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0. 유스티스를 위하여

WAVE PAPER by 波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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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예카테린부르크 근처를 지날 적에 들은 말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문장을 곱씹으면 누가 해 준 말인지는 기억나지도 않았지만, 그 상황만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낮은 목소리, 러시아어, 낮인데도 어두운 하늘, 추적추적 날리는 눈발. 하여튼, 언젠가 유진이 지금보다 어릴 적에, 한 러시아 출신 방랑자가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사람은 육지에서 땅 멀미를 한다. 신기하지?

 

 야쿠츠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타슈켄트까지 내려갔다 다시 예카테린부르크로. 대륙을 가로질러 수천 킬로미터를 움직였으나 그건 전부 땅에 발붙인 채였다. 파도가 어떻게 치는지, 배는 어떻게 흔들리는지 알지 못했다. 땅에서 자란 아이에게 그의 말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유진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신기해요! 그런데 왜요?

 

 그 사람들은 흔들리는 갑판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흔들리지 않는 땅이 오히려 어색한 거야.

 왜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거든. 가까이 있는 것을, 그리고 자주 보는 것을 기준점으로 삼아 버리니까. 그리고 그 기준점 바깥에 놓인 것을 어색하게 여기니까.

 왜요?

 그것까진 아저씨도 모르겠다.

 

 두꺼운 손으로 수염을 북북 긁다가 다시 덥수룩한 제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내린 감각이 선연했다. 그 뒤에 제가 아저씨 손은 지저분해서 싫다며 까르르 웃은 것도.

 

 여전히 사람이 왜 기준점 바깥에 놓인 것을 어색하게 여기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뱃사람의 땅 멀미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유진은 매사 굴곡진 길을 걸어온 탓에 삶이 평탄해지는 순간 멀미하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는 삶은 어딘가 불편했다. 눈에 보이는 위기가 없으면 속이 메스껍고 토기가 치밀었다. 무언가 잘못된 기분. 뱃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 거야.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딛고 선 땅이 흔들리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해 잠이 오지 않았겠지.

 

 “그게 네가 난폭 운전을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니까, 유진.”

 

 연식이 오래된 지프가 큰 돌멩이를 밟았는지 사정없이 덜컹거렸다. 옆에서 들려오는 아이쿠, 소리에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대를 잡은 유진은 씩 웃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던 발을 뗐다. 어째서인지 차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차체가 붕 뜨는 순간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두 몸뚱이도 같이 들썩였고, 몸보다 차가 먼저 내려온 탓에 두 사람 모두 자동차 천장에 정수리를 부딪쳤다.

 

 “아!”

 “그러게 내가 운전 좀 조심해서 하랬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정수리를 슥슥 문지르는 유진이 영 미덥지 않아 보였는지 그의 옆에 앉은 꼬장꼬장한 표정의 중개상이 무릎을 탁탁 쳐가며 화를 냈다. 물론 그 정도 노기에 꺾일 유진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그의 말에 대꾸했다.

 

 “아, 거참, 잔소리도. 운전 못 해서 조수석에 앉았으면 기사한테 잔소리 좀 하지 마세요. 이래서야 어떻게 카라반으로 살고 계시는 거예요?”

 “사마르칸트에서 새 운전기사 구하려 했다. 통역도.”

 “사마르칸트가 아니라 제6지대요. 그리고 그러실 거면 저를 계속 쓰시지 그래요. 통역도 잘해, 운전도 잘해. 제 어디가 모자라서 새 사람을 구하시려는 거예요?”

 “양심이 있다면 운전은 빼자꾸나. 그리고 넌 건당으로만 일하잖냐. 정착할 생각은 없는 게야?”

 

 유진은 말없이 손바닥으로 운전대를 문질렀다. 갈색 가죽이 씌워진 끈적한 핸들을 쓸어내리는 손짓에 멋쩍음이 묻어났다. 그의 푸른 왼눈은 상대가 아닌 밖을 향했다. 잠시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타이어에 튄 모래가 차체를 치는 소리가 퍽 시끄러웠다.

 

 “말했잖아요. 삶이 평탄하면……. 어색해요. 이제는.”

 “네가 몇 년 생이랬지?”

 “25년이요.”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유진은 아주 고개를 틀어 모르는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의뢰인 쿠루쉬는 망한 세상에 살아남은 사람 중 제법 부유한 축에 드는지라 수고비를 떼먹지도 않았고 상대가 저보다 어리다며 깔보지도 않는 노인으로 모든 것이 좋은 의뢰인이었다만 딱 하나의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지나치게 동정심이 많다는 것이었다. 영원한 밤 이전의 세상을 모르다니 딱하기도 하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소리가 또다시 들려오자 유진은 남몰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의 볼륨을 높였다. 스피커에서 영원한 밤 이전 유명했다던 가수의 목소리가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 걸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대라니, 그것은 너무 아득해 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환상 속 이야기 같았다.

 

 “하여튼 전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지대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인 아스팔트 도로가 보였다. 자동차 주위로 매캐하게 일던 모래 먼지는 자동차의 뒷바퀴마저 아스팔트에 닿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사방이 또렷하게 보였다. 작열하는 태양, 그제도 오늘도 감사한 햇빛과 낮게 자란 풀들. 그 너머로 저 멀리 제6지대로 들어가는 초입이 보였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으니, 추가 수당 받을 수 있겠다. 선글라스를 이마에 올린 유진은 멍하니 일렁이는 울타리를 바라보았다.

 

 “자네, 시간 있나?”

 “저야 남는 게 시간이죠. 아직 다음 의뢰받기 전이고.”

 “그러면 나랑 같이 지대 안으로 들어가지.”

 “네? 갑자기요? 저는 지대 안 사람이 아니라 들어가려면 절차가 복잡할 것 같은데…….”

 “내가 있는데 뭘 그리 걱정해.”

 

 쿠루쉬의 재촉에 유진은 울타리 앞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대신 운전대를 잡은 채 경비 초소를 향해 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지대 안으로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

 

 “잠시 멈추십시오.”

 

 단정한 옷차림의 군인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저 사람도 아담일까? 그는 유진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대신 쿠루쉬가 앉은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그와 무어라 대화하기 시작했다. 갈피 잃은 유진의 시선은 초소 벽에 붙은 포스터에 꽂혔다. 프로젝트 말룸. 저건 또 뭐 하는 프로젝트야? 멀리 있는 글씨를 읽으려 눈을 가늘게 뜨자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영어와 프랑스어, 두 개의 언어로 쓰인 포스터였다. 둘 중 어느 글씨를 읽을까 고민하던 유진을 일깨운 것은 쿠루쉬의 목소리였다.

 

 “유진.”

 “네?”

 “자네 인적사항을 묻는데. 지대 안으로 들어가려면 답해야 한다네.”

 “아, 예.”

 

 조수석에 서 있던 군인이 운전석으로 다가와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창문을 내린 유진은 그가 묻는 것에 정신없이 대답했다. ……한 적 없으십니까? 네, 네.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가 무엇을 묻는 중인지 잘 모르겠다만 그게 무엇이든 아마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속해 본 적 없는 문명 앞에서 바짝 졸아든 유진은 제가 얼마나 법을 잘 지키며 살아왔는지 성심성의껏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늘 계약서를 쓰고 일했고 사기 친 적도 없습니다. 더 화이트인지, 뭔지, 그 동네 법을 잘 모르기야 합니다만…….

 

 “이름은?”

 “유진 예브게니야 에글란틴.”

 “성은?”

 “성이요?”

 

 유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성이요? 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것 이외 별다른 기능이 없는 이름 뒤에 붙는 단어. 유진의 동요는 단지 그에게는 성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 까닭이었다. 나타낼 혈연관계가 없으니, 성도 없었다.

 

 “없습니다.”

 “……없으십니까?”

 

 알겠다는 듯 군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덧붙여 물은 뒤 초소로 걸어갔으나, 유진은 혼란 속에 남겨졌다.

 

 “성이 없어? 유진 예브게니야 에글란틴 세 음절 전부 이름이란 말이지, 자네.”

 “이상해요?”

 “이상할 게 뭐 있나. 문화권에 따라 성이 있고 없고가 다른 데. 뭐, 특이하면 자네 이름이 더 특이했지. 자네 이름은 세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지대 안 사람들은 전부 성을 가지고 있나요? 왜 저런 걸 물어보고 그래.”

 “꼭 그런 건 아닌데. 왜, 이제야 좀 지대 안에 정착해 볼 마음이 생겼나?”

 

 아니요. 아니에요.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유진은 힘없이 대꾸하곤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들을 위해 제6지대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아침 햇살이 모래색 도시를 적시고도 한참. 자정보다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지대는 늘 사람으로 북적였고, 유진은 그것이 못내 불편했다. 그중 저를 아는 얼굴이 있다는 건 더더욱. 누군가 유진에게 어째서 가게 안을 두고 모래 먼지 먹어가며 테라스에 앉아있느냐 물으면 유진은 이리 답할 것이다. 가게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요.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안보다는 밖이 적합한 탓이었다. 유진은 저 멀리 보이는 인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옌, 여기에요! 둥근 선글라스를 쓴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유진을 향해 걸어왔다.

 

 “지대 안에 있겠다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

 “당신이었죠? 내가 6지대에 있다고 소문낸 사람. 어째 다들 나를 한 번씩 보고 가더라고요. 무슨 동물원에 동물 구경 오는 것 마냥.”

 “동물원 가본 적 있어?”

 “없어요. 주워들은 비유 써먹는 거지.”

 

 차양 아래 놓인 원형 탁자에 앉아 차에 설탕을 넣은 건지 설탕 위에 차를 부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단 박하 차를 홀짝이던 유진이 저를 보고 반갑게 걸어오는 이를 보고는 웃는 낯으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상대는 그리 마음 상하지 않았다는 듯 넉살 좋게 웃으며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유진과 마주 보고 앉았다. 뭐 드실래요? 종업원에게서 언젠가는 번듯한 메뉴판이었을 너덜너덜한 종이를 건네받은 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낯선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 내렸다.

 

 “뒷면은 영어인데.”

 “진작 알려주시지.”

 

 만트 드실래요? 종이를 뒤집은 유진은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하나를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천연덕스럽게 물어오는 유진에 옌은 그러라며 손짓하곤 주섬주섬 가방을 열더니 얇은 서류 파일 하나를 꺼내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유진이 화색을 표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자, 부탁한 거.”

 “프로젝트 말룸 지원 서류? 맞죠?”

 “그래, 맞아. 내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를 해 줘야 하는 거냐. 이런 건 좀 알아서 찾아보고 그래.”

 “알잖아요, 옌. 지대 밖은 내 집. 지대 밖은 내 앞마당이지만 지대나 제도권은 제가 감당하기에 너무…….”

 “복잡하다고?”

 “아니요. 그냥 낯설어서 싫다고요.”

 

 유진은 종업원에게 짧은 우즈베크어로 주문을 마치고는 제 앞에 놓인 투명한 파일을 집어 들었다. 파일의 첫 장에는 며칠 전 본 것과 같은 포스터가 끼워져 있었다. 프로젝트 말룸. 유진의 색이 다른 두 눈동자 모두가 프로젝트 공고문에 박혔다.

 

 “그런 애가 더 화이트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는 대체 왜 관심을 가지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유진, 네가 지대 안에 들어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곧장 떠나지 않은 게 그보다 수천 배는 더 놀라웠다고. 그런데 이제는 프로젝트 말룸이라.”

 “그게 그렇게 놀라울 일인가.”

 

 누가 떠들든, 말든, 유진은 꿋꿋이 파일을 넘겨 안에 든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가 그리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유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차양 틈새로 내리쬐는 오전의 말간 햇살이 유진의 얼굴에 길게 드리웠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건 부적응에 기인하기보다는 설렘으로부터 왔다. 무엇에 설레는 건지 정작 당사자도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무슨 생각.”

 “옌은 이름이 옌인 거죠?”

 “그렇지.”

 “성은 장이고. 장 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종업원의 등장에 잠시 대화가 끊겼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곤 맨손으로 덥석 만트를 집어 든 유진은 요구르트에 만트를 찍어 한 입 베어 물뿐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못내 답답해 보였는지 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은 더 같이 일해온 것 같은데, 유진의 속내는 알래야 알 수가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탓에. 뜨겁다며 입을 벌리고 호들갑 떨던 유진은 손을 닦았던 물수건으로 제 입을 두드려 닦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얼마나 대단한 걸 말하려고 저러는 건지. 옌이 기어코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듣고 비웃으면 안 돼요.”

 “그래. 비웃지 않을게.”

 “약속해요.”

 “프로젝트 신청하고 싶으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내 인내심이 바닥나 너 혼자 알아서 하라며 널 버려두고 가기 전에.”

 “사람이 왜 이렇게 성급해요? 알겠어요, 말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냥……. 성이 필요해서요.”

 “성?”

 “나만 없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성? 이름 뒤에 붙는 그거 말하는 거 맞지? 정말 고작, 그딴 이유로 프로젝트에 지원하겠다고?”

 “아니, 프로젝트 신청서를 내면 내 존재가…… 더 화이트에 알려지는 거잖아요. 국가가 내 존재를 확인하는 거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로젝트 신청서에는 성도 써야 하는 모양인데. 이참에 성씨를 가져볼까 싶었죠.”

 

 그게 뭐가 좋은데? 너한테 성이 왜 필요한데? 납득 못 하겠다는 표정에 유진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막보다는 설원에 어울릴 은백색 머리카락은 주인의 기분을 대변하듯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삐쳤다.

 

 “외로워서. 외로워서 그렇다고 해 둘까요.”

 “……외로워?”

 “네. 내가 죽으면, 남는 것도 없고, 내가 죽은 걸 알 사람도 없겠고. 곱씹어 보니 그게 새삼 외롭더라고요. 그래서……. 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 나를 기억해 주면 어떨까, 싶었죠. 이왕이면 성까지 해서. 제도권에 소속되었다는 표시잖아요, 성은.”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사람은 육지에서 땅 멀미를 한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오지 않았더라면, 수평선 너머에 흔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그는 그럼에도 파도를 선택했을까? 위험은 언제까지고 위험인 법이다. 위험은 안식이 될 수 없다. 그는 결국 육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의 성을 물어 따져 가며 사람을 걸러내는 시대였다. 난생처음 발 디뎌 본 지대는 듣던 것보다도 휘황찬란했다. 높은 건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잘 포장된 도로며, 웃으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밤에도 환한 거리. 가로등, 전구, 빛. 악마라는 존재를 모른다는 양.

 

 평생을 평생 하지 않는다면, 변화에 적응할 수만 있다면, 땅 멀미는 바다 멀미로 바뀔까.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이런 식으로 살지 않았을 때의 내가 궁금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제 입으로 토로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유진에게 생존이란 곧 본능이었고 세상에 제 나약함을 내비치는 일은 곧 초식동물이 맹수 앞에 목덜미를 내놓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외로움은 긴 설명 덧붙이지 않고 들먹이기 좋은 핑계였고, 그래서 유진은 옌이 자신을 멋대로 오해하게 두었다. 유진에게 넉살 좋게 웃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웃음은 많은 것을 가리기 좋은 수단이었다. 그 생각 없어 보이는 웃음에 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공문서에 네가 프로젝트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네 목적의 전부다?”

 “말이 그렇게 되나요? 그런 모양이죠.”

 “그러다 덜컥 붙으면 어쩌려고?”

 “붙으면 붙는 거지 뭘……. 지금보다 더 힘들기야 하겠어요?”

 

 만트 한 개를 집어먹은 옌이 넌 참 알 수 없는 놈이라며 나름의 덕담을 건넸고, 나도 안다며 대꾸한 유진이 기분 좋게 식사를 계산했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홀짝이던 옌은 어느새 펜을 꺼내 들고 서류를 작성하던 유진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성은, 결정했어? 무슨 성을 쓸지?”

 “정했어요.”

 “뭔데?”

 

 종이 위에 까딱까딱, 펜이 미끄러졌다. 이름. 유진 예브게니야 에글란틴. 그리고 성. 적기에 앞서 답했다. 남몰래 정한 성을 제 입으로 한번 말해보고 싶었던 탓에.

 

 “유스티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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