 자신의 손에선 성난 말벌처럼 날뛰던 기운이 유스티티아의 손아귀에선 이리도 얌전하다니. 흐림은 쓰린 속을 애써 다독이며 손 안의 핵이 사라지고서야 투구를 벗고 인사를 건넸다. 숙인 고개, 덥수룩한 턱수염 아래 묻힌 입매가 꽉 다물렸다. 가벼운 차림새와 달리 거북하리만치 거대한 존재감이 그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과연. 혹시라도 아스가르드에 들어서면 절대로 그들의 신전에 들어가지 말라 이르는 게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만들어진 거처에서 그의 측근을 대하는 것과 주인을 대하는 건, 강철목과 묘목을 두고 비교하는 일과 같았다. 유스티티아, 헤라가 두 손 사이에 핵을 띄우곤 탐탁지 않은 어투로 그를 불렀다.

“흐림이라 했나. 이전에는 어린 요툰이 흘러 들어오더니, 이번엔 ‘혼돈’의 핵이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원래라면 이리 높여 대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과거엔 전쟁을 치르고 지금은 협정을 통해 서로 교류하고 있다지만, 엄연히 요툰과 아스 신족은 서로의 세계가 별개인 존재였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림은 지금, 스스로를 낮추며 헤라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그의 측근인 스베르드에게 했듯이. 그제서 각고의 노력을 하는 그의 얼굴을 흘긋, 바라본 헤라는 혀 차는 소릴 내곤 고갤 돌렸다.

‘어린 요툰.’ 분명 요툰헤임의 눈모래 폭풍이 열 번 몰아쳤을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렷다. 흐림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인 그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고작 이십 해 정도 지났을 어린 요툰이 어떻게 비프로스트를 건너 유스티티아의 신전까지 왔느냔 말이다.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아스가르드의 자작극이라 외쳤고 누군가는 그저 불가피한 우연이었다고 손사래 쳤다. 모두가 검지를 입술에 얹고 눈을 감추며 묻은 사건이 당사자 앞에서 보란듯이 언급되자 흐림은 더욱 침묵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헤임달의 눈을 피해 기어들어온 노력이 가상하여 눈 감아주겠지만, 두 번은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이건, 더 이상 이번 사건으로 책망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었다. 이미 위그드라실의 주민 모두가 내심 깨닫고 있듯, 요툰헤임의 뿌리라 여겨지는 ‘혼돈’의 핵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이상… 그 파장은 요툰헤임의 과실만 썩어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진 않으리라. 그건 적어도 아스가르드의 사전에서 정의가 아니었고, 소멸 직전에 이르러 원초 관념에 가까워진 신은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공중에서 홀로 반짝이며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된 ‘혼돈’의 핵을 지그시 바라보던 헤라는 천도, 무엇도 없는 맨손으로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핵은 그의 손길에 잘 세공된 보석처럼 유순하게 감겨들었다.

“…어느 정도 회복되면 이쪽에서 정식으로 부르지. 가 봐.”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스티티아.”

옆구리에 낀 투구를 다시 덮어 쓴 흐림은 간단히 목례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그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 그리고 옆에서 넌지시 상황을 주시하던 스베르드에게 들고 있던 천을 건넸다.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나.” 의아한 눈빛을 한 스베르드가 천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는 미련없이 쇳소리를 잘그락거리며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스베르드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나풀거리는 천을 내려다 봤다. 진주를 잘게 부숴 뿌린 듯이 보랏빛으로 반짝거리는 천은 희미하게 시린 느낌이 났다. 어깨를 으쓱거린 스베르드가 천을 곱게 접어 품에 챙기곤, 헤라에게 다가갔다.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부수는 것도 아니고 회복이라니…. 저희가 뭐, 등짝에 마을 하나 키우는 요르문간드도 아니고.”

“당장 회복은 어려워도 진정시키는 건 가능해.”

“저는 물론 믿습니다만, 하아…. 또 일감이….”

“…… 잠깐. 조용히.”

투덜거리는 스베르드를 한 손으로 일축하곤 정리하던 그때, 문득 점차 가라앉는 듯했던 기운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직전 흐림의 손아귀에서 터져나왔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흉흉한 기운이 날붙이처럼 비죽거리며 솟아났다. 틈과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오듯 부양한 핵이 원대한 폭풍처럼 스스로를 검붉은 바람으로 휩쓸었고 이윽고 불길한 기운을 터뜨리며 신전을 밝히던 화로까지 뒤흔들었다. 살갗이 따끔거리고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치 시린 한기. 요툰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서리를 베어 온 듯 그리도 지독한 한기가 신전 곳곳에 스며들었고 스베르드는 그의 주인 앞에 나서 가로막으며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쥔 천이 과연 도움이 될까.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헤라 님…!”

“…괜찮아. 제대로 봐.”

그의 걱정과 달리 헤라는 초반, 당황했던 낯과 달리 무던한 표정으로 핵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게 주인의 기색을 알아차린 스베르드는 그제서 핵을 제대로 살폈다. ‘혼돈’의 핵은 분명 막 갈아낸 무구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오히려 핵은… 스스로의 힘을 좀먹고 있었다. 응축하고, 또 응축시켜서. 마치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것처럼. 기운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 범위는 좁고 작아졌다. 꾹꾹 눌러 담아 마침내 단 하나의 구슬이 되었을 때.

“…이게 뭡니까.”

“뭐겠어.”

스베르드는 좀처럼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는 그의 주인이 적잖게 야속했지만, 얼마만에 애송이 취급 받는 건가 싶어 어벙한 기분도 들었다. 그의 어깨를 슬며시 밀어 비켜 서게 한 헤라는 단 하나의 구슬이 된 핵을 품에 안듯이 팔을 벌려 내밀었다. 아무리 만사에 평이한 이라고 하지만 저렇게나 무방비해서 괜찮나, 싶을 그때. 거센 기운이 감돌았던 구슬이… 퐁실.

“‘혼돈’… 아니, 이제는 ‘이미르’라고 불러야겠지.”

“…저게요?”

흡사 옥수수를 구운 것처럼 퐁, 하고 튀어오른 구름 같은 게 헤라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그건… 여러 색을 아무렇게나 엮은 실뭉치 같기도 했고 난잡하게 뭉친 털공 같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손쉽게 깨달았다. 훤히 드러난 핵, 움직일 수 있는 ‘형상’. 그건 아스 신족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형태였다.

“세상에, 원초의 형태로 돌봐야 한다고요?”

“좀 성가시겠어.”

이 상태에서 말을 가르쳐도 되는 겁니까? 스베르드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의문을 미처 내뱉지도 못한 채 그저 흥미로운 듯이 퐁실거리는 솜뭉치를 안고 걸어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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