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 레피오드 Hera Lepiod

신화 AU - 01.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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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YOONHAN - Flying Freedom


세계를 품은 나무, 위그드라실. 무수한 은하를 담은 나뭇잎이 줄기마다 은하수를 나르며 찬란히 빛나는 하늘. 광활한 생명력과 광대한 세계가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를 지나 저마다 맺힌 별로 스며들어간다. 그 과정은 새벽 바람처럼 선선하며 밤 달무리처럼 고요하니 갈 곳 잃은 영혼이라도 충분히 편안하리라. 보이지 않는 바람길을 따라 뿌리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나뭇잎으로 마땅히 제 역할을 찾아 순환하는 생명이란 이다지도 단순하며 아름다운 법이라. 밤의 향기가 짙게 묻어난 아스가르드의 중앙, ‘하늘’이라 불리는 열매와 나뭇잎의 향연을 바라보며 이제는 자신 또한 저 기나긴 여정에 함께하리란 사실을 되새긴다. 길고도 긴 여생이었다. 천칭을 든 신이자 아스가르드의 어엿한 신으로서 지난했던 삶. 이제는 ‘유스티티아’의 대를 물려주고 위그드라실의 위대한 품에서 여백으로 되돌아갈, ‘마지막 휴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라 님. 기뻐 보이십니다.”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나.”

낯익은 인기척과 목소리. 테라스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흰 옷의 주름을 가벼이 툭툭, 쳐서 편다. 불만스러운 소릴 내며 부른 이는 애꿎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하긴, 그는 ‘마지막 휴식’, 즉 소멸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을 대신하여 가장 시달리고 있을 테다. 정의의 신이라는 소속 탓에 무엇보다 공정을 요하는 일에 최우선으로 불려나가고 있을 테니 그의 불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소멸 이후에 남을 그의 몫이다. 밤바람의 내음을 물씬 머금어 한기에 젖은 손길이 다시금 테라스 난간을 부드러이 훑었다. 시선은 여전히 울퉁불퉁한 가지와 이파리로 그득한 하늘을 품고 있었고 그 끝은 거대한 가지의 오른쪽, 늘 극지의 별처럼 빛나던 푸른 열매에 꽂혀있었다. 그건 얼마 전부터 차츰 색채를 잃어가던 세계, 요툰헤임이었다. 주인의 낌새를 알아챈 이는 고개를 한층 무겁게 숙였다.

“최근 요툰헤임에서 거인끼리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정확하진 않습니다. 아스가르드에 중재 요청을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요툰의 아이가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데, 섣불리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요툰헤임의 주민인 ‘거인족’은 자존심이 높은 이들이다. 저들만의 문화를 중요시하며 적어도 전투로는 발군이라 손 꼽히는 이들. 그런 이들에게도 왕조가 하나 있어, 요툰헤임의 거인들은 단 하나의 왕이자 신을 위해 평생을 살아간다 하여도 손색 없는 표현이었다. 다만… 최근 몇 백년간 새로운 왕이 태어나지 않아 골머리를 앓는 게 지금의 요툰헤임이었다. 몇 해 전에 ‘혼돈’의 씨앗이 겨우 맺혀 축제까지 벌였다는데, 도통 영글지 못해 또다시 후계 문제가 불거지는 모양이다. 본래 시리고 찬란한 푸른빛을 자아내던 별은 이제 곳곳에 핀 멍울처럼 붉은기가 어려있었다.

“어떻게 되더라도 내가 위그드라실 안에서 잠든 이후겠지만.”

“과연… 상관 없는 건 관심도 없으시군요. 칼 같으십니다, 헤라 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손뼉을 짝짝 치던 비서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 한 개를 꺼내 들었다. 뻣뻣하고 두꺼운 질감에 거친 무늬가 새겨진 양피지는 유려한 미를 중시하는 아스가르드의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무난하게 넓은 테이블 하나를 가로로 두고 봉인한 인장을 툭툭 건드렸다. 역시나 팔랑거리는 소리보단 바스락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파랗게 염색한 끈, 한기가 느껴지는 재질. 발신지는 로키의 허풍 만큼이나 뻔했다.

“요툰헤임의 서신이군.”

“유스티티아인 헤라 님께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전서와 함께 왔습니다.”

“…… 그 자존심 높은 요툰이 말이지.”

보통의 경우, 소멸을 준비하는 신에겐 마지막 여유를 즐길 시간이 주어지는 법이었다. 하여 제게 연락하기보다 비서인 그에게 일을 떠맡기는 빈도가 유독 늘어난 게 아닌가. 즉, 무례를 무릅쓰고 보낸 서신이란 뜻이렷다. 소문 내길 좋아하는 로키와 쓸데없이 눈치 좋은 헤임달 몰래 전달한 걸 보면 어지간히 비밀스럽게 진행하고 싶었나보군. 어쩌면 그들의 내분은 이미 시작되었을 지도 모르겠단 의심이 가슴 한 편에 피어났으나, 이 또한 소멸 이후의 일이 될 테니 제 몫은 아닐 터였다.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요툰헤임의 문장이 찍힌 끈을 풀어내곤 짧은 글로 적힌 양피지를 찬찬히 훑어내렸다. 그리고, 고급스럽던 양피지는 곧 웬 검에 꽂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

“무슨 내용이길래 웬일로… 짜증이 나셨습니까.”

제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힌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린 그는 짧고도 묵직한 부탁이 적힌 내용을 읽고서 그만 탄식하고 말았다. 그리도 영면한다고 며칠 내내 기분 좋던 주인이었는데. 그런 탄식과 달리 속이 시원한 기분이 든 비서는 몇 번의 헛기침과 함께 제 주인의 상징물 중 하나인 검을 쏙 빼내 정리하곤 찢긴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그는 잠시 어지러워진 듯 이마를 짚은 주인을 곁눈질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비록 양피지 대신 속이 뻥 뚫린 듯 좋아진 그였지만 더 이상의 일감은 사양이었다.

“다른 요툰 몰래 ‘혼돈’을 키워달라니. 양아치들 아닙니까? 아니, 애당초 언제 태어난 건지. 거절하죠.”

“…아니. 충분한 명분이 있고 그 방향이 옳다는 사실이 명백한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오, 이런. 유스티티아인 헤라 님께 보낸 이유를 알겠군요.”

한 영역의 신은 소멸의 때가 다가올수록 그 본질이 짙어지므로, 제 관할과 관련된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토르가 군신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유스티티아 또한 정의라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여 요툰헤임을 유지하기 위한 ‘공익’의 입장에서 선택을 강요할 때, 소멸 시기가 다가온 정의의 신이란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먹잇감이자 신뢰할 만한 상대로 비쳤을 테다. …이건, 완전히 당했군. 양피지는 온갖 금은보화니 무구니 받치겠단 식으로 절절 기다시피 적었으나, 그조차 이미 헤라가 수락할 것을 전제로 깐 내용이었다. 양피지가 아니었다면 휴식이나 취하고 있었을 제 주인을 안쓰러이 바라본 이는 가운데가 숭숭 뚫린 양피지를 가슴에 푹 숨겨넣고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주인은 지끈거리는 머릴 부여잡고 한숨이나 푹 내쉬고 있었으나.

“쉬십시오, 헤라 님.”

그는 까만 밤이 내려앉은 바깥을 흘긋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이미 한 요툰의 인기척이 저택 대문을 지나고 있단 사실은 나중에 알려드리는 편이 나으리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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